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 9:30
놀라서 눈을 뜨니 벌써 해가 중천이다. 기태녀석은 아직 꿈나라고. 둘다 정신 없이 곯아 떨어진걸 보면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예상대로 창밖으로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가 여행가면 왜 이렇게
비를 자주 만나는지 모르겠다.
서둘러 씻고 주섬주섬 챙겨 떠날 준비를 했다. 마지막으로 돌아오는 날 아침에는 정말 눈을 뜨기가 싫어진다.
처음 집을 나설 때는 한 없이 기대감에 부풀어 떠나지만, 막상 그 기대감을 품고 돌아가려고 하면
아쉬움과 허탈함에 발을 떼기가 참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아쉬운 발걸음으로 마지막으로 어시장도 둘러보고, 기태는 전주로 대게 한 상자를 택배로 보내고
우리는 영덕으로 가는 군내버스에 몸을 실었다. 부슬비를 맞으며 영덕터미널까지 걸어가서 대구가는 버스를
탔는데 알고 봤더니 영덕에서 대구가는 버스가 다시 강구리를 거쳐 가는 거였다. 괜히 헛걸음만 두 번 했다.
역시 타지에서 움직일 때는 현지 정보를 자세히 들여다 보고 움직여야 한다.
안그러면 이렇게 허튼 일 하기가 쉽상이니...
버스안에서 우유랑 빵으로 아침겸 점심을 때우고, 대구로 향하는 풍광들을 즐겼다.
버스가 7번 국도를 타고 가다보니, 포항까지 동해바다가 우리를 바래다 주었다. 날씨가 좀 화창했으면
푸른빛의 동해를 볼 수 있었을텐데 조금 아쉬웠다.
p.m. 2:30
고속버스가 아니라서 동대구 정류장에 도착했다. 동부고속터미널까지 갈려면 버스 한 코스는 걸어야 했다.
둘 다 피곤해서 별 말이 없었다. 이번에 여행하면서 워낙 많이 걸어서 다리가 묵직하다.
절에서 편안히 쉴 작정으로 하룻밤 보낸다는 것이 하루 사이에 108배를 두 번이나 하고, 강구항에 가서도
내내 걸어다니고, 휴가 한번 오질게 보낸 것 같다.
그래도 기태녀석이 나랑 취향이 비슷해서 둘 다 재밌는 여행이 된게 정말 다행이었다.
여행이라는 것이 어딜 가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가느냐도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같이 가는 사람에 따라서 그 여행의 성격이 많이 달라지니까 말이다.
진지하고 조용한 여행을 같이 하고싶은 친구, 시끌시끌 화기애애한 여행을 같이 하고 싶은 친구는
분명 조금씩 다른 것 같다.
분위기에 맞춰 여행 갈 수 있는 친구가 많으면 그것도 그사람에게는 큰 재산인 것이다.
기태는 다시 전주로, 나는 진주로 헤어졌다. 진주가는 차 시간이 먼저 있어서 내가 먼저 차를 탔는데,
이제와서 생각해보니까 기다렸다가 녀석 먼저 전주로 보내고 그다음에 내가 타고 올걸 하는 생각이 든다.
거리도 내가 더 가까운데 괜히 먼저 탄거 같아 맘 한 구석이 조금 미안하다.
가을에 면회가면 맛있는거나 많이 사줘야겠다.
정말 오랜만에 많은 것을 보고 생각할 수 있어서 마바지 가는 여름을 미련 없이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창밖으로 또 비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