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고맙게도 파랗게 개었다.
파랗다.....
거문도는 총 세 개의 섬으로 되어있는데 동도와 서도가 있고 가운데에 작은 섬 고도가 있다.
고도는 선착장이랑 마을이 있고 서도와 삼호교라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고도가 가장 개발이 많이된 곳이다.
a.m. 10:00
삼호교 위를 지나는데 바닷바람이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불어서 들었다. 역시 바닷바람이라 세긴 세다.
잠시 다리 난간에 몸을 붙이고 바라보는 푸른 바다와 거문항 풍경은 근데 너무 멋있었다.
바람만 잠잠했어도 우리 셋이서 단체사진 한 번 찍었을 텐데..
다리를 건너 10여분 걸으면 유림 해수욕장이 나온다.
마을에서 보면 전혀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만에 자리 잡은 무척 아늑한 곳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철썩이는 작은 파도소리도 제법 크게 울렸다.
오랜만에 밟아보는 백사장에서 잠시나마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며 각자 잠깐동안 나름대로의 생각에 잠겼을 거다.
상훈이는 상훈이대로 유완이는 유완이대로 나는 또 나대로...
해변을 지나 언덕을 넘으면 물넘이라는 해안 바위 지대가 나온다.
거기서 또 15분쯤 동백길을 따라 걸어가면 동양최초, 최대라는 수식어로 유명한 거문도 등대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과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위에 솟아있는 하얀 등대는 정말 한 폭의 풍경화였다.
등대의 하얀 회벽색과 암록색 바닷빛이 너무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등대뒤 관백정이라는 전망대에서 바라본 남해 바다는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과 부서지는 파도 포말로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한 없이 바라보고 싶은 풍경이었다.
비가 온 뒤어서 그런지 하늘이며 바다가 더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아마 여기가 우리나라에서 손꼽을 정도의
'베스트 풍경'이 아닐까 싶다.
p.m. 12:50
등대를 뒤로하고 다시 해변을 지나 덕촌리로 향했다.
덕촌리는 서도에서 제일 큰 마을로 해군기지가 있고 발전소와 같이 여러 가지 공공시설물들이 들어서 있다.
점심으로 빵이랑 우유 등등을 사들고 걸었다. 어제 저녁에 먹은 갈치조림에 애들이 실망한 모양이다.
실은 양도 양이러니와 가격대비 맛에서 좀 실망한건 사실이다. 그래서 간밤에 컵라면을 끓여 먹었을 정도니..
오늘 서도를 다 둘러볼 생각이다. 덕촌리에서 빨간 등대가 서있는 서도끝 서도리 마을이 저기 눈 앞에 보였다.
걸어갈 만 한데...ㅎㅎ
터벅터벅......'아.....멀어....재후이 이제라도 돌아가는게 어때....헐헐' // '시끄...'
해안선이 들쑥날쑥해서 서도리가 보였다 안보였다 하는 통에 모두들 지쳐 버렸다.
생각보다 이거 너무 멀었다. 곧 눈에 잡힐 듯한 곳인줄 알았는데 눈으로 보는 거랑은 전혀 딴판이었다.
중간에 조그만 모래사장에 앉아 가출 소년들처럼 빵을 먹었다.후후
뭐 여행중에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먹는 빵맛도 꽤 괜찮았다.
글세...얼마나 걸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패잔병처럼 서도끝 서도리에 도착했다.
마을 앞 양지바른 곳에 할머니들이 우리를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조그만 꼬마들이 천진하게 노닐고 아저씨들이 어구를 매만지는 소박한 마을이었다.
근데...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빨간 등대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란다. 길이 없는 해안 끝에 있는 등대였던 것이다.
'등대? 거긴 걸어서 못가는데잉...몇 년뒤에 오면 우리가 다리 하나 놔 놓으께'
동네 아저씨가 우릴 보며 재밌는 놈들이구만 하는 식으로 하는 이 말에 우리는 다리에 힘이 쫙 풀려 버렸다.
