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안 여행 기피증에 시달려서 인지, 갑자기 속에 있던 무엇을 다 토해내고 싶었다.
충전지를 완전히 방전시켰다가 다시 재충전 하는 것처럼,
내 몸도 그렇게 완전히 방전시키고 다시 채우고 싶었다.
그러면 좀 나아질지도 모르니까....모든 면에서....
a.m. 9:40
흐리고 때때로 비가 내리겠다는 일기예보처럼 버스를 타자마자 차창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처음에는 한 두 방울 맺히더니 덕산을 지날 무렵부터는 비가 제법 쏟아지는게 은근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호석이도 표정이 약간 굳어지는게 시작부터 약간 의기소침한 우리들이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에라, 입산통제되면 집에가서 비디오나 빌려보자'하고 쏟아지는 비를 내심 반기는 마음도 없지는 않았다.
a.m. 11:00
그러나...
이런 게으른 기대는 보기 좋게 무너지고 있었다.
이정도 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아저씨들의 말씀에 우리는 씩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까 그게 결코 좋아서 웃은 건 아니었던 것 같다....하하
'젊었을 때 고생은 나중에 좋은 추억이라..내도 옛날에.. 70년대에..
그때는마.. 묵을그 이른기 많이 있나..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 갖고.. 비 쫄쫄 맞고 강원도 설악산하고
동해안으로 이리 걸어다녔었제.. 그때 해안 경비하든 초소 군인이 내한테 커피도 끓여주고 그랬지...
비맞고 다 이리하는게 나중에 생각해보믄 다 추억이라...'
한 아저씨의 격려를 뒤로 하고
우리의 雨中山行이 시작 됐다.
거림에서 올라가 세석에서 일박하고 촛대봉, 연하봉, 제석봉을 지나 천왕봉에 갔다가 중산리로 내려오는 코스다.
비옷을 입고 빗속을 걸어본지가 얼마나 오래됐을까?
떨어지는 빗방울을 온 몸으로 느끼며 걸어본적이 얼마나 많을까?
언제부터인가 비가 오면 늘 우산을 받쳐들고 빗물에 옷 젖을까봐 조심조심 걸었고
기껏해야 우산을 받쳐든 손에 전해지는 빗방울의 진동이 비와 내가 교감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래서 그런지 비옷을 입고 빗속을 걸어가는데 기분이 참 낯설고 상쾌 했다.
귓전에서 바로 울리는 '후둑, 후두둑, 툭툭..'하는 빗방울 소리와 팔과 손등을 때리는 빗방울의 감촉이
'아, 정말 비 속에 내가 있구나'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느끼게 해줬다.
덩치가 좋다는 원죄 때문에 류군은 우리 짐의 2/3를 내 배낭에 넣고 대신 짊어지고 산을 오르고 있었다.
보라색 비옷을 얼굴만 빼꼼히 내밀고 뒤집어 쓴 류군의 모습은 흡사 텔레토비의 보라돌이와 같았으나,
아쉽게 비가 와서 사진으로 찍어두진 못했다. 아무튼 이날 류군 정말 고생많이 했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내렸다.
산에 오르는 내내.....계속
'때때로 비'라는 일기예보는 여지 없이 빗나가고 '내도록 비'라는 복병을 만난 우리는
한 시간쯤 올라가다가 빗속에서 김밥을 까먹으며 '미쳤지, 미쳤어 이 짓을 왜 하노?'를 연발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올라가는 길에 내려오는 사람 7~8명 올라가는 사람 딱 1명 봤다.
구름과 같은 높이에 이르렀을까?
비는 잦아 들었는데 안개가 낀 것 처럼 온 사방이 뿌옇다....한 20m 뒤로는 온통 뿌옇다.
구름 속을 걸어보기도 참 오랜만이었다.
p.m. 3:00
구름 속에서 마치 거짓말 처럼 산장의 윤곽이 서서히 들어나자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목조로 지어진 '세석대피소'는 생각보다 훨씬 커 보였다. 뾰족한 삼각형 지붕에 안개가 자욱히 깔려있어
더없이 멋있고 이국적이었다.
비옷을 입었어도 온통 젖어있는 통에 서둘러서 여벌 옷으로 갈아입고, 산장 1층에서 몸을 녹였다.
산장에는 이미 한 15명 정도 사람들이 모여서 몸을 녹이고 있었는데,
우리처럼 남자 둘이서 온 대학생들도 있고, 혼자 온 아저씨도 있고, 장년 부부 두 쌍, 커플 한 쌍 등등 이었다.
다들 비도 오는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까?
침낭 속에 드러누워서 류군과 나는 혼자말처럼 서로 궁시렁 거리며 사람들 구경에 신나 있었다.
혹시 추위에 떠는 이쁜 여인이라도 있으면 우리 둘 중 침낭 하나는 빌려줄 용의는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예약자 확인을 하고 2층에 자리를 배정받고 들어가니까 생각보다 시설이 너무 좋았다.
내무반식으로 된 큰 방인데 이층 구조로 된 멋진 구조였다. 온풍기에서는 따뜻한 바람이 술술 불어나와서
언 몸도 금새 풀어졌고, 여기저기 옷 말리는 줄도 쳐져있고..
아무튼 참 아늑한 곳이라 마음에 들었다.
p.m. 6:00
야외 취사장에서 밥해 먹으면서 또 사람 구경을 했다.
우리야 밥을 해먹는다기 보다 햇반 물에 데우고 싸간 반찬 열기만 하면 되는 지라,
햇반 데워지는 동안 남들 어떻게 먹는지 이리저리 구경하는 것도 꽤 재밌었다.
어느 대학 동아리 애들은 제일 넓은 자리 차지해서 역시 햇반에 김치랑 참치랑 막 넣고 끓인 찌개를 해먹고 있고
우리 옆에 아저씨 네 분은 밥하는 솜씨가 산에 어지간히 다닌 듯이 밥도 잘하고 반찬도 한 상 가득 푸짐하게 해먹었다.
또 저기 구석에는 커플 둘이서 밥하다가 사진찍기에 여념 없고...
다른 쪽에서는 아줌마 아저씨 몇 분이 큰 꿀단지에 김치 가득 가져와서는 그걸로 찌개 만드느라 분주하다.
저걸 어떻게 짊어지고 여기까지 왔는지 참 노력이 가상한 어르신들이었다.
p.m. 8:00
배도 부르고, 방은 따뜻하고, 사람들 좋고, 비도 오고....런닝 셔츠만 입고 침낭깔고 드러누워있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옛날부터 이런 산장에서 꼭 한 번 자보고 싶었는데 이 날 그 기대가 110% 충족된 듯했다.
'아, 조~타'를 연발하면서 이리뒹굴 저리뒹굴하다가 이런 저런 얘기도 하고,
간만에 참 편안한 저녁을 보냈다.
산장이 구름 속에 파뭍혀 있어서 그런지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듯이 아늑하고 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