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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旅行/유럽배낭여행 | 2004

유럽배낭여행 [빈]

제이우드 || 2023. 6. 15. 21:52

2004.10.21. 木  

 

또 케밥...

아무래도 케밥에 중독됐나보다....

밥 위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는 양고기를 생각하면 다른건 먹기가 싫다.

이만한 가격에 이만한 양에....게다가 맛있는걸 어떻하나....

.....

어제 아침에 보고 오늘 또 보고....

잘 생긴 레스토랑 종업원이 먼저 눈 인사를 건낸다.

오늘은 어제 먹은거랑 다른걸 시켰더니 양고기가 기다란 걸로 나오네...

부드럽게 다진 양고기....우훗~

...

느긋하게 칼질을 하면서 오늘 일정과 앞으로 남은 10여일의 일정에 대해서 천천히 생각 좀 해봤다.

어제 저녁 침대 위에 누워서부터 책을 뒤적거리며 꽤나 많은 고민을 했는데...

스위스는 아무래도 남겨두고 떠나야할 것 같다. 다음을 위해서....

당장 오늘 밤 야간 기차로 넘어갈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이탈리아에서의 일정이 너무 버거울 것 같다.

그렇게 여행 하긴 싫거든....

뭐에 쫓기듯 허겁지겁 바쁘게 여행하는건 이제 싫어졌다....왜 그래야 하는데?

바쁜 일상을 탈출해서도 사람들은 빡빡한 여행 스케줄에 늘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는 것 같다.

하루 이틀만에 계속 이 도시 저 도시를 점 찍듯이 움직이면서 과연 얼마나 한 곳에 충실할 수 있을까?

나도 역시 그랬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여행하고 싶지 않다....

적어도 이제부터는 말이다.

....

 

어제 책에서 흥미로운걸 알아냈다.

책 한 쪽에 조그맣게 적혀 있어 그동안 늘 지나쳤었는데, 빈 유엔 본부에 가면 가이드 투어가 있단다.

UNO-City....그러고보니 빈에 유엔 본부가 있다는 사실을 깜빡했었다.

'프라터'에나 갈까 했는데 '셀린느'도 없이 혼자 가면 괜히 심심하기만 할테니

오늘은 UNO-City...유엔 본부에나 한 번 가봐야겠다.

....

 

한참 맛있게 케밥을 먹고 있는데 뒤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도 한국말로....

왠 한국인 아가씨 둘이 레스토랑 안에 들어와서는 쭈뼛거리며 망설이고 있다.

살짝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해 줬더니 아주 반색을 하며 말을 건낸다.

잠시 이런저런 여행 이야기를 하면서 정보 교환도 하고.....

 

계산하고 나오면서 잘생긴 종업원에게 빈에 영화관이 어디있냐고 물어봤더니

아주 희한하다는듯 나를 쳐다보고 이렇게 대답한다.

 

"빈은 그냥 모든게 다 아름답습니다...."

 

빈 거리를 거닐다..

새벽에 비가 왔었나보다.

안개가 살짝 내려앉은 거리에 물기가 촉촉하게 배어있다.

....

안개에 묻혀 흐려진 슈테판 성당의 높은 첨탑을 가운데 두고 성당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이른 시간이라 아직 손님을 태우지 못한 마차들이 마치 택시들처럼 성당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다.

....

성당 뒤편에 있는 작은 꽃집에서 팔고 있는 예쁜 꽃장식들...

꽃꽂이도 아니고....이런걸 뭐라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참 이쁘다.

벽에 걸 수 있게 만든 것도 있고 화분처럼 바닥에 두는 것도 있는데

화사하니 향기도 은은하게 나고 다들 아주 섬세하게 만들어졌다.

 

'이야.....이쁘네....'

.....

케른트너 거리를 걷다가 왼쪽 골목길로 한 번 들어가봤다.

중심가를 약간 벗어난 것 뿐인데 여기는 무척이나 조용하다.

 

좁은 골목을 굽이굽이 걸어가면 테이블 두 개만 있는 노천 카페도 있고

제법 낡은 문을 갖고 있는 집들도 만날 수 있다.

