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0.22. 金
아침 6시...
부스스 일어나 정신을 차린다. 간밤에 자다가 한 두 번 깬 것 같은데....
....
세수만 간단히 하고 아래층에 내려가 오랜만에 빵으로 아침식사를 때웠다.
초코크림이 좀 달다.....역시 빵에는 딸기잼이랑 버터야.....
....
따끈한 홍차로 마무리 하고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려는데
꼬마녀석들이 버튼을 죄다 눌러놨다......짜식들
....
배낭을 둘러 매고 서둘러 움직였다. 열차 출발 20분 전이다.
잘츠부르크로 가는 열차....
허겁지겁 서둘러 열차에 올라타니까 출발 10분 전이다......후
아무도 없는 컴파트먼트에 배낭을 휙 집어 던져놓고 잠시 한숨을 돌렸다.
별로 든 것도 없는데 배낭은 맬 때마다 무겁다....캐리어 끌고 오는게 더 좋을뻔 했을까?
....
서서히 열차가 움직이고 선반에 배낭을 올려 놓으려는데, 다른 컴파트먼트 칸에도 사람이 거의 안 보인다.
'이상하네...아까 사람들 막 지나 갔었는데....여긴 왜 아무도 안 앉지?'
순간...
아까 컴파트먼트에 들어오면서 예약석 확인을 안 했던게 불현 듯 생각났다.
역시나.....'Reserviert'
여긴 다 예약석이었다........이런......
뮌헨에서 프라하로 떠난 이후로 열차 예약석은 신경을 안 썼더니
그새 제일 기본적인 것조차 잊어 먹어 버렸다.....헤헤
....
다시 배낭을 들고 어기적 어기적 빈자리를 찾아 옆칸으로 옮겨갔다.
마침 빈이 출발역이라 다행스럽게도 일반석에 간간히 자리가 보인다.
'휴~ '
....
빈을 출발해 열차가 서쪽으로 달리자 지형이 조금 달라졌다.
프라하에서 빈으로 올 때는 넓디넓은 평야지대였는데 여기는 제법 산이 높다.
아무래도 잘츠부르크가 알프스 산맥 지류에 있다보니 이렇게 산이 많이 보이는 것 같다.
원래 잘츠부르크는 뮌헨에서 당일 코스로 가는게 정석이라고들 한다.
뮌헨에서 가면 빈에서 가는 것보다 시간상으로 훨씬 이득인 것은 확실하다.
그래도...잘츠부르크도 엄연히 '오스트리아'에 속하니까 뮌헨에서 국경 넘어 살짝 다녀오는 것보다
'오스트리아'에서 '오스트리아'로서 가보고 싶었다. 그게 연속성도 있고......아무튼 그렇다....훗
....
오스트리아 열차에도 우리나라처럼 손수레를 끌고 간식을 파는 아저씨가 있다.
삶은 계란은 안 파네....
"오렌지 쥬스 없나요?"
"그건 없고 환타 오렌지는 있는데 이건 괜찮으시겠어요?"
"음.....그걸로 하나 주세요..."
빈으로 온 뒤에 노상 탄산이 든 물만 마셨더니 배에 가스가 가득찬 것 같다.
그래서 오렌지 쥬스나 마실까 했는데.....또 탄산이네.....
....
산에 구름이 낮게 깔려있다.
단풍이 살짝살짝 들어간 산들이 참 보기 좋다.
그리고 그 속에 장난감처럼 앉아 있는 집들도 아주 앙증맞고....
오랜 세월 길들여져 손때가 묻은 물건들처럼....
이 사람들의 산과 들 그리고 집과 거리는 어째서 이토록 깨끗하고 보기가 좋은지 모르겠다.
....
잘츠부르크
점심 때가 다 되어서야 잘츠부르크에 도착했다.
날씨가 흐릿하긴 하지만 그렇게 춥진 않다.....
일단 배낭은 코인락커에 넣어 두고 열차표 예약부터 하러갔다.
어제 빈에서 알아본 바로는....
'잘츠부르크'에서 '베네치아'로 가려면 '인스부르크'로 갔다가 야간 열차타고 넘어가면 된단다.
....
"....오늘 저녁 인스부르크에서 베네치아가는 야간열차 예약 부탁드립니다. 한 명이요...."
"잠시만요.....오늘 저녁이라.....쿠셋으로 드릴까요?"
"네....쿠셋으로 주세요..."
"음....죄송합니다....남아 있는 쿠셋이 없네요..."
"에?...어...그럼 그냥 일반석으로 주세요...."
"잠시만요.....일반석도 남은 좌석이 없습니다."
좌석이 없단다. 이럴수가....이런적 없었는데.....
"죄송하지만 다시 한 번 더 찾아 봐 주시겠어요?"
"그러죠......"
"........"
"음.....없습니다...."
이런.....큰일났다.
