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뭘 했는지, 어물어물 하다보니 가을도 훌쩍 떠나 버렸다.
이제는 떠나 버린 가을의 흔적만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아쉬워서...
가 버린 가을의 빈자리가 아쉬워서, 가을의 끝자락을 붙잡고 싶었다.
a.m. 7:55
시린 아침 바람이 졸음을 확 깨운다. 오늘 전국에 한파가 몰아쳐 올들어 가장 추운 날이란다.
하필이면.....후후
그저께 인터넷으로 순천시에 들어가 시티투어를 신청했다.
'길여'카페에 어느 분이 참 좋다고 하길래, 전에도 한번 가봤으면 했는데 오늘 드디어 가게된 것이다.
시티투어의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경비가 거의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밥값이랑 입장료만 내면 다른 이동에 필요한 교통비가 전혀 들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토박이 가이드의 생생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색다른 점인 것 같았다.
기대반 우려반....버스는 순천으로 향했다.
a.m. 10:00
순천역 앞 관광안내소엔 벌써 사람들이 꽤나 모여있었다.
한 무리의 아줌마 부대랑, 조그만 애기데리고 온 젊은 부부들이 대부분이고,
우리 또래는 누나뻘 되는 아가씨 두분 뿐이었다.
원래 또래가 많아야 재밌는데 어쩔 수 없지.^^
후덕하게 생긴 가이드 아저씨.
여기 저기서 본 바로는 가이드가 참 이쁘다길래 처음엔 앳띤 여자 가이드를 생각했었는데
왠 운전기사같은 아저씨께서 마이크를 잡으시는게 아닌가?
처음엔 인원체크만 하고 내려가실 줄 알았는데....하하
근데 말씀도 참 정겹게 잘 하시고 인상이 참 좋으신 분이었다.
원래 '여수에서 돈자랑하지 말고, 순천에서 인물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순천시'앞에 '아름다운 사람들의 도시'라는 로고가 여기저기 적혀 있는데
그말을 두고 생각해 낸 것이 아닐까? ^^
버스는 곧 순천만을 향했다.
a.m. 10:20
순천만은 순천을 가로지르는 동천의 하구에 자리잡은 호수같은 만이다.
흑두루미를 비롯하여 많은 철새들이 이곳을 찾고 있으며 끝없이 펼쳐진 갈대군락이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차를 타고 한참 들어가는 내내 주변에 갈대밭이 끝없이 펼쳐져 장관을 이뤘다.
이렇게 넓은 갈대밭은 생전 처음이라 입에서 연신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지금은 전망대 공사가 한창 진행중인데 내년쯤엔 전문적인 센터가 들어설 것이라는 가이드님의 말씀.
뻘이라 생각한 것처럼 갈대밭 깊숙히는 들어가지 못하고 가장자리만 들어갈 수 있는데,
내년엔 전망대 위에서 철새와 갈대군락을 관찰 할 수 있을 거라고 한다.
간간히 철새무리가 갈대위를 박차고 날아다니는 모습이 눈에 띄었는데 정말 장관이었다.
추운 날씨에도 여기저기 사진작가들이 그 날아오른 철새를 향해 무거운 망원렌즈를 돌리고 있었다.
철새도 철새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도 멋있고 갈대끼리 부딪혀 사각대는 소리도 참 운치있었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가 갈대밭에 서서 녹음하던 그 시원한 갈대 소리처럼
부드럽게 속삭이는 그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바닷가라 그런지 바람이 몹시 불었다. 그 와중에도 여기 상주하시는 다른 가이드 선생님이
갯벌의 작용, 순천만에 날아드는 철새의 종류 등등 이런 저런 유익한 말씀을 많이 해 주셨고
같이온 분들도 마치 견학온 학생들처럼 귀를 쫑긋세우고 열심히 설명을 들었다.
그 추운 와중에도 기념사진 한컷....추워서 인상 굳고 자세도 굳고...
사진 찍을 때면 언제나 부동자세 밖에 안 나오는 이유는 뭘까?
....항상 어색하다.ㅎㅎ
추위서 이것저것 많이 껴입었다.
a.m. 11:00
상사호.
원래 구경중에 댐구경이 가장 허무하다는 말이 있다.
뭐 그도 그럴 것이 가만히 갇혀있는 물구경은 솔직히 별다른 매력을 느낄 수가 없다.
기껏해야 떨어지는 물줄기의 시원스러움이나 인간이 만든 거대한 구조물에 대한 경외감정도...
전남쪽은 산이 별로 없어서 큰 호수나 댐은 없는줄 알았는데, 그래도 새로운 사실을 알게됐다.
바람까지 불어 그런지 푸른물이 더 맑고 차가워 보였다.
순천에는 상사호와 주암호라는 큰 호수가 두 개 있는데, 상사호는 계곡을 막아서 만든 호수고
주암호는 강의 본류를 막아 만든 호수이다. 이 두 호수 모두 전남 및 광주의 생활용수와 공업용수
수급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한가지 특이한점은 이 두 호수는 터널로 서로 연결되있어
두 호수간의 수량 상호보완이 된다는 점이다. 이쪽이 부족하면 저쪽에서 물이 흘러들어오고.....