 

비가 와 물기를 머금은 공기때문인지 터벅거리는 내 발소리가 골목 한 가득 울린다.

 

....

한 참을 걷다보니 'British Bookshop'이 있다.

뭐 특별히 살건 없지만 괜히 한 번 들어가 그냥 이 책 저 책을 뽑아봤다.

여행 안내서에서 여러 가지 소설책까지....여기도 영어 학습지가 꽤 많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역사서와 '클림트' 화보집도 한쪽에 수북히 쌓여 있어서 구경할 게 꽤 많다.

...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문득 눈에 띄는 책 하나가 있다....'게이샤'

한 영국인이 일본 기생 '게이샤'에 대해 쓴 일종의 다큐멘터리다.

빽빽한 글씨에 제법 손이 묵직하다....

 

'서양사람들은 일본에 대해서 이런 것 까지 관심을 가지는데 우리는 이들에게 알려진게 너무 없네...'

책을 한 번 스윽 훑어보는데 그냥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서점에서 우리나라에 대한 책은 론리플래닛 Korea 뿐이다...

조금 서운하네..

다시 케른트너 거리로 향하는데 왠 아가씨가 정말 작은 개를 끌고 간다.

땅콩같은 녀석이 핑크색 옷을 입고 총총거리며 따라가는데.....어찌나 우스운지....히죽

....

유럽 사람들 개 참 좋아한다....먹는걸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라....후후

유럽에 오니까 길거리에 개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 정말 많다.

지난번에는 송아지만한 개를 한꺼번에 5마리 끌고 가는 아저씨도 봤다.

그런데 애견문화가 발달한지 오래되서 그런지 주인이나 애완견이나 참 자연스럽다.

자연스럽다는 표현이 어떨런지 모르겠지만...

애견문화가 오래된 곳이라 그런지 유럽사람들은 개를 길들이는 것에도 특별한 노하우가 있는 것 같다.

대부분 개들은 목에 끈을 매고 조용히 주인을 따라다니고

정말 길이 잘 든 경우는 끈이 없어도 기특하게 주인 옆에 딱 붙어 다닌다.

주인이랑 지하철을 타더라도 주인 발 밑에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이 퍽 자연스럽다.

글쎄....우리나라는 안 그런거 같은데.....아닌가? 훗

....

Graben을 따라 걷다가 마주한 어느 동상....

동상을 둘러싼 고전적인 건물들이 근사한 곳이다.

여기도 케른트너 거리만큼이나 사람들로 붐비는데 오히려 거기보다 고급스런 상점이 더 많아 보인다.

게다가 하늘에 낮게 안개가 드리운 날씨 때문인지 아직까지 촉촉한 거리가 한 껏 멋스럽다.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사진을 부탁하길래 동상을 배경으로 한 컷 찍어줬다.

'땡큐~'하고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이.....어우~ 너무 이쁘다.

다들 왜이렇게 다 이쁜거야....히히

....

'Michaeler platz'까지 걸어갔다가 U-bahn을 타러 다시 슈테판 광장으로 돌아왔다.

 

그냥 가려다 왠지 아쉬워 마지막으로 다시 슈테판 성당에 들어갔더니

마침 정오 예배중인지 사람들이 조용히 앉아 기도를 하고 있다.

웅장한 듯 아련한 듯 울려퍼지는 오르간 소리가 성당안을 부드럽게 휘감는다.

예배석 뒤에 서 있던 다른 관광객들도 조용히 눈을 감고 오르간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한쪽 무릎을 꿇고 성호를 긋는 사람도 있다...

참....좋아 보인다....다들 저렇게 착하게 살면 참 좋을텐데.....

....

성당 한 켠에 나도 촛불 하나를 켰다. 이거 한 번 해보고 싶었거든.....

0.58유로를 헌금상자에 넣고 작은 촛불에 불을 붙여 위에서 두 번째 줄에 조심조심 촛불을 올려놨다.

아롱아롱 흔들거리며 환하게 타오르는 촛불.....

가만히 그 불꽃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참 편안해지는 것 같다.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하나 하고 물끄러미 촛불을 바라보다가.....