"제가 내일까지 베네치아로 가야되거든요....여기서 가는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음....조금 기다려 보세요...."
"........."
"에....인스부르크로 가지 말고 빌락이라는 곳으로 가서 거기서 베네치아 가는 열차로 바꿔타면 되요..."
"빌락이요?...그건 열차 시간이 어떻게 되는데요..."
"여기서 새벽 1시 10분에 빌락가는 열차가 있습니다. 빌락까지는 두 시간 걸리구요....
빌락에 내려서 한 20분 기다린 다음 베네치아가는 열차가 들어오면 갈아타고 가면 되죠.
베네치아에 도착하면 아침 8시 40분입니다....어떻게하시겠어요?"
"새벽 1시.....어휴...."
"일단 타임테이블은 한 장 뽑아드릴게요..."
"빌락가는 열차는 예약 안 해도 되죠?"
"네...그건 굳이 할 필요 없습니다...."
"예...고맙습니다."
실수 실수....엄청난 실수다.
어제 서역에 갔을 때 '인스부르크'에서 '베네치아' 구간을 미리 예약해 두는 건데...
아......런던 워털루 역에서 새벽까지 노숙한 것 이후로 최악의 상황이다.
빈에서 가는게 아니라 예약도 안 했었는데....휴가철도 아닌데 완전 만원이라니....
금요일 밤이라서 그런가.....아.....큰일 났다.
....
갑자기 머릿속이 막 복잡해진다.
일단....점심 먹으면서 침착하게 다시 생각 좀 해봐야겠다.
....
....
어떻게하지??
무거운 발걸음으로 찾아간 곳은 Eurospa 수퍼마켓 2층에 있는 셀프서비스 레스토랑.
책에 나와 있는 곳이다.....
토스트 위에 스테이크 한 덩어리와 구운 양파랑 토마토를 얹은 요리.
이름은 모르겠고 맛있어 보이길래 그냥 달라고 했다.
인심좋게 생긴 아주머니가 철판에 지글지글 구워내는 폼이 맛은 아주 좋아 보인다.
지금 중요한건.....이게 아니고.....
테이블에 지도를 쫙 펴놓고 토스트 한 조각을 우물우물 씹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일단 빌락이라는 곳이 어딘지 찾아보니까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국경 사이에 있는 작은 도시다.
그러니까 빌락으로 간다면 빈에서 베네치아로 가는 야간열차를 중간에서 인터셉트하는 격이다.
거리상으로는 인스부르크에서 가는 것보다 오히려 가까운 것 같은데....
문제는 이렇게 가면 오늘 새벽에 잠은 거의 못잔다는 것이다. 크.....잠 못자는거 제일 싫은데....
그냥 여기서 하룻밤 자고 내일 아침 일찍 갈까....그러면 또 하루가 그냥 날아가는데....
고민....
고민....
아....고민....
...
....
매사 모든 일이 뜻대로 다 잘 되는건 아닌 것 같다.
지금처럼 뜻하지 않게 막다른 골목에 놓이게 되면 참 당황스럽다.
그러나 그 길이 막혔다고 다른 길이 다 막혔다는 말은 아니지 않는가?
조금 불편하고 조금 둘러간다 하더라도....부딪쳐보면 별거 아닐거다.
오늘처럼 길이 막혀 다른 길로 가더라도....
새벽잠을 설치면서 열차를 타야 하더라도....
......
이 모든게 여행이 주는 '자유'라는 선물이 아닐런지.....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빌락으로 한 번 가보지머....'
Mirabell Garten
잘츠부르크 중앙역에서 라이너 거리를 따라 걸어가면 작은 굴다리가 나오는데....
그 굴다리 밑을 지나 조금 걷다보면 '사운드 오브 뮤직'에도 나왔던 '미라벨 정원'이 나온다.
'마리아'가 대령의 아이들과 '도레미송'을 불렀던 화사한 그 정원이다.
워낙 어릴 때 본 영화라 모두 다 기억나는건 아니지만
노래 불렀던 장면이 어렴풋이 생각나는 것 같기도 하다.....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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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동산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정원의 분수대 저 멀리 잘츠부르크성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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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정원에 꽃이 없으니 뭐가 빠진 모양새다.
봄처럼 꽃이 화사하게 펴 있으면 참 보기 좋을텐데....
그래도 단풍이 든 담쟁이덩굴과 나무들이 가을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어서 나름대로 운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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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주변을 뛰노는 애들을 구경하면서 잠시 벤치에 앉아 게으름을 피웠다.
날씨가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게 서늘하니 참 좋다.....
어차피 오늘 자정까지는 꼼짝없이 여기 있어야 되니까 천천히 움직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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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벨 정원에서 나와 '마카르트 광장'에 나오니까 갑자기 차도 많아지고 사람들도 많아졌다.
여기서 Straat 다리를 건너면 곧 '구시가'이다.
