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에는 가축화가 가능한 몇 가지 중요한 조건이 설명되어 있다.
일단 교배 조건이 까다롭지 않아야 한다. 즉, 인간이나 다른 동료들이 곁에 있어도 스트레스받지 않고 교배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세대 순환이 빨라야 한다. 빨리 크고 자라 새끼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십년에 한 번 새끼를 낳아서는 곤란하다.
먹이 활동도 까다롭지 않아 먹이 공급이 수월해야 한다. 유칼립투스만 먹는 코알라를 대량으로 가축화할 수는 없다.
분명 현재 가축화에 성공한 소, 말, 돼지, 닭, 개, 고양이 등의 선택받은 동물들은 이 조건을 모두 훌륭히 만족한다.
하지만 단순한 '가축'이 아니라 인간을 따르고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애완 동물'이 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조건이 필요하다.
인간에 대한 공격성이 사라져야 하고, 주인을 기억하고 반응할 수 있는 인지능력이 있어야 한다.
인간이 좋아하는 외모를 가지고, 주인에게 다가와 애정을 표시할 만큼의 적극적인 친밀성도 필요하다.
아마 오늘날 '개'와 '고양이' 정도가 이 단계에 이른 대표적인 예인 것 같다.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은여우'는 구소련에서 모피를 위해 농장에서 대규모로 사육했을 정도니 조건만 갖춰지면 가축화가 가능한 종으로 보인다.
인간이 '애완 길들이기'를 목적으로 '은여우'를 선택적으로 교배한 결과는 의외로 굉장히 빨리 나타나고 고정됐다.
공격성이 덜하고 인간을 잘 따르는 개체만 선택적으로 교배했더니, 불과 10세대 정도만에 '은여우'는 굉장히 사랑스러운 '애완 여우'로 변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은여우'가 길들여지면서 '은여우'의 외모가 유아적으로 바뀌었으며, 성적인 성숙도 흐트러지고 빨라졌다는 것이다.
왜 이런 변화가 나타났는지 생물학적으로 분명하게 설명은 되지 않으나 이는 분명 유의미하게 관찰된 결과이다.
아마 공격성과 친밀성에 관한 유전적 요인이 성적 발달 과정에 관여하는 유전적 요인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키면 애완으로 길들인다는 것은 어쩌면 좀 더 유아적인 개체를 선택하는 압력을 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자, 늑대, 호랑이, 곰 등과 같은 맹수도 새끼들은 대체로 공격성이 덜하고, 인간이 좋아하는 둥글둥글한 외모를 가지며,
주변 개체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친밀하게 대하지 않나.
길들여진다면 야생에서 다른 개체와 먹이를 놓고 공격적으로 경쟁해야 할 필요성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인간에게 친밀하게 다가가는 편이 '애완동물'로서 훨씬 더 이익일 것이다.
여전히 그냥 '은여우'와 길들여진 '은여우'는 같은 종이다.
하지만 이들은 불과 몇 세대만에 '늑대'와 '개'만큼 확연히 다른 존재가 되었다 (사실 개는 회색늑대의 아종이다).
선택적 압력에 따라 혹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생명은 굉장한 유연성을 가진다는 것을 이 책에서 보여준다.
'핀치의 부리 (조너던 와이너 저)'에서는 거의 40여 년 동안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핀치의 몸무게, 부리 크기를 측정하고 세대 간 차이를 연구한 어느 과학자 부부의 놀라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책에서 들려준 이야기 또한 갈라파고스 기후와 먹이 환경의 변화에 따라 정말 핀치 부리의 모양과 크기가 변화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쩌면 생명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게 환경의 변화에 맞춰 변화하는 유연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 이러한 유연성이 오늘날 수많은 생물 '종'이 존재하게 된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