....

그냥 촛불만 바라봤다.

 

...

 

UNO-City

스테판 광장에서 U1을 타고 빈 외곽으로 나갔다.

도나우 강도 건너고 유명한 '프라터'를 지나서 내린 곳은....U1 Vienna Int.Centre.

현대식 깔끔한 외관에 아주 미래적인 느낌이 풍기는 곳이다.

에스컬레이터 바로 옆에 있는 UN 표지판이 친절하게도 길 안내를 대신 해 준다.

북한 덕분에 우리에게 익숙한 IAEA도 보이고....

UN이라는 마크를 이렇게 직접 대해보긴 처음이라 그런지 왠지 좀 긴장된다.

 

'UN Visitor Centre라....이쪽인가?'

U-bahn역에서 빠져나오니까 뉴스에서 자주 봤던 그 유명한 UN 본부 건물이 떡 하니 서 있다.

이미 다 알듯이 원형으로 휘어진 그 모습이 아주 독특한 건물이다.

실제로 보니까 더 큰 것같다.....

이 곳이 바로 UNO-City라는 곳인데 세계 곳곳에서 온 4,000여명의 각국 직원들이

아무 불편없이 독자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시설이 갖춰진 일종의 작은 독립도시라고 할 수 있다.

빈 중심가로부터 조금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국제기구가 있는 곳 치고는 무척 조용하다.

....

약간 상기된 마음을 진정시키며 살며시 '방문자 센터' 안으로 들어갔다.

 

'와....이게 뭐냐.....'

 

가이드 라인이랑 보안 요원이 떡 버티고 있는 '방문자 센터' 안은 흡사 공항 출국심사대같다.

창구에 서서 보안요원에게 연신 서류랑 신분증을 들이미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ID카드를 매단 UN직원들이 분주하게 왔다갔다 하고....

X레이 검색대에 앉아 있는 보안요원은 본관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ID카드와 소지품을 일일이 검사하고 있다.

역시 국제기구라서 그런지 보안검색이 철저하다.

허긴.....안 그래도 요즘 테러 때문에 공항이며 관공서며 다들 신경이 예민해져 있을테니까....

....

'일단....분위기 파악 좀 하고....'

 

천천히 내부를 한 번 스윽 훑어 본 뒤 안내 데스크로 가봤는데 직원이 없다.

이 직원들 어디 간거야? 보아하니 여기서 가이드를 붙여 주는 것 같은데.....

잠시 의자에 앉아 멀뚱멀뚱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데스크 직원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

근데 한 10여분 기다렸는데도 당최 나타날 생각을 안 한다.

'이거....가이드 투어 안 하는거 아닌가? 책이 또 거짓말 했나?'

 

보안요원에게 물어보긴 좀 그렇고....

안내 데스크 옆 UNICEF 구호 기념품 판매대에 있는 점잖은 할머니에게 여쭤봤다.

"저기...실례합니다.....저기 직원들 어디갔나요?"

"아...지금 점심시간이라 그래요....조금만 기다려봐요 1시쯤 되면 올거야..."

"예...고맙습니다..."

"뭘~"

...

1시라.....아직 15분 남았다.

 

'방문자 센터' 안에는 미용실도 있고 카페테리아도 있고 UN 관련 기념품 가게도 있고

아까 말한 UNICEF 구호 기념품 판매대도 있다.

거기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엽서로 만들어 팔고 있는데 벌써 크리스마스 주제로 그린 그림도 있다.

좀 전에 일본 직원 한 분이 와서 자기 애들 준다고 하나 사가더만....

....

혹시 우리나라 직원이 지나갈까 싶어 출입문을 계속 예의 주시해봤는데 ID카드가 너무 작아 관뒀다.

그래도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 이렇게 한 곳을 들락날락거리는게 참 신기하다.

그야말로 여기는 전세계 사람들이 다 와 있는곳이 아닌가....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유럽인, 북미인, 남미인.....백인, 흑인, 황인.....

세계 화합을 위해 각국을 대표해서 분주하게 일하는 이 사람들을 보니까 참 근사하고 부럽다.