Getreidegasse
잘츠부르크를 유유히 흐르는 이 강은 '짤자흐 강'
암록색 차가운 짤자흐 강을 건너...
전선가닥이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사거리를 지나...
잘츠부르크의 중심 '게트라이데 거리'에 들어섰다.
매장마다 걸려있는 정교한 철제 간판들이 아주 인상적인 거리로
간판들이 하나같이 모양도 특이하고 공예 작품처럼 정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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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츠부르크가 유명한 또 다른 이유는 여기가 바로 음악의 신동 '모차르트'의 출생지이기 때문이다.
게트라이데 거리를 따라 걷다 보면 만날 수 있는 모차르트 생가....노란색이라 눈에 쉽게 띈다.
모차르트가 어린 시절 사용했던 바이올린, 피아노 등이 전시되어 있다고 하는데 입장료가 다소 비싼 편이다.
물론 모차르트를 좋아한다면 그정도 투자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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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도 우리의 '모차르트' 아저씨가 여기서는 초콜렛도 팔고 있다.
우습네....후후
모차르트는 자기가 먼 훗날 초콜렛 광고판에 등장할 줄이나 알았을까?
....
오스트리아에도 군밤이 있다....오오
연탄에 굽는게 아니라 철판 위에서 굽는 것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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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멍....
이거 보고 처음에 진짜 강아지인 줄 알았다.....후후
마켓에서 '에비앙' 작은 병을 하나 샀다.
캬....얼마만에 마셔보는 탄산 없는 물인가~~
돔광장 일대
게트라이데 거리를 빠져나와 축제극장을 지나자 시장이 열려있다.
야채, 과일, 햄, 꽃, 초콜렛, 치즈를 가득 담고 있는 모습이 우리의 시골장처럼 참 정겹다.
흥정하는 손님들....웃으며 일하는 상인들....
한가로운 오후의 정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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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페터 교회를 지나 다다른 넓은 '돔 광장'에는 '대성당'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774년에 처음 건립한 뒤, 그 후 화재로 파괴된 성당을 1628년에 재건하고,
2차대전 때 공습으로 파괴된 성당을 재건 해 1959년 다시 미사를 열었다 하여
대성당의 세 개 문 위에 각각 '774', '1628', '1959' 세 숫자가 새겨져 있다.
뾰족한 고딕양식 대신에 우아한 로마네스크 양식을 따라서 엄숙하지만 또 편안한 느낌을 주는 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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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다시 넓은 '카피텔 광장'이 있다.
잘츠부르크 성이 바로 머리 위로 올려다 보이는 곳이다.
'Stiegkeller', 'Peterskeller' 라고 쓰인 간판을 따라 가면 되는데
간판을 찾지 않아도 성으로 올라가는 오르막길은 쉽게 찾을 수 있다.
Festung Hohensalzburg
경사가 제법 가파르다 싶더니 견고해 보이는 성채가 어느덧 코 앞에 우뚝 솟아 있다.
'허....높네....'
잘츠부르크 어디에서나 올려다 보이는 이 '호엔잘츠부르크 성'은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유럽에서도 몇 안되는 고성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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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료가 7.20유로....조금 비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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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도 가까이 되는 듯한 가파른 경사를 계속 따라 올라가면
두터운 성벽과 음침한 그늘 뒤편에서 금방이라도 철컹거리는 갑옷을 입은 기사가 말을 타고 달려 올 것만 같은,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성의 내부를 볼 수 있다.
가파른 지형에 이렇게 견고하게 지었으니 아마 여기는 난공불락의 요새였을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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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한가운데는 뜻밖에도 커다란 나무와 작은 성당이 있어서 마치 조용한 시골마을을 보는 듯 하다.
성벽을 따라 이어진 어두운 길과는 사뭇 대조적인 분위기다.
'후......일단 숨 좀 고르고....'
'에비앙' 작은 병으로 잠시 목을 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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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루쪽으로 나가자 잘츠부르크 전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미라벨 정원이랑...교회며 성당도 다 보이고 저기 카피텔 광장에 움직이는 사람들도 개미처럼 내려다 보인다.
'히야~ 전망 좋네~'
굽이치는 짤자흐 강의 곡선도 보이고 단정한 파스텔톤의 지붕들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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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꽤 오랫동안 그렇게 경치에 빠져 망루 위를 서성거렸다.
이렇게 좋은 곳이 있을 줄이야.....마치 동화 속 그림처럼 경치가 너무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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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 이탈리아 커플이 사진을 부탁하길래 한 장 찍어주고 나도 한 컷....히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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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츠부르크 성은 그렇게 큰 성이 아니라서 성 안을 한 바퀴 도는데 그리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는다.
대신 경내에 '성채박물관'과 '라이너박물관'이 있는데 성과 성내부 입장료를 같이 내고 들어왔다면
박물관은 그냥 들어가 볼 수 있다.