저 멀리 고도 마을이 아늑히 보였다. 참 많이도 걸었다.
조금 허무하긴 했지만 걸어서 서도를 종단 했다는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덕분에 돌아오는 길은 거문도 콜 택시를 10,000원에 잡아타고 고도까지 와야했다.
여행와서 한낮에 여관방에서 낮잠자기는 처음이다.
다들 적잖이 피곤했는 모양인지 천근만근 다리를 눕히자마자 다들 곯아 떨어졌다.
바닷바람이 여관창문 틈으로 시원하게 불어들었다.
p.m. 5:30
눈을뜨자 서도 넘어로 해가 붉게 넘어가고 있었다. 일몰이라....흠
저녁 메뉴는 5,000원 짜리 백반인데 배가 고파서 그런지 가격대비 만족도가 상당히 높았다.
반찬도 깔끔하고 찌게도 맛있고....섬이라 물가가 꽤 비싼데 특히 밥값이 여긴 상당히 비싼편이다. 제일 싼 메뉴가 백반 5,000원이니...
대신 수퍼에서 물건 사면 눈대중으로 대충대충 계산하고 100원단위 이하는 모두 삭제..인심이 대체로 후하고 사람들이 대체로 순한듯.
저녁에 마을 이곳저곳을 둘러 보았다. 오늘 배로 들어온 단체 관광객들이랑 낚시꾼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해가 지고 사방이 깜깜해지자 바다위 어선에서 밝힌 불빛만이 환하게 눈에 띄었다.
섬에서 하루 종일 지내보니까 벌써 육지가 그립다. 남군과 윤군은 어제 저녁부터 맥도날드 햄버거랑 콜라 타령이니...
사람에게는 두가지 본성이 있는 것 같다.
어딘가에 은폐되고픈 본성과 어디에서부터 벗어나고픈 본성...
섬 여행은 이 모두를 다 느낄 수 있어서 매력적이다.
자신을 고립으로 내몰지만 결국은 탈출을 꾀하게 되는 그런 어떤 것...
여관방으로 돌아와 달콤한 휴식을 가졌다. 내일이면 떠난다.
[04.03.01]
아침 일찍 여관을 빠져나와 선착장에서 배를 기다렸다. 아침은 별로 먹고 싶지 않아서 그냥 이것저것 군것질로 떼우고서...
선착장 앞에는 거문도 특산 갈치들이 손수레위에서 건조되고 있었다. 간간히 그걸 사가는 육지 아주머니도 있고...
냉정하게 깎아대는 육지 아주머니의 핀잔에 섬 아주머니는 그저 웃으며 대답한다.
섬사람들은 바다를 닮아 온화하고 강인한 것 같다. 다들 웃는 얼굴이다...
a.m. 10:30
여수로 가는 배도 우리가 여기 올 때 탔던 오가고호다.
여수에서 올적에 얼굴을 익혔던 승무원 아저씨께 눈인사를 했더니 여행 잘 하고 가냐고 되물으신다.
'예!'
올 때는 잔뜩 찌뿌린 얼굴로 우리를 맞았던 거문도가 갈 때는 너무나 환하게 우리를 보내줬다.
맑은 하늘 파란 바다 사이로 미끄러지듯 배가 밀려갔다.
우리가 어제 고생고생하며 걸어가려했던 빨간 등대 옆을 스치듯 지났다. 다들 어제 생각이 나는지 웃을뿐...
돌아오는 길이 너무 깨끗해 서운한 마음이 더 들었다.
이제 또 일상으로의 복귀...
거문도....결코 쉽게 갈 수 있는 섬은 아닌 듯 한 이 곳을 다녀갔다는 사실이 아마 오랫동안 나를 기쁘게 할 것 같다.
같이 간 유완이 상훈이에게도 힘들 때 활기를 불어 넣을 수 있는 그런 여행으로 기억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