저 사람들은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열심히 일하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뿌듯하고 자랑스러울까?

조국을 대표해...인류 평화를 위해...가슴에는 ID카드를 꽂고 UN본부를 출입한다...

크....생각만 해도 너무 멋있지 않은가?

 

단정한 미니스커트에 긴 코트를 겹쳐입고서 ID카드와 서류가방을 들고

당당히 걸어나가는 한 아시아계 여성이 참 멋있어 보인다....

능력만 된다면....그리고 기회만 된다면 이런 곳에서 일하는 것도 참 좋을 것 같다.

....

..

 

UN본부 안으로...

 

"국적이 어떻게 됩니까? 여기 여권 번호 쓰시고....학생증 있으시죠?....."

 

1시 10분쯤에야 안내 데스크 직원이 돌아와서 가이드 투어 접수를 받았다.

한 무리의 건장한 독일 아저씨들과 양복을 쫙 빼입은 중국 아저씨들.....

그리고 인도인 노부부 한 쌍이 나랑 같이 접수했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다...

....

..

 

투어 시간이 다됐는데 아까 우르르 몰려있던 중국인 아저씨들은 지금 일행들이 없어져서 난리다.

아까부터 계속 산만하게 돌아다니고 떠들고 하더니 그사이에 다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아무래도 그분들은 오늘 가이드 투어 받기는 힘들 듯....

 

중국 아저씨들 때문에 시간이 조금 지체된 가운데 독일어 가이드팀이 독일 아저씨들을 데리고 먼저 출발해 버리니까

나랑 인도인 노부부 한 쌍.....이렇게 딱 세 명만 남았다.

'참 맞다....여기도 독일어권이지....맞다맞다...'

내가 영어만 사용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도 다 영어만 쓰는줄 알고 잠시 착각했다.

 

"영어 가이드 받으실분 이쪽으로 오세요~"

중국 아저씨들 무리가 빠져준 덕분에 영어 가이드 팀은 인원이 단촐하게 세 명으로 줄어들었다.

어쩌면 가이드 설명을 더 자세히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 오붓하니 좋은데~

 

어여쁜 가이드 누나를 따라서 보안 검색대를 지나 UN본부 앞 분수대 광장에 들어섰다.

전세계 UN회원국의 국기가 분수대를 따라 둥그렇게 게양된 모습을 보니까 괜히 가슴이 막 벅차오른다.

 

'햐.....내가 UN본부에 다 들어오다니.....'

...

"안녕하세요. UN본부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저는 '올가'라고 합니다. 프랑스어와 영어 가이드를 맡고 있죠.

오늘은 인원이 작아서 오히려 편안하고 재밌게 이곳을 안내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얼굴만큼이나 이쁜 목소리로 가이드 누나의 안내가 시작됐다.

....

 

"이곳은 빈 UN본부의 입구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UN에 가입한 회원국들의 국기가 게양된 곳이죠.

저기 왼쪽에서부터 알파벳 순서로 게양되어 있습니다.

알파벳 순서니까 그럼 어느 나라가 제일 앞에 있을까요? 한 번 맞춰 보세요~"

"음....A니까...'알제리'...아니 '알바니아'아닌가요?"

"하하...'알바니아'는 두 번째에요...어딜까요?"

"글쎄요....."

"제일 앞에 게양된 나라는 바로 '아프가니스탄'입니다."

"아~"

"현재 UN에는 191개국이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구요....

가장 최근에 가입한 국가가 2002년에 가입한 '티모르'입니다.

그리고 '바티칸 시국'은 비회원국이지만 국기는 게양되어 있지요...

자 그럼 로비로 들어가 볼까요..."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UN회원국 국기가 걸려있는 넓은 로비가 나온다.

 

"여기는 라운지 로비에요. 일종의 생활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식사를 할 수 있는 곳도 있고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도 있지요.

보시는 것처럼 천장에는 회원국들의 국기가 걸려있습니다.

여러분들 나라 국기도 한 번 찾아보세요...여기도 알파벳 순서로 걸려 있거든요..

그리고 저렇게 벽에 걸려있는 그림이나 이런 조각들은 회원국들이 기증해서 전시해 놓은 것들입니다.