일종의 전쟁 기념관 같은 곳으로 과거 합스부르크 왕가시절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의
무기 변천사라든가 오스트리아 국경의 변화같은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다.
4시 30분....
천천히 둘러 본다고 봤는데 발길 닿는 대로 걷다보니 좀 서두른 감이 있다.
그래서 경내 작은 성당 옆에 있는 낡은 벤치에 앉아 또 게으름을 부렸다.
어찌됐건 오늘은 되도록 시간을 길 게 쪼개서 써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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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가...
카피텔 광장으로 내려올 때는 아까 온 길 반대편으로 내려가 봤다.
옥색 지붕을 이고 있는 대성당을 바로 옆에 두고있는 완만하고 긴 내리막길이다.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은 대성당이 선명한 명암으로 더 두드러져 보인다....
하늘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개이고 잘츠부르크 성도 아까보다 훨씬 더 선명해졌다.
'음.....참 근사한 성이다.....'
카피텔 광장 한 쪽에서 체스판이 벌어졌다.
젊은 대학생과 중절모를 눌러쓴 멋쟁이 할아버지.....
여유있는 표정의 할아버지와 달리 이 총각은 아주 진땀을 빼고 있다.
'음.....길이 안 보인다 안 보여....'
다른 사람들도 체스판과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 보면서 조용히 지켜 보고 있다.
한 30분이 지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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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짱을 끼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총각이 할아버지에게 백기를 들었다.
할아버지의 노련함에 젊은 도전자는 경의를 표하고 사람들도 박수를 쳐주면서 노장의 승리를 축하해 줬다.
재밌네....
'Memory, turn your face to the moonlight
Let your memory lead you
Open up, enter in
If you find there the meaning of what happiness is
Then a new life will begin......'
음악의 도시 잘츠부르크에서 듣는 거리의 연주....
뮤지컬 캣츠의 'Memory'를 너무도 멋드러지게 연주하는 악사들 앞에서
음악에 취해고 분위기에 취해서.....가만히 귀를 기울여 잘츠의 낭만을 즐겼다.
....
악사들의 마지막 연주도 끝나고...
대성당을 가로질러 돔 광장을 지나 또 이 골목 저 골목을 뒤지며 시간을 보냈다.
잘츠부르크의 골목도 볼거리가 상당히 많은 편이다.
초콜렛 가게도 있고, 음악의 도시이다 보니 악기를 파는 곳도 상당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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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서점에 들어갔더니 주인이 인사를 하는데 독일어라 무슨말인지 몰라 그냥 씨익 웃어줬다.
뒤적뒤적....
여기도 '클림트' 화보집이 제일 많다.
유명한 'Kiss'랑 'Judith' 외에도 화보집을 보니까 다른 그림들도 참 독특하고 개성있는게 많다.
약간의 광기라고 해야하나.....클림트의 그림은 좀 묘한 느낌을 준다.
....
'클림트' 화보집 다음으로 눈에 많이 띄는 책은 'Sisi'에 관한 책이다.
책이 온통 독일어라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으나 오스트리아의 왕비 쯤 되는 것 같다.
'Sisi'는 애칭이고....
참 미인이다....왕비가 이렇게 미인이라니....
오스트리아 국민들이 꽤나 사랑했던 왕비인가보다. 음....
....
서점에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오니까 하늘이 금새 어둑해졌다.
'저녁은 뭘 먹지.....'
아까 봐 뒀던 중국식당에 다시 가 보니까 뷔페식이라 가격이 너무 비싸고
일식집은 왠지 가기가 싫다. 또 우동 먹긴 그렇네.....
게트라이데 거리 한가운데에 있는 'NORDSEE'
해산물로 패스트푸드를 만들어 파는 제법 유명한 체인점이다.
'저기나 한 번 가볼까....'
새우랑 생선살이 가득한 진열대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이거 햄버거 주문하는 것보다 훨씬 망설여진다.
괜히 이상한거 주문하면 낭패 볼텐데...
한참 고민 끝에 제일 무난하게 생긴 샌드위치를 하나 들고 자리에 앉았다.
'..........'
왠지 좀 꺼림직한데....
한 입....
'우웩~~욱~~'
이런.....샌드위치 안에 들어있는 생선이 완전 날생선이다..!!!!!
'퉤퉤....물물.....'
짜고....물컹거리고....비리고....
완전 실수.... 이렇게 끔찍한 맛 처음이다....이럴 수가....
이건 회처럼 그런 날생선이 아니다. 소금에 절여서 물컹한게.....으 아무튼 너무 이상하다.
왠만해서는 먹어보겠는데 이건 도저히 못 먹겠다.
....
물컹거리는 생선살은 빼내고 샌드위치 빵만 우걱우걱 씹으면서
여행 와서 처음으로 '집 떠나서 이게 뭔 고생이냐'는 생각이 들었다.
