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한 일요일 아침에 평일보다 무려 1시간이나 일찍 일어난다는 것은 참으로 곤혼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천근 같은 잠의 기운을 뿌리치고 세면대로 걸어가지만, 거울 속 부시시한 내 모습이 또렷해 지는 데는 한참이 걸린다.
온 기숙사가 아직 깊은 잠의 수렁에 빠져있는 와중에 나 혼자 꼬물꼬물 움직이는 이 상황이,
마치 좀비 세상에 살아남은 마지막 인간 생존자가 된 것만 같다.
아직 단풍은 덜 들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가을이 깊어지면 산행을 해야 할 것 같은 일종의 강한 의무감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고 철철이 산을 찾는 편은 아니지만, 색색이 변해가는 나뭇잎과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
겨울이 오면 사라질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지난 일년의 그리움이 사무치게 밀려온다.
아무튼....좀 서정적으로 생각하면 그렇다는 것이고~
단순히 말하자면 그냥 실험실에 틀어 박혀 있는게 답답한게지....
유지태랑 김지수가 주연한 '가을로'라는 영화를 보면
민주를 떠나보내고 현우 혼자 그녀의 지난 발자국을 쫓아 여기 내연산을 찾는 장면이 나온다.
화면 한 가득 화사한 단풍과 행복해하는 사람들 속에서 혼자 쓸쓸해하던 현우의 모습이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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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내려서니 가을은 가을인지라
등산로 입구서부터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이 계곡 깊숙히 꾸역꾸역 밀려 들어간다.
점심 때 까먹으려고 산 김밥이 행여 사람들에게 치여 배낭 안에서 부서지지나 않을까 싶을 정도로
좁은 등산로를 따라 줄줄이 줄줄이 사람들이 개미 행렬처럼 걸어간다.
작년에 주왕산도 그랬지만 동해안 쪽의 산들은 계곡이 참 아기자기하니 멋진 것 같다.
계곡의 바위도 근사하고 내륙쪽 산보다 떨어지는 폭포수도 제법 볼 만 하고....
동해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바위가 닳고 흙이 다 날아가버렸을지도 모르지.
내연산은 계곡을 따라 늘어선 12폭포가 유명한데, 근래 비가 많이 안 와서인지 물줄기가 생각보다 굵진 않다.
굳이 폭포를 구경하고 싶으면 겨울보다는 여름이 더 좋을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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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구름다리.
내연산 12폭포 중 제일 마지막 폭포에 걸려있다.
다들 이 다리 밑에서 사진 찍으러 오는 것 마냥 여기저기 다들 똑같은 배경에 엇비슷한 포즈로 기념촬영이 한창이다.
기념촬영에 여념없는 '관광객'들을 뒤로하고 자칭 '등산객'으로 자부하는 우리는
반듯한 바위 위에 앉아 준비해간 김밥을 까먹고, 가져간 포도도 따 먹고 다시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원래는 정상에서 정복감에 도취된 상태로 김밥을 시식할 예정이었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되어 일단 배 안에다 저장한채 몸을 움직였다.
하....배낭에 있던 무게나 내 뱃속으로 들어간 무게나 똑 같을진데 왜이리 배가 부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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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를 지나서도 내연산 계곡은 한참이나 더 깊숙히 뻗어 있다.
생각했던 것 보다 계곡이 훨씬 더 길다. 한 10km 정도 되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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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을 한참 거슬러 올라갔는데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가 생각보다 뚜렷하지가 않아 중간 중간 헤매다보니 어느덧 해가 많이 기울었다.
벌써 3시가 다 되어 가는데 아까부터 산등성이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아무래도......길을 잃었나?
그래.
어처구니가 없게도 우린 길을 잃고야 말았다. 하하하
어의 없어.....정말 어의 없어.....하하하하
허탈함에 젖어 졸졸 흐르는 계곡물 옆에 앉아 가져간 식량들로 아쉬움을 달랬다.
꿀맛같은 주말 늦잠을 마다하고 오랜만에 무거운 발걸음을 하였건만 이건 끝이 너무 허무한데....쩝
정상 정복을 호언장담 했건만 중도하산이 왠 말인고....흐흐
물속에서 꼬물꼬물 헤엄치는 송사리 떼의 앙증맞은 모습이 위로가 되려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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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는 길에 다시 들른 보경사.
사찰의 고즈넉한 가을 분위기를 느끼기엔 등산객들이 너무 많지만
경내에 서 있는 커다란 감나무에 발간 홍시가 매달려 있는 모습이 여지없는 가을 풍광이다.
마치 오래된 석탑과 그윽한 향내 모두 이 가을에 잘 맞는 패션 아이템인것 같고,
그래서 이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가을과 더 잘 어울려 보인다.
가을...
다른 사람들은 가을에 주로 뭘 볼까?
가을이니까 보이는 것들, 가을이라 봐야하는 것들.
물론 가을이라 봐야할 것들도 있겠지만, 가을이니까 보이는 작고 소소한 것들을 그냥 지나치는 것도 조심해야지.
잘못하면 그냥 지나치는 그 안에 가을이라 봐야할 것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안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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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연산 정복은 다음으로 미뤄야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물러서기엔 너무 아쉬워 우리의 배를 좀 더 기쁘게 해주기로 했다.
포항으로 나오는 버스도 기다릴 겸 식당에서 솔솔 풍겨오는 음식향에 이끌려 목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도토리묵에 호박전에 동동주 한 잔씩~~!!!
개인적으로 호박전에 호박이 많이 들어가 아주 만족스러웠다. 흐흐
못 다 이룬 정상의 꿈은 달콤한 호박전과 함께 동동주에 사르르 녹아 버렸다.
산행은 매력은 정상정복보다 이 호박전이 아닐까......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