이건 프랑스에서....그리고 저 그림은 중국이 기증한 것이죠...."

 

로비 안에는 프랑스가 기증한 그림들과 조각, 중국이 기증한 커다란 서예작품을 비롯해서

그외에 몇몇 나라에서 기증한 문화예술품이 여럿 전시되어 있다.

 

"자 그럼 엘리베이터를 타고 홍보 영화관으로 올라가 볼까요...

중간에 보안상 출입이 제한 되는 곳이 있어서 엘리베이터를 타야 됩니다. 저를 잘 따라 오세요."

 

가이드 누나를 졸졸 따라가면서 건물 내부를 들여다 보니까

마치 대학교 복도 처럼 양쪽에 방이 꽉 들어차 있다.

일하는 분위기가 사뭇 진지하다....

....

 

"지금부터 2003년도 UN이 활동한 내용을 담은 16분짜리 홍보 영화를 보게 될거에요...

UN이 작년에 어떤 일을 했는지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할 건지 잘 알 게 되실겁니다.

영화 다 보고 나오시면 제가 선물 하나 드릴게요. 인공위성이 찍은 빈 시가지 사진을 갖다 드릴테니까

자리에 앉으셔서 잠시만 기다렸다가 영화 다 보시고 저 문으로 나오시면 됩니다."

....

아담한 영화관에 인도인 부부와 나란히 앉았다.

"어디서 왔는가?"

"예...한국에서 왔습니다."

"오...서울에서 왔나?"

"네...거기서 공부하고 있지요..."

"우리는 인도에서 캐나다로 이민간지 16년 됐어....그래 무슨 공부 하는데?"

"생명과학 전공입니다..."

"응?"

"미생물, 유전학....뭐 그런거요..."

"아~ 그거~ 이야 어려운 공부 하네..."

"히...뭘요..."

 

홍보 영화가 시작되고 대화가 잠시 중단됐다.

기아대책, 식량문제, AIDS문제....그리고 역시나 테러와 이라크 전쟁에 대한 UN의 입장을 제시한 영화다.

정책 홍보용 영화다 보니 영어단어가 꽤나 생소해서 대충 의미만 알아들었는데

모든 홍보성 영화가 그렇듯이 뭐 그렇고 그런 내용이다....후후

....

 

"영화 잘 보셨어요? 그럼 지금부터는 지금 우리가 있는 이 UN 건물 구조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죠.

여기 모형 보이시죠?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이 부분입니다...UN 건물 한 가운데에요.

여기가 바로 IAEA가 있는 곳이구요...저기 창밖으로 길건너 보이는 건물있죠?

저기를 '오스트리아관'이라고 하는데...

여러분이 아실지 모르겠지만 UN 본부도 마치 대사관처럼 고유의 영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 밑으로 보이는 경계담 밖은 오스트리아고 그 안은 UN의 영역이지요.

빈에 UN 본부가 들어설 때 오스트리아 정부가 재원의 대부분을 부담했었습니다. 원래 여기는 다 공터였어요...

그런데 대규모 회의를 하기에는 장소가 협소했지요.

그래서 UN 건물 바깥에 저렇게 '오스트리아관'을 따로 만들어 UN 건물과 연결시킨겁니다.

지금 큰 회의는 거의 대부분 저곳에서 열린다고 보시면 됩니다.

엄밀히 따지면 UN과 오스트리아를 오고가기 때문에 출입상에 필요한 절차가 있지만 저곳은 예외라고 할 수 있지요.

저기는 민간인이 들어갈 수 없으니까 대신 다른 회의실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를 따라 오세요...."

"이곳이 회의실입니다. 혹시 UN이 사용하는 공식 언어가 몇 가지나 되는줄 아십니까?"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음..."

"스페인어....아라비아어.....또 있어요?"

"모두 6개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어요.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스페인어, 아라비아어 그리고 마지막으로.....러시아어에요.

지금 UN에는 이 여섯 개 언어를 구사하는 통역사들이 근무하고 있는데,

음....아라비아어같은 경우는 워낙 어렵기 때문에 아라비아어를 영어로 번역한 뒤에

각각의 언어로 다시 통역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상당히 번거롭죠....