아....'날생선살 샌드위치'는 나를 눈물짓게 만들었다....후후
결국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버스를 타고 역으로 돌아와
점심 때 들렀던 셀프 레스토랑에 가서 3.20유로에 다시 저녁을 먹었다.
매장 문닫을 시간에 가면 같은 메뉴라도 반값에 먹을 수 있거든...
이래저래....참 난리도 아니다....풋
빌락 행 열차 기다리기...
7시...
빌락 행 열차를 타려면 아직 무려 6시간이나 남았다.
날은 어둡고....갈 때도 없고....
이제 꼼짝없이 새벽 1시까지 역 안에 있어야 된다.
락커에서 배낭을 꺼내 들고 역안을 두리번거리자니 좀 막막하다.
"저기...여기 열차시간까지 앉아서 기다릴 수 있는 곳이 있나요?"
"위에 가면 대기실이 있어요..."
다행스럽게도 플랫폼 한켠에 아담한 대기실이 있다.
뮌헨에 있던 따뜻한 대기실처럼 난방은 안 되지만, 그래도 찬 바람 술술 불던 워털루 역보다는 훨씬 낫다.
....
대기실 제일 안쪽 자리에 배낭을 얹고 자리를 잡았다.
어차피 '인스부르크'로 가나 '빌락'으로 가나 '베네치아'에 도착하는 시간은 똑같이 아침 8시 40분이다.
여기 이렇게 앉아 있는거나, 열차 안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거나
앉아 있는건 피차일반이니까 좋게 생각해야지뭐....
....
그래도 팔짱을 끼고 대기실 시계를 바라보는데....참 아득하다.
이제 겨우 7시가 조금 넘었는데.....후
.....
.....
열차 시간까지 재밌게 시간 보낼 방법을 찾았다.
일명 '다른 사람 관찰하기 놀이~~'
7시 13분 - 한 청년이 맥주를 마시며 열차를 기다린다.
노숙자같은 중년 남자.....뭘하는지 계속 꼼지락거린다.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쪽에서 온 듯한 아주머니 둘이 들어온다.
7시 15분 - 빨간 모자를 쓴 아저씨. 로빈 윌리암스 닮았다.
7시 17분 - 맥주 마시던 청년이 나간다. 열차가 들어 왔나보다.
7시 20분 - 빨간 모자를 쓴 아저씨도 나간다.
..
8시 7분 - 또 아주머니들이 들어온다. 아주머니들이 많으니까 시끌벅적하니 좋네
8시 15분 - 한 아저씨가 들어오더니 아주머니들을 모두 데리고 나간다. 아는 사이인 듯.
8시 31분 - 한 노부부가 들어왔다. 짐가방이 없네.
8시 35분 - 아주머니들이 모두 사라졌다. 적막강산이다.
8시 53분 - 드디어 아가씨가 등장했다. 열차가 도착했는지 사람들이 제법 들어온다.
캐리어를 끄는 중년 아주머니는 프랑스인 같다.
남미계로 보이는 아저씨가 테니스 채를 매고 들어온다.
..
9시 00분 - 아가씨 퇴장. 자세히 보니까 그렇게 예쁘진 않다.
9시 04분 - 완전히 바비 인형처럼 생긴 아가씨와 역시 멋쟁이 어머니가 등장했다.
힐끔 쳐다보니 정말 늘씬하다.
9시 15분 - 남미계 아저씨 퇴장.
인스부르크로 가는 ICE가 들어왔다.
크....계획대로라면 저걸 타고 가야하는데....아깝다.
9시 20분 - 안경을 쓴 뚱보아저씨 등장. 노숙자 아저씨가 다시 등장했다.
9시 27분 - 바비 인형 아가씨가 나간다. 이거 서운한데...
9시 31분 - 군청색 코트를 입은 할아버지가 캐리어를 끌고 등장.
9시 40분 - 술냄새가 나는 덩치 큰 아저씨가 내 앞자리에 앉는다.
다행이 금방 다시 나간다. 놀랬다.
..
10시 00분 - 프랑스 아주머니가 귤을 까먹는다.
노숙자 아저씨가 낡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엉뚱하게도 쥬스를 꺼내 마신다.
가방에 가위도 있다. 호오....
군청색 코트를 입은 할어버지는 연세가 여든이 지난 것 같은데....
화장실 갈까봐 물도 마음대로 못 마시겠다.
노숙자 아저씨가 쥬스 마시는 걸 보니까 배가 고파져 어제 빈에서 먹다 남은 과자를 꺼내 먹었다.
10시 12분 - 중국계로 보이는 한 남자 등장. 취했다.
10시 17분 - 아까 짐도 없이 들어왔던 노부부가 짐을 가지고 돌아왔다.
10시 47분 - 번개머리를 한 아가씨가 등장.