이런 구조는 국내 유일이라는 가이드님의 보충설명도 있었다.
우리가 타고온 시티투어 2호 버스는 흔히 마을 버스용으로 많이 쓰이는 아담한 버스다.
상사댐 휴게소에서 핫바를 사먹으며, 역앞에서 경황이 없어 찍지 못한 버스 사진을 찍었다.
작고 아담한 버스....
참고로 1호 버스는 45인승 큰 버스란다.
p.m. 12:00
상사호를 옆에 끼고 드라이브하는것 처럼 선암사로 향했다.
선암사는 조계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태고종의 총림이다. 산 반대편에 조계종 총림 송광사가 있는데,
우리 코스에서는 제외되어 있다. 선암사는 유명한 승선교외에도 동서삼층석탑, 대각국사진영 등
보물 8점을 포함하고 있는 고찰이다. 조계산은 요즘 읽고 있는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 무대로
귀에 익었는데 여기도 볼 거리가 참 많다고 한다. 조계산은 다음 기회에.....
산으로 들어가기 전에 매표소 부근 식당에서 소박한 산채비빔밥으로 배를 채웠다.
원래 남도음식은 뭐든 다 맛있어 보이고, 실재로도 맛이 참 좋은 편이다.
가이드 아저씨도 은근히 남도음식자랑을 하면서 어서 먹어보라고 권할 정도니....^^
밥을 먹고 상쾌한 산공기를 마시며 선암사로 난 길을 걸었다.
너무 늦은 탓일까?
어느새 단풍잎들은 다 떨어져 낙엽마저도 모두 흙빛으로 변해있었다.
조금더 일찍 왔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생겼지만
오랜만에 계곡을 걸으니 기분이 참 신선했다.
헌데 참 안타까운 일이....
선암사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승선교가 완전해체되서 보수공사 중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운치있는 그 아치를 꼭 보고싶었는데, 다리 하부에 문제가 생겨 부득이하게 손을 볼 수밖에 없단다.
정말 안타깝게도 사진속의 모습으로 위안을 삼아야만 했다.
절 바로 밑에 이르면 자연 녹차나무가 눈에 띈다.
회갈색의 배경속에 녹차의 푸른 잎이 더 없이 신선해 보였다.
자연산이라 잎이 조금 억세게 보이긴 했다.
선암사는 뭐랄까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크기에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그런 절이다.
빛바랜 단층과 수수하지만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오래된 고찰만이 가질 수 있는 편안함과 멋스러움이 한껏 스며들어 있었다.
구름하나 없이 정말 티없이 맑은 하늘로 솟은 처마끝에
낡은 풍경이 매달려 은은한 그 소리를 바람에 실어 보내고 있었다.
선암사에는 물론 유명한 보물도 많지만, 누워있는 와송도 유명하다.
뿌리에서 본 줄기가 완전히 수평으로 뻗어있고 중간에 뻗은 가지가 다시 수직으로 자라고 있다.
크다가 누군가에게 밟혀 쓰러진게 그대로 살아났는지, 아니면 뿌리 흙이 무너져 옆으로 누웠는지
원인이야 어떻든 그 기묘한 생김새가 무척 눈길을 끌었다.
선암사는 영화 '취화선', '아제아제 바라아제', 드라마 '다모' 등이 촬영됐을만큼
경내가 운치있고 옛날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그 모습에 취해서 여기저기 둘러보고 걷다보면
나무대롱을 타고 흐르는 맑은 감로수가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준다.
경내 한쪽 구석에 이르면 이런 표지판을 보게된다.
잘못쓴 글자가 아닐까 표지판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문을 열고 한 스님이 바지춤을 추스리며 헛기침을 하고 나오셨다.
'아.....뒤깐....'
그렇다......화장실이었던 것이다.^^
산사는 내가 즐겨 찾는 곳 중에 하나인데 언제나 올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래서 또 다시 찾고 싶어지고....
유명한 선암사 승선교를 보지 못한 것이 참 안타깝지만
'다음 언젠가는 가을 단풍이 물든 이 길을 다시 걷는 날이 오지 않을까?'하며 위안을 삼았다.
p.m. 2:00
마지막 낙안읍성으로 가는 시간이 조금 늦어졌다. 서울서 내려온 아줌마 부대가
선암사에서 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출발이 한 15분 지연됐다.
지각 벌칙으로 차안에서 멋쟁이 아주머니의 멋드러진 노래를 들으며
그래도 너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낙안읍성을 향했다.
마치 어디 효도 관광에 따라 나선 듯한 그런 분위기였다.^^;
p.m. 2:30
꼬불꼬불한 재를 넘어서자 넓은 낙안벌판과 산밑에 자리잡은 낙안읍성이 보였다.