어머 거기 남자분들 제 말에 집중 안 하실 거에욧~! 아주머니 남자들 빼고 우리끼리 갈까요~?"

 

나랑 인도 할아버지가 서로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사진찍는데 여념이 없자 가이드 누나의 애교섞인 불평이 이어진다.

 

"헤헤....죄송해요....집중해서 잘 들을게요..."

"좋아요....그럼 계속하죠. 저기 회의실 위쪽에 칸막이가 된 공간이 보이죠?

회의가 시작되면 통역사들은 저기에 앉아서 통역업무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통역사의 근무 시간은 일정하게 정해져 있어요.

그래서 회의가 길어지더라도 통역사가 없으니 회의를 더 이상 진행할 수가 없습니다.

통역사가 근무하는 다음 날까지 회의는 그대로 정지상태에 있게 되죠.

......"

UN의 회의가 통역사들의 근무시간에 제한을 받는다는 사실이 좀 특이하다.

 

회의장을 빠져나와 다시 로비로 내려가면서 가이드 누나와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 받았다.

"학생이에요?"

"네..."

"그럼 여기 유학온거에요? 아님 한국에서 공부하는 건가요?"

"유학이라뇨....헤헤....한국에서 공부하고 있죠. 유럽에는 배낭여행 온 거에요..."

"어머...정말요? 재밌겠다...그럼 전공이 뭔데요..."

"생명과학이요.....유전공학 뭐 그런거에요...."

"와....자연과학도군요....대단하다....빈에는 언제 왔어요?"

"이틀됐죠....오늘이 빈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에요....내일이면 또 떠나야죠..."

"그래 빈에 있어보니까 어때요?"

"뭐...참 매력적인 도시같습니다. 조용하고....깨끗하고....운치있고...."

....

"여기는 인류가 우주에 얼마만큼 다가섰는지 보여주는 곳입니다.

아폴로호가 가져온 '월석'도 있죠. 그리고 이건 우주정거장에서 키우고 있는 새우의 일종입니다.

무중력상태에서 생명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조사하기 위해 우주정거장으로 보내졌죠.

생명과학 전공하시니까 이런데 관심이 좀 있겠어요~"

 

여러 우주선 모형 가운데 얼마전 중국이 발사한 유인 우주선 '神舟'호 모형도 떡 하니 전시되어 있다.

아까 방문자 센터 입구에도 하나가 서 있더니만....중국 아저씨들이 그거보고 아주 좋아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중국의 힘이 이제는 우주과학 분야에서도 점점 커지는 것 같다.

일본 로켓 모형도 그 옆에 당당히 서 있는데 우리나라는 언제쯤 저 반열에 끼게 될지....

....

 

마지막으로 다시 로비를 거쳐 천천히 분수대 광장으로 걸어 나오면서

한 시간에 걸친 가이드 투어도 슬슬 마무리지었다.

 

"오늘은 인원이 적어서 분위기가 한결 좋았네요.

사람이 많으면 통솔하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거든요.

그리고 원래 제가 영어보다는 프랑스어 통역이 전문이라

오늘 설명이 다소 미흡했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아닙니다....설명 너무 감사해요....근데 저 기와집같은 건 뭔가요?"

"아...그건 일본 정부가 기증한 종루에요....절에서 쓰는 거라죠 아마?"

"네........혹시 한국꺼는 없나요?"

"하하...아쉽게도 한국꺼는 없네요....한국가거든 여기 기증하라고 말씀 좀 해주세요..."

"헤헤...그래야겠군요.....참 저기 태극기 배경으로 사진 한 컷만 찍어 주실래요?"

"그럼요....거기 서 보세요....아~ 바람이 불어서 태극기가 좀 휘날리면 좋았을텐데....스마일~"

....

....

"오늘 참 감사했습니다....여러모로..."

"아니에요....참 오늘이 빈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라고 하셨죠?

아무쪼록 빈에서 좋은 추억 많이 만들고 가시길 바랄게요....남은 여행 잘 하시구요"

....