10시 50분 - 한국 아주머니 두 분이 들어왔다.
그런데 냄새 난다며 다시 나가 버렸다. 까다롭기는....
..
11시 00분 - 노숙자...아니 노숙자가 아니었다. 여권에 열차표까지 가지고 있다.
11시 05분 - 큰 배낭을 맨 아주머니 두 분이 멋도 모르고 술에 취한 중국인 뒤에 앉았다.
힘들텐데....
파리 퐁피두에서 산 책을 꺼냈다. 그동안 절반은 읽었지...
아무래도 오늘 나머지 절반도 다 읽어 버릴 것 같다.
....
Why is everything so far away..?
What does my dog think..........?
Why doesn't she call...............?
11시 13분 - 할아버지 기침이 너무 심하다. 연세도 많은데 혼자서 어딜가시나....걱정이다.
술취한 사람 뒤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 두 분이 결국 자리를 옮겼다. 내 그럴줄 알았다.
화장실 가려고 대기실 밖으로 나오니까 밤 공기가 제법 차다.
배낭을 두고 나왔는데 누가 가져가진 않겠지.....
여기 화장실은 유료다. 0.50유로...
남은 잔돈으로 초코라떼나 한 잔 사마셔야겠다.
대기실로 돌아오니까 내 옆자리에 왠 아주머니가 앉아 있다.
....
Is it okay to close your eyes when you're listening to music...?
12시 15분 - 흡....잠깐 졸았다. 침 흘리고 잔건 아니겠지...
12시 20분 - 롱다리 모녀가 등장했다.
12시 32분 - 배낭족 4명이 들어왔다.
이제 30분 정도만 기다리면 된다. 눈이 자꾸 감긴다.
..
..
드디어 빌락 행 열차에...
차가운 한밤의 공기를 가르며 열차가 들어온다.
입에서 새어나오는 하얀 입김과 날카로운 마찰음에 파묻혀 열차에 올라섰다.
'Munich - Salzburg - Villach'
열차는 지체없이 플랫폼을 빠져나와 다시 어두운 적막속으로 달려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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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차 안에 빈자리가 없다.
어두운 컴파트먼트 안에 간간이 빈자리가 있긴 한데 문을 열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빌락까지 2시간인데.....'
배낭을 풀썩 내려놓고 열차 창문을 열어 젖혔다. 잠이 좀 달아난다.
한 10분을 그렇게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런데 화장실에 갔다오던 멀쑥하게 생긴 노랑머리 애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날 부른다.
"할로~ 들어올래?"
"응?"
"괜찮아 들어와..."
"어...괜찮은데..."
잠시 멈칫하다가 어정쩡하게 그 친구를 따라 컴파트먼트 안으로 들어갔다.
컴파트먼트 안에 다른 친구 한 명이 더 있는데 내가 들어가자 담배연기를 쫓으며 인사를 건낸다.
"고마워....이거 방해가 안 되려나..."
"괜찮아....어디서 왔니?"
"코리아.."
"북에서 왔니? 물론 한국에서 왔겠지?"
"음...그래."
"서...서..."
"서울.."
"그래...서울...서울은 많이 들어봤어."
"담배피니? 담배줄까?"
"아니...난 담배 안 펴.."
"음...그래...안 피는게 좋지. 피지마. 꼭 피고 싶으면 다음에 딱 한 대만 펴봐..."
"피식..."
"씨익...음악 들을래?"
"음...좋지....고마워..."
"락...펑키...힙합...뭐 들을래?"
"음...락이나 한번 들어보자."
"락 좋아하니?"
"힙합보다는 락이 좋더라..."
"그래...그럼 이거 한 번 들어봐.."
노랑머리 친구가 건내준 이어폰으로 시끄러운 락이 흘러나온다.
참 오랜만에 꽂아 보는 이어폰다.
"음...좋네...누구노래냐?"
"뭐 적을 거 없니?"
수첩이랑 볼펜을 내주자 뭘 열심히 쓴다.
"THE HIVES - HATE TO SAY I TOLD YOU SO... 유명한 밴드야..."
"오...그래?"
"어디까지 가는데?"
"빌락에서 내려서 베네치아로 갈거야..."
"어 그렇구나...우린 그 전에 내릴거야..."
그렇게 잠시 내 여행이야기로 흔들리는 컴파트먼트 안을 채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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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학생이니?"
"음....내년에 군대가려고..."
"오스트리아 남자들도 군대가?"
"대부분 공부를 계속하거나 결격사유가 없으면 군대를 가지. 군대가면 많은걸 배울 수 있잖아.
훈련 받을때 근사할 것 같아. 원래 난 유도 선수였어. 학교다닐 때 유럽선수권 대회도 나가고 그랬는데
다치는 바람에 지금은 접었지. 군대가면 많은 도움이 될거야..."
