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읽은 얘기/책 BOOK

연구원이 읽어 본 '랩 걸'

제이우드 || 2023. 3. 20. 12:44

나이가 지긋한 원로 과학자의 회고록일까 생각했는데

책을 다 읽고 저자의 프로필을 찾아보니 생각보다 젊다. 

지금은 오슬로 대학에 랩을 가지고 있나 보다. 역시 빌과 함께.

 

출처 오슬로 대학 '호프 자런 랩'

 

랩 사이트에 걸려있는 사진을 보니 주인공 호프 자런 박사는 책에서 상상했던 것처럼 밝고 작지만 강해 보인다.  

빌 아저씨는 뭔가 깡마른 체형에 긴 얼굴과 헝클어진 장발을 한 사람이라 상상했는데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다.

살면서 이들처럼 좋은 친구, 뜻이 잘 맞는 동료를 만난다는 건 서로에게 큰 버팀목이 된다.

과학자라는 특수한 업계에서도 자런 박사와 빌의 관계는 연구 책임자와 실무 스텝의 관계,

단순히 보면 흔한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이며, 갑과 을. 다소 불편한 관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춘을 함께 보내고,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오랜 친구이자 동료로 

자런 박사와 빌의 인연이 현재까지 지속된다는 건 두 사람 모두에게 크나큰 행운이라 본다.

본인의 인건비를 지극히 걱정해주는 자런 박사 같은 연구 책임자를 만나는 것도 행운이고,

자기 뜻을 잘 헤아려주는 빌같은 든든한 실무자가 있다는 것도 행운이다.

아마 실제 이 둘과 같이 특수한 PI와 스텝의 관계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솔직히 책을 절반정도 읽었을때는 자런 박사와 빌의 연애 이야기가 나오지나 않을까 생각도 했지만

지금의 두 사람과 같은 관계는 충분히 멋진 우정인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출처 오슬로 대학 '호프 자런 랩'

 

밤낮으로 랩에서 살다시피하며 졸업 논문을 쓰고, 창고에서 오래된 실험기기를 뒤져가며 랩을 차리는 자런 박사와

돈이 없어 랩 구석에서, 때로는 낡은 밴에서 노숙생활도 하며 기인처럼 살아간 빌의 생활은 

아마 연구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학위과정 중 자기 주변 풋내기 조교수나 

어느 랩에 전설처럼 있음직한 선배들의 찌든 모습을 떠올리기도 했을 수도 있다.

한국의 현실과 직접 비교하기는 여러 여건이 다르긴 하지만 

처음 자기의 연구실을 만들며 성장해 가는 현실 과학자의 단상을 그래도 잘 그려낸 듯하다.

한편으로 미국처럼 과학자에게 기회가 많이 주어지는 나라에서 

이들의 성장기는 열정 가득한 지난날의 유쾌한 모험담처럼 읽히기도 한다.

 

나는 이들이 과학자라 특별하게 더 고생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계에서 늘 대두되는 학회의 폐쇄성, 발목을 잡는 연구비, 동료 과학자들과의 경쟁, 성과에 대한 평가는 

과학이라는 틀만 바꾸면 우리의 모든 분야에 적용되는 사회초년생들의 어려움으로 치환될 수 있다.

자기 분야의 권위에 맞서야 하는 어려움, 금전적인 문제, 주변의 평가, 사람들 간의 대립.

무슨 일을 하던 우리가 살면서 맞이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보편적인 어려움이라 본다. 

그래서 저자의 책은 과학에 대한 특별한 동경이나 과학자의 고된 역경을 이야기했다기보다는

자기 인생을 사랑하고, 고마워하며, 진정성을 가지고 열성적으로 살아온 한 사람의 담담한 이야기인 것 같다.

 

저자의 글은 본인이 연구하는 나무를 보는 것처럼 굉장히 온화하고 촉촉하다. 

식물학자 특유의 부드럽고 섬세한 감성을 글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특히 사막의 부활초 이야기에 이은 '광기'에 대한 부분은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어둡고, 진지한 부분이라 기억에 남는다.

마치 문학책을 읽는 것 같기도 하고, 교양 과학서를 읽는 것 같기도 해 차분히 읽히는 책이다.

 

 
랩 걸
『랩걸』은 씨앗이 자라 나무가 되듯이 삶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고난을 헤치고 큰 나무 같은 어엿한 과학자가 된 호프 자런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과학자를 꿈꾸던 소녀가 여러 번의 시행착오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닥친 사회의 높은 벽을 겪으면서도 자연과 과학을 향한 사랑과 동료에 대한 믿음으로 연구자의 길을 걸어 한 명의 과학자가 되기까지 과정을 고스란히 담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의 이야기와 자신이 아는 이야기를 전하는데 집중한다. 떡갈나무에게는 떡갈나무의 방법이 있고, 칡과 쇠뜨기에게 그들만의 삶이 있다고 다정다감하게 전한다. 또 자신의 아픈 이야기마저 솔직히 털어 놓는다. 조울증과 출산으로 인해 실험실에서 쫓겨났을 때의 절망, 그럼에도 다시 실험실로 향하는 것은 자신이 꼭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과 동료와의 신뢰, 아이와의 교감이다. 이 책에 담긴 그녀의 진솔한 자기 성찰과 따스한 시선을 통해 삶과 과학 그리고 식물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저자
호프 자런
출판
알마
출판일
2017.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