환한 미소와 함께 살며시 손을 내미는 가이드 누나와 아쉬운 작별의 악수를 나누고

후덕한 인도인 노부부와도 인사를 나눴다.

....

내가 UN 본부에 다 와보다니....

오늘 참 색다르고 귀중한 경험을 한 것 같다. 어디가서 이런 경험을 해보겠나....

UN 본부를 쭈욱 둘러보니까....비록 땅덩어리가 크고 힘이 세진 않으나

저 많은 나라들과 당당히 어깨를 같이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참 자랑스럽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긴 하지만 우리나라도 앞으로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세계를 선도 할 수 있는 큰 역할을 해 나갔으면 싶다.

....

..

 

시립공원

UNO-City를 출발해 다시 U-4 Stadtpark에서 내려 지상으로 바로 연결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니까

공원 입구에 화사한 꽃바구니를 한가득 내놓고 있는 작은 꽃집이 보인다.

가을이 한창이건만 봄처럼 화사한 꽃들이 참 보기 좋다.

빈과 꽃....

왠지 둘은 참 잘 어울리는 것 같다.

....

1.90유로짜리 커다란 소시지 샌드위치를 사들고서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점심이 너무 늦어버렸다.....

....

유럽은 어딜가나 이렇게 푸른 공원이 있어서 참 좋은 것 같다.

이렇게 샌드위치를 먹으며 느긋하게 앉아 쉴 수도 있고, 파란 나무들 밑에서 조용히 생각에 잠길 수도 있으니 말이다.

....

벤치에 앉아 소시지 샌드위치를 먹고 있으니까 눈치빠른 까마귀랑 비둘기가 벌써부터 기웃거린다.

재미삼아 샌드위치 조각을 몇 번 던져주니까 동네 비둘기며 까마귀가 다 날아든다.

이러다가 내가 먹을건 하나도 안 남겠네....헐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고 우물우물거리며 이놈들 먹는걸 보니까 까마귀랑 비둘기가 먹는 방법이 참 다르다.

비둘기는 빵 조각을 아주 작게 해서 던져줘야 받아 먹을 수 있다.

한입에 콕 삼킬 수 있는 크기가 아니면 이녀석들은 아예 먹지를 못한다.

반면에....우리의 영특한 까마귀 녀석은 커다란 빵 조각을 던져주면 한쪽 발로 그걸 잡고서 조금씩 뜯어 먹는다.

어떤 놈은 빵을 물에 적셔서 부드럽게 한 다음 먹기도 하고...

우습다....

역시 머리 좋은 놈이 최고라니까...

먹다 남은 샌드위치를 까마귀 녀석들에게 던져주고서 천천히 공원 안을 거닐었다.

귀여운 꼬마애가 어머니랑 같이 물가에서 오리떼랑 노는 모습이 너무 이뻐서

그 모습을 사진으로 담고 싶었지만 모녀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는 것 같아 그냥 물끄러미 쳐다만 봤다.

...

 

터벅 터벅....

...

작은 호수를 따라 걷다가 요한 슈트라우스 동상 앞에 이르자 거기는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사진찍느라 아주 분주하다.

어딜가나 중국인 없는 곳은 없는 것 같다....

 

잠시 그 난리통을 피하려고 호숫가 벤치로 가니까 마침 아침에 케밥 먹다가 만난 한국 아가씨들이 있다.

빈도 참 좁다.....후후

 

서로 빈에 대한 감상을 늘어 놓기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시간은 흘러 빈에서의 마지막 오후는 그렇게 소박하게 흘러갔다.

....

오늘 밤 베니스로 떠난다는 그 아가씨들의 안부를 빌어주고 먼저 일어섰다.

 

이제 '클림트'를 만나러 가야지..

 

벨베데레 궁...

다시 U-bahn을 타고 또 한참을 걸어서 빈 남역까지 왔다.

원래 S-bahn을 타고 와야 되는데 거리가 얼마 안되는 것 같아 무작정 걸었더니 꽤나 멀다....

 

'SchloB Belvedere'

 

남역에서 조금 더 걸어가니까 어스름 하늘 저편으로 단아한 궁전이 보인다.