"유도 선수였다고....이야....운동을 좋아하나보다.."
"참 월드컵때 한국 참 대단했어. 정말 잘 하더라."
"고맙다. 오스트리아도 축구 잘 하잖아? 오스트리아 사람들도 축구 좋아하지?"
"그럼...그런데 우리나라는 축구 약체야....우리나라보다 한국이 훨씬 잘 하더라.."
"하하....그렇게 생각하니....근데 유럽사람들은 축구만 하는거 같더라....농구나 뭐 다른건 안 하니?"
"농구, 야구 그런 미국 운동을 왜 하니....그런건 미국 애들이나 하는거야..."
"음...그것도 재밌는데....하긴 미국 운동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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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남북한이 통일되길 바라니?"
뜬금없는 노랑머리 친구의 질문에 잠시 놀랐다. 호오....이녀석....
"그럼...그렇게 되는게 좋지.."
"음 그래..."
"너는 북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데?"
"음....핵무기를 만들고, 독재에다가, 사람들은 굶주리고...문제가 있다고 봐. 그럼 너도 '안티 코뮤니즘'이니?"
안티 코뮤니즘....??
어디서 들어본 듯한데 갑자기 뜻이 생각이 안 나 잠시 시선을 돌렸다.
'안티 코뮤니즘....코뮤니즘....코뮤니즘....코뮤니즘....아~ 공산주의~!!'
"그럼. 나도 '안티 코뮤니즘'이지."
"북한도 북한이지만 부시도 문제야..."
"음...그래...부시가 이라크를 공습한건 실수였어. 유럽 사람들도 부시 싫어하니?"
"어우 그럼...완전 이거야~"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리까는 시늉을 하며 우리 모두 한 바탕 웃었다.
유럽애들과 이렇게 깊은 대화를 나눠보긴 처음이다.
서로 다르지만 또 서로 이렇게 비슷한 사고를 하고 있다는게 참 신기하다.
"다음 역에서 내릴건데 우리랑 같이 내릴래?
맥주 한 잔도 하고 얘기도 더 하자. 잠은 우리 집에서 재워줄게...어때?"
"어우 정말 고맙지만 일정이 좀 빡빡해서 안되겠어. 미안해.."
"하루 이틀 천천히 가면 안되겠니?"
"하하...미안해...."
"너같은 동양인이랑 이렇게 얘기해 보기는 처음이야. 넌 참 괜찮은 놈 같다."
"그래...나도 외국인 친구와 이렇게 오랫동안 얘기해보기는 처음이다. 너도 참 멋진 놈이야."
"하하...고마워. 우린 여기서 내릴거야 빌락은 조금만 더 가면 돼.
차장 아저씨한테 말해줄테니까 여기 계속 앉아서 가도록 해. 즐거웠다. 남은 여행 잘 하길 바래..."
"그래. 고마워 잘까..."
다정히 악수를 하고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플랫폼에 내려서 다시 손을 흔드는 이 친구들에게 나도 웃으며 손을 흔든다. 참 좋은 녀석들이다.
아....왜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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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혼자 남아 얼마쯤 지났을까....
"여권 좀 보여줄래?"
빌락에 도착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 경찰과 차장이 신분증과 열차표를 확인한다.
여권을 받아든 경찰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내게 되묻는다.
"영어 할 줄 아니?"
"네..."
"어디 가는데?"
"빌락이요....거기서 베네치아로 가는 열차로 갈아탈거에요.."
"아...그래? 좋아...조금 있으면 도착할거야."
여행객이 별로 없는 구간인지 배낭을 맨 조그만 동양애가 참 특이한가보다.
그러고 보니 사방에 동양인이라고는 나밖에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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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잠온다.'
하품을 늘어지게 하면서 열차 문에 기대어 있는데 한 아가씨가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나온다.
자리를 살짝 비켜주니까 살며시 웃는다. 아마 저 아가씨도 빌락에서 내리는가보다.
심심한데 말이나 붙여볼까?
"다음 역이 빌락이죠?"
시끄러운 열차 소리 때문에 한 껏 소리를 질렀다.
"아마.....걸요.....그런데.....우디....여기....열차를.....하나요?"
"예???"
가뜩이나 시끄러운데 아가씨의 독특한 억양 때문에 뭐라는지 쉽게 알아들을 수가 없다.
'우디네'에 가려면 여기서 내려야 하느냐고 물어보는 것 같은데.....'우디네'가 어디야?
내가 지도를 펼쳐들자 가까이 다가와 'Udine'를 가리킨다.
베네치아에 가기 전에 있는 작은 도시다.
"아....여기 가려면 빌락에 내려서 베네치아 가는 열차로 갈아타고 가다가 중간에서 내리면 되겠는데요..."
"베네치아 가는 열차는 얼마나 기다려야 돼죠?"