갑자기 조선시대로 들어서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이색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선암사에서는 가이드님의 설명을 듣지 못했던 터라 이번에는 입구부터 가이드 아저씨 뒤만
졸졸 따라 다녔다. 입구서부터 가이드 아저씨의 청산유수같은 설명이 시작됐다.
동문 앞에는 이렇게 석구(石拘, 돌개)가 있다. 해태처럼 일종의 입구 이정표이자 수호신이다.
과거 이곳 낙안은 지세가 좋고 기후가 온화해 먹을 것도 많고 사람들도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고을 이름도 즐거울 락樂에 편안할 안安, 해서 낙안이다.
그런만큼 왜구의 침입을 수시로 받았던 곳이기도 한데, 왜구가 침입해서 잡혔을 경우
고을 동쪽 산으로 끌고가서 처단했다고 한다. 때문에 동쪽으로부터 내려오는 왜구의 귀신을
막기 위해 동문 앞에는 석구가 자리잡게 되었고, 그 왜구의 기운을 누르느라 석구가 붉으스름하게
변했다고 한다.^^
성벽에 올라 나부끼는 깃발아래에 서면 마치 낙안을 지키는 장수가 된 것 처럼 왠지 으쓱해진다.
이곳 낙안 읍성은 과거 유명한 임경업장군의 손에 의해 그 형태가 갖춰진 것인데,
전해지는 말로는 하루만에 축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조금 과장된 표현이고
평지에 이런 읍성을 단기간에 쌓은 것은 임경업장군의 지도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하고
사람들은 추측하고 있다.
성벽에 올라 성안을 둘러보면 정말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풍경이 펼쳐진다.
온통 초가집뿐인 성내에는 실제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관람을 위한 집은 10채 정도라 한다.
얼마전에만 해도 초등학교까지 이 안에 다 있었다는데, 지금은 사람들도 성 밖으로 많이 이주시키고
학교도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실제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는 형태 그대로 보존된 곳은 이곳이 국내 유일이라고 한다.
아무튼 풍경이 너무 정겹고 편안해 한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했다.
작은 연못같은 저것은 '미나리깡'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하수종말처리장'이다.
성내의 모든 하수가 여기로 모여저 정화된뒤 하나밖에 없는 배출구를 통해
성밖으로 버려졌다고 하는데 벌써 몇백년 전에 도시계획을 실시한 조상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부분이었는데 가이드 아저씨의
설명을 듣고 나니까 여행을 너무 가볍게 눈으로만 해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유적지같은 곳에 있는 설명은 대개 건성으로 읽었었는데 앞으로는 천천히 다 읽어봐야겠다.
여기서도 드라마 '허준'이라든지 많은 촬영이 있었다고 한다.
성내 여기저기에 옛스러움의 정취가 물씬 뭍어 있었다.
좁은 돌담길이며, 초가에 달린 호박, 아궁이며 가마솥...
책에서만 보던, TV나 화면으로 보던, 그리고 어릴적 외가집에서 봤던
그 풍경들이 고스란이 눈앞에 다가와 있어서 정말 정겨웠다.
p.m. 4:10
모든 일정을 끝내고 버스는 순천으로 향했다.
하루종일 운전하시느라 수고해주신 기사님께 박수도 쳐드리고
순천을 잊지 말아달라는 가이드 아저씨의 정다운 인사말을 들으며 이별을 고했다.
가이드가 있어서 이런 저런 설명도 듣고 지방색을 알아가는 것도 참 괜찮은 것 같다.
하지만 단체여행이다보니까 행동의 제약도 있고, 시간에 맞춰 움직이다보니
느긋하게 보고 느낄 여유가 조금은 부족했던 것 같다. 그래서 사진도 이쁘게 많이 못찍었다.
조금 연배가 있으신 분들이나 애기 동반한 부부들 나들이하기에는 정말 좋은데,
자유스런 여행에 익숙한 여행고수나, 차분하고 감상적인 여행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좀 허전한 여행일 것 같다. 하지만 하루 코스로 이 경비에 이 만큼 볼 수 있는 것도 드물고
설명도 잘 들을 수 있으니까 한번쯤 와보면 참 괜찮을 듯 싶다.
p.m. 4:30
가는 길은 기차를 타기로 했다. 마침 일정이 조금 빨리 끝나 용케도 차시간에 여유가 있었다.
기차 예찬론자인 나로서는 정말 오랜만에 타보는 기차여서 기분이 여간 좋은게 아니었다.
플랫폼에 늘어선 사람들과 낡은 객차, 제복을 입은 역무원들의 모습...
기차는 탈 때마다 왠지 정겹고 편안하다.
그래서 난 기차예찬론자가 될 수밖에 없고..
밖이 추워서 그런지 객차안이 더 따스하게 느껴졌다.
덜컹이는 기차를 타고 친구와 함께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은,
그리고 그렇게 떠날 수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함께 여행하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이 인생부자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글세....나는 몇이나 있나....
윤군도 오늘 이 여행에 만족했으면 좋겠다.
아직 내가 가고 싶은 곳이 너무 많기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