저기가 바로 '클림트'의 'Kiss'와 'Judith'이 전시된 곳이다.

....

천금같이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갔다.

궁전은 아담한데 왠 정원이 이렇게나 넓은지 모르겠다....

 

'어.....?'

 

상궁으로 막 들어서려는데 분위기가 좀 썰렁하다 싶어 이리저리 살펴봤더니 오늘 전시는 6시까지란다.

'이럴 수가...안돼...'

관람객들이 나오고 직원들이 막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

이런....책에는 목요일에 저녁 9시까지 전시한다고 나와 있는데....

안타까운 마음에 혹시나 해서 문 안을 기웃거려봤더니 직원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손을 내젓는다.

 

'아....이럴 수가...이럴 수가...'

힘들게 여기까지 걸어서 찾아왔는데 그림을 코 앞에 두고서 그냥 돌아가야 한다니 정말 힘이 쭉 빠진다.

이놈의 책 그냥 갖다 버릴까보다....아 정말 너무하네....

.....

다리도 아프고....언짢은 마음을 간신히 추스리며 아쉽지만 발길을 돌렸다.

내가 또 언제 빈에 와서 클림트의 그림을 볼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면 조금 서운하기도 한데,

여행이 늘 뜻대로 되는건 아닌 것 같다. 아쉽지만 남겨두고 가야지뭐.....

 

먼 훗날을 위해서.....

 

빈의 밤거리...

돌아가는 길에는 남역에서 서역까지 가는 트램에 몸을 싣고서 어둠이 내려 앉은 빈의 거리를 스쳐지나갔다.

그르릉거리는 트램의 진동을 느끼면서 바라보는 빈의 거리가 꽤나 아름답다.

....

여행이란 어쩌면 이렇게 트램을 타고 밤 거리를 달리는 것처럼 소박한 일상에서 기쁨을 찾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

서역에서 내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먹을걸 잔뜩 샀다.

마켓에 들러 빵이랑 과자랑 우유도 사고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러 아이스크림도 하나 사 먹었다.

프라하에서부터 이것저것 많이 사 먹었더니 배가 좀 커졌나보다....후후

다행히 빈도 음식 물가가 그렇게 비싼편은 아니다.

....

 

먹을 걸 가득 들고 유스로 돌아와 객실 문을 열려는데 뒤에서 누가 기웃거린다.

"?...."

"안녕~"

"너는...어~ 안녕~"

가만 보니까 내 아래층 침대를 쓰는 아가씨다.

엘리베이터도 같이 타고 왔는데 모자를 푹 눌러 써서 못 알아봤었다.

 

"이름이 뭐니.."

"이안이야....넌?"

"난 재훈이라고 해..."

"제이? 재윤? 뭐라고? "

"에그...그냥 넘어가자...."

......

금발 단발에 뽀얀 피부를 가진 이쁜 오스트리아 아가씨다. 코에 단 피어싱도 특이하고.....후후

이쁘장한 외모와는 달리 하는 행동은 좀 터프한 면이 있다.

단순히 외모나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되지만

'체 게바라 평전'을 읽고 잎 담배를 말아 피우는걸 보면 꽤나 저항정신이 투철한 아가씨인 것 같다....히죽

 

....

내일 아침 일찍 잘츠부르크로 가는 열차를 타려면 일찍 자둬야 한다.

안그래도 오늘 좀 많이 걸었더니 꽤나 피곤하다.....

 

빈 소년 합창단의 노래도 못 들어보고 클림트의 그림도 못 봤지만...

빈은 생각보다 아주 마음에 드는 도시다.

우아한 거리와 아름다운 슈테판 성당이 있고 소박한 공원에서 한가로이 여유를 부릴 수 있는 빈은

다른 도시들에서 느끼지 못한 일상의 편안함을 느끼게 해 줬다.

나 혼자 '제시'가 되어 그렇게 빈의 일상에 흠뻑 취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후....

아무튼 이렇게 또 그럭저럭 빈에서의 마지막 날도 저물어 간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바로 나가야하니까 배낭은 꾸려놓고 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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