"빌락에서 한 20분 기다리면 될겁니다. 여기 타임 테이블 보여드릴게요. 저도 그 열차 타고 갈거에요..."
"어머 정말요...?"
잠시 뒤 열차는 조그만 빌락 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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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
빌락은 참 작은 시골 마을인가보다.
깜깜한 새벽 속에서 우리나라 시골역처럼 생긴 아담한 빌락 역만 조용히 빛나고 있다.
열차가 빠져나가자 조용한 정적이 몰려온다.
열차에서 내린 사람은 6명 뿐이다. 나처럼 베네치아로 갈 사람들인 모양이다.
"베네치아 가는 열차는 20분 뒤에 저 쪽 선로로 들어온답니다."
"그래요...그럼 우리 어디서 기다릴래요? 밖에서 기다릴까요? 아님 안 들어갈까요?"
갈색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아가씨가 내게 묻는다.
"날도 추운데 들어가서 기다리죠.....훌쩍"
노란 나트륨등이 밝혀주는 대합실 안에 들어가 나란히 의자에 앉았다.
뒤로 묶은 머리와 동그란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가 모두 갈색인 아가씨다.
영어 억양을 들어보니까 아무래도 스페인계 사람 같다.
"이름이 뭐에요?"
"재훈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왔죠. 그쪽은....?"
"린이에요....전 에스파뇰이죠. 뮌헨에서 지금 독일어 공부를 하고 있는데 친척집에 가는 중이에요. 여행중인가보죠?"
"네...한달간 배낭여행 중이에요. 런던에서 파리.....뮌헨, 프라하, 빈을 거쳐서 베네치아로 가는 중입니다."
"아...좋겠다...스페인에는 안 가시나요?"
"하하...네...일정이 여의치 않아서 스페인은 못갔습니다. 바르셀로나가 참 좋다던데...."
"그럼요...너무 멋진 곳이죠. 다음에 꼭 가보세요."
"네...그러죠..."
"여행 가본 곳 중에서 어디가 제일 아름답던가요..?"
"음....다 멋있었는데....전 파리가 좋았습니다...."
"프라하 보다 파리가 좋던가요? 유럽사람들은 프라하를 유럽의 진주라고 하는데. 파리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던가요?"
"음....파리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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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는 나트륨등 밑 의자에 앉아 열차를 기다리는 내내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가끔씩 환하게 웃는 모습이 참 이쁜 아가씨다.
아.....이렇게 아리따운 스페인 아가씨와 오붓이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니....
자꾸만 '제시'와 '셀린느'가 생각나는 이유는 뭘까?
"동양인하고 이렇게 대화해보기는 처음이에요...뮌헨에 돌아가면 친구들에게 자랑해야겠어요.."
"헤헤....저도요.."
아쉬운 20분이 훌쩍 흘러가 버렸다.
이내 열차가 들어오고 린과 나는 열차를 향해 뛰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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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행 야간열차
빈에서 손님을 가득 싣고 온 열차라 빈자리가 마땅히 안 보인다.
나는 배낭을 매고, 린은 캐리어를 끌고 빈자리를 찾아 계속 객차 안을 걸어갔다.
"자리가 있을까요?"
"글쎄요....앞으로 계속 가보죠.."
그렇게 컴파트먼트 칸을 지나서 일반실의 문을 여는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헉....이게 뭐냐....'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도 아닌데 객실안이 돼지우리처럼 엉망진창이다.
의자를 뒤로 젖히고 널부러져 자는 사람은 그래도 양반이다.
의자 두 개를 차지하고 그 위에 가로질러 누워있는 사람...
통로로 다리 쭉 내밀고 자는 사람....아예 통로 바닥을 가로질러 누워 자는 사람도 있다.
잠자는 포즈가 참....가관인 것이 우리 상식으로는 조금 받아 들이기 어려운 모습이다.
다른 사람의 이목에 신경쓰지 않고 편하게 행동하는게 이들에게는 당연한 건지 모르겠지만...
통로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누워자는건 좀 심했다.
커다란 짐짝처럼 통로를 막고 누워자는 사람들을 조심조심 뛰어 넘어 다시 반대편 컴파트먼트 객차로 들어갔다.
마침 딱 두 자리가 비어있는 컴파트먼트가 하나 있다.
"여기 어때요...?"
"좋아요.."
짐을 선반 위에 올려 놓고 린과 마주보고 서로 씨익 웃었다.
'휴.....이제 베네치아까지 가면 되겠구나.....에고...'
새벽 4시....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한 숨도 못잤더니 자리에 앉자마자 졸음이 쏟아진다.
고생은 좀 했지만 그 덕분에 좋은 사람들을 만나 참 많은 대화를 나눴다.
오히려 인스부르크로 안 가고 빌락을 거쳐서 오게 된게 훨씬 잘 된일이었다.
오늘.....난 정말 '여행'을 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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