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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旅行/우리나라 이곳저곳

거문도 [2004.2.28]

제이우드 || 2023. 6. 2. 15:11

겨우내 여행다운 여행을 한 번도 가지 못했던지라 2004년 첫 여행을 정말 손꼽아 기다렸다.

작년 겨울부터 저기 눈 많은 강원도로 갈까 아님 겨울 서해바다를 보러갈까 혼자 생각도 많이 했지만,

어찌어찌 하다보니 새해가 지나고 2달이 넘은 지금에서야 떠나게 됐다.

올해는 전역하는 해....

이번 한 해도 좋은 곳으로 여행갈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

 

a.m. 9:00

우려했던 일이....아니 어느 정도 예측했던 일이 벌어졌다.

차시간이 가까워 오는데 남군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택시타고 오는 중이라는데...

9시 10분 순천행 버스가 떠나고 잠시후....헐레벌떡 뛰어오는 남군이 보였다.

윤군과 나의 허탈한 웃음에도 만사 재밌다는 남군의 표정이 예술이었다.

아무래도 이번 여행은 남군이 가장 큰 변수가 될 듯...ㅎㅎ

 

p.m. 12:30

어찌됐든 난생 처음 여수라는 곳을 밟았다. 조그만 크기에 차분한 항구도시였다.

문득 전에 여수에서 올라온 하숙집 누나들 두 명 생각났다, 되게 웃기는 누나들이었는데...지금은 잘 사는지 헛헛.

여객터미널에서 13:50분 거문도 직항 오가고호 표를 고등학생 가격으로 예매했다.

우리들을 살펴보던 승무원 아가씨가 씨익 웃더니 흔쾌히 할인 해 주더라고....

남군의 조르기 작전이 생각외로 잘 통해서 생각지도 못한 횡재를 한 셈.

오후에 전국적으로 비가온다고 해서 그런지 여객터미널에는 손님이 한산 했다.

 

마침내 미끄러지듯 배가 출발했다. 하늘은 점점 찌뿌둥하게 변해갔지만 파도가 높지는 않았다.

배가 생각보다 크고 너무 좋아서 다들 만족하는 눈치였다.

커다란 벽걸이 TV가 객실에 네 곳이나 설치되어있고 매점도 있고 의자도 크고 널찍널찍하고....

유명한 돌산대교 밑을 미끄러져 지나간 여객선은 점점 넓은 바다로 향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짠 바닷바람이 상쾌하게 불어온다.

 

p.m. 3:50

애들 표정이 조금 언짢다. 나 또한 머리가 조금 어지럽다.

배가 아무리 커도 바다는 바다인지라 울렁거리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언제부터인가 바깥에서는 빗방울이 흩날리고 안개가 껴서, 가까운 섬에 부딪치는 파도가 흰 포말을 내며 부서지는 것만

너무나 또렷하게 보여 조금 아찔 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1시간 50분 동안의 항해를 끝내고 거짓말처럼 바다 한가운데에 숨어있던 거문도에 도착했다.

울렁거리던 파도도 배가 거문도 안으로 들어서자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지형적으로 천해의 요새로 옛날부터 군사상 어업상 중요한 거점으로 여겨졌다는 말이 정말 인 듯

동도와 서도 사이의 조그만 내해가 정말 완벽한 천연 항구노릇을 하고 있는 정말 특이한 지형이 첫 눈에 확 들어왔다.

 

섬에 발을 내리자 빗방울이 점점 거세졌다.

우선 인터넷에서 미리 낙점지은 '거문장여관'으로가서 짐을 풀었다. 선착장이 있는 고도에서 제법 높은 곳에 있는 곳이라

전망이 좋은 곳이었다. 그건 그렇고 생각보다 거문도라는 곳이 많이 개발된 곳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지에서 2시간이나 떨어진 곳인데 우체국, 은행, 식당, 여관, 노래방 등등 편의 시설도 제법 있고 사람들도 꽤 많이 사는 곳이었다.

난 그저 조그만 마을에 어선 몇 십척이 묶여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여관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뒤 가장 가까이 있는 영국군묘지를 찾았다. 선착장에서 10여분 걸어가면 도착할 수 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거문도 점령사건의 역사적 현장인 곳이다.

구한말 영국이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불법으로 거문도를 몇 년간 점령한 적이 있었다.

뭐 그래도 당시 영국군과 이곳 거문도 주민들은 상당히 우호적으로 지냈다고 한다.

윤군 말대로 비오는 날 무덤 찾아가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과거에는 7기가 남아 있었다고 하지만 일제시대때 일본사람들이 훼손 시켜서 지금은 기념비 포함 3기가 서 있었다.

우리가 흔히 유럽 중세 영화나 드라큐라 영화에서 본 정말 그런 묘비와 나무 십자가가 서 있는게 상당히 이국적이었다.

고향에서 지구 반 바퀴를 돌아와 낯선 타국 외딴섬에 뭍혔을 이 영국 수병들이 자뭇 측은하게 느껴졌다.

그 사람들은 뭣땜에 그런 고통을 느껴야 했을지...

 

우리가 머무는 여관 밑 선착장 고도리 마을에는 식당과 슈퍼가 많았다.

거짓말 안 하고 한집 걸러 슈퍼가 있는 특이한 마을이다. 아마 지금은 비수기라 사람이 한 적 하지만 여름 한 철에는

정말 사람들로 북적일 것 같았다. 오늘같이 흐린 날씨에도 낚시하러 온 아저씨들이 자주 눈에 띄었으니..

저녁으로 인터넷으로 봐둔 식당을 찾아가 거문도에서 유명하다는 갈치조림을 먹었다. 3인분에 26,000원.

식당마다 갈치조림, 갈치구이 메뉴가 빠짐없이 붙어있을만큼 거문도에는 갈치가 많이 잡힌다.

빨간 갈치조림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바깥에는 비가 내리고 방바닥은 뜨듯하고 TV도 잘 나오고 이만하면 낙원이다.

글쎄...언제부턴가 객지에서의 이런 환경이 전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더 편안해 졌다.

가끔의 이런 외도가 어쩌면 숨어있는 역마살을 일깨운건 아닌지 모르겠다. 난 그정도는 아닌데 말이다. 훗

 

오밤중 남군의 난리 쇼를 온몸으로 받아 넘기며 남해 바다 위 거문도에서의 첫 밤을 지냈다.

빗소리가 줄어들 기색이 보이지 않는데 내일은 아침부터 맑은 날씨라 하니 새파란 바다를 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