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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산 [2007.10.27 - 28]

제이우드 || 2023. 6. 3. 15:40

[07.10.27]

지도를 펴 놓고 보면 포항에서 주왕산까지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닌데, 청송까지 바로가는 버스가 없어서 그런지 교통편이 마땅치 않다.

대구를 거쳐서 가는게 보통이지만, 포항에서 안동가는 중간 길에 있는 진보에서 버스를 갈아타고도 주왕산까지 갈 수 있다고 한다.

무슨 바람이 들어서인지 게으른 대학원생 셋이 황금같은 주말도 반납하고 고생하러 먼길을 떠난다.

셋이 다같이 어디 가기 참 힘들었는데, 정말 일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귀한 발걸음들을 하고 계신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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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발걸음을 하면 뭐하나, 다들 대학원생 아닐까봐 축 늘어져 자 버리니.

이래가지고서야 내일 산이나 제대로 올라 갈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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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풍경들과 달리 사람이 가득 들어찬 버스는 왠지 갑갑하다. 버스 안은 벌써 겉옷이 부담스러운 온도로 꽉 차있다.

쭉 뻗은 해안 도로를 지나 구불 구불 산길로 접어드니 속이 영 매스꺼운게 썩 유쾌하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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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두어시간을 더 달려 참으로 시골스러운 정류장에 우리를 내려 놓았다.

고추 빻고, 떡 빼는 방앗간이 있고 아주 오래전 내가 꼬마였던 시절 외가집에 갈때 들렀던 그런 곳이다.

 

퉁명스런 매표소 아줌마만 빼면 왠지 공기까지 정겨운 시골 정류장.

까무잡잡한 피부의 아이들과 꼬부랑 할머니가 있는 이런 시골 풍경은 사람을 긴장에서 풀어주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냥 뭐랄까, 내가 경계할 필요가 없는 이들이기 때문에 일상의 세세한 경계심마저 무장해제시켜 버린다.

도시의 거리를 걸을 때는 결코 느낄 수 없는 편안함, 그래서 사람들은 시골에서 위안을 찾는 걸까.

시간이 갈수록 나 또한 그런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

 

 

진보에서 주왕산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아주 작은 마을들을 지나 호젓한 시골길을 달린다.

어두워지는 햇살을 받아 들녘에 추수하고 남은 볏단의 둥글둥글한 그림자가 길 게 늘어져 있는걸 보니 시간의 긴 흐름이 정지된 느낌이다.

 

산을 보니 아직 단풍이 절정에 이른 것 같진 않지만, 내일은 오늘보다 단풍이 거짓말처럼 더 진하게 물들어 있을거라 엉뚱하게 기대해본다.

청송 사과축제에 잠깐 들렀다가 주왕산 입구까지 터벅터벅 걷는 길이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아....어서 빨리 뜨끈뜨끈한 민박집 방바닥에서 뒹굴어야겠다.

 

 

 

[07.10.28]

 

 

아침부터 전국에서 몰려든 풍락객들로 등산로가 벌써 북적거린다.

아직 늦가을이긴 하지만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날씨가 꽤나 쌀쌀한데 뜨끈한 된장찌개를 먹고나니 몸이 한 결 풀리는 것 같다.

 

오늘 우리의 목표는 내원동을 지나 가메봉을 거쳐 절골로 내려오는 코스. 주산지까지 가 볼 생각이다.

주왕산이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니지만 초행이라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그냥 무대뽀로 가 보는 거다.

 

 

 

 

 

중국 당나라때 주왕이라는 자가 반역을 일으켰다 실패하여 신라까지 넘어와 숨어든 곳이라 하여 '주왕산'이 됐다는데,

우리나라에 흔치 않은 돌산이라 산세가 사뭇 중국풍인 것 같기도 하다.

아침 안개에 뿌옇게 흐린 하늘 저 멀리 우뚝 솟은 봉우리에서부터 동이 터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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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기를 가득 머금은 투명한 계곡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양 옆으로 노랗고 불그스름한 단풍들이 굽이굽이 속살을 들어낸다.

마치 수놓인 융단 커튼을 하나하나 걷어내며 걷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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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기암괴석이 눈앞에 떡 하니 버티고 서 있으니 중국 황산이나 태산도 여기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가 내원동으로 가는 길에 있는 제1폭포 앞이다.

 

 

 

 

 

터벅터벅 산길을 걷는건 기분 좋은 일이지.

언제나 흙을 밟는 그 촉감이 좋기 때문에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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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상하지만 그래도 또 다같이 포즈.

이 녀석들하고만 찍은 사진이 벌써 몇 년째 한 가득이다. 이런....

 

 

 

 

 

가을에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폭포 물줄기가 제법 드세다.

여름에 여기와서 수박 깨먹고 놀면 정말 시원할거 같네....

 

 

 

 

 

대자연의 깨끗함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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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를 지나 내원동까지는 완만한 평지가 이어져 가볍게 산책하듯 걸어갈 수 있다.

해가 조금 높아지니 안개도 다 걷히고 바람도 한결 온기를 머금었지만, 아직까지 시원한 공기가 카메라를 쥔 손 끝을 시리게 한다.

지도에 표시된 거리만큼 제법 걸어온 듯 한데, 도대체 산을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슬슬 걱정이되기 시작한다.

이러다가 급경사를 올라갈 것 같단 말이지....

 

 

 

 

 

주왕산 내원동은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오지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몇 분이 농작물을 돌보러 거주를 하는 것 같다.

'내원분교'라고 적힌 간판이 있는걸 보면 한때는 이 골짜기에도 아이들이 제법 살았던 모양인데,

이런 산골짜기에 있는 작은 분교에서 공부를 하면 어떤 기분일까? 선생님과 아이들은 외롭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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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끼어린 얼굴의 나무 장승들이 지금은 폐교가된 내원분교를 조금은 쓸쓸하게 지키고 있다.

한때는 삐걱거리는 풍금소리와 어린애들의 웃음이 흘러나왔던 그 앞에 서서.....

 

우리가 좀 크고 난 후에 우리가 어릴 때 다녔던 학교에 다시 가 보면 운동장은 왜그리 작고, 교실 책걸상은 왜그리 아담한지 한번쯤 놀라게 된다.

내가 걷던 그 복도를 천천히 걸어보고 내가 만졌던 철봉대에 다시 손을 얹어보고.....

언젠가 여기서 공부한 어린 학생이 머리가 큰 어른이 되어 다시 여길 찾는다면 얼마나 많은 상념에 잠기게 될까.

 

시간은 그런 것이다.

.....

 

 

 

 

 

 

이게 갈대인지 억새인지.......

 

 

 

 

 

내원동은 주왕산이 품고 있는 아담한 분지와 같은 곳이다.

덕분에 여기까지는 편안하게 걸어올 수 있었는데, 산밑에 접어드니 아니나 다를까 경사가 예사롭지 않다.

어쩐지 그렇게 걸어왔는데도 경사하나 없이 완만하더라니....

 

여기서부터 대학원생들의 고질적인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줌마, 아저씨들이 슬금슬금 우리를 앞질러 올라가고, 우리 모두 숨이 턱까지 차서는 한 발 한 발 천근보다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 놓았다.

산이 그렇게 높은 건 아닌데, 산길로 100m, 200m 올라가는게 왜이리 힘든지 목에 건 카메라 가방을 던져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멀다.

멀다.....

 

얼마나 더 올라가야 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헐떡거리는 숨을 가라 앉히고 정상에 선 순간이 있기에 우리는 산에 오르는 것이다.

계곡을 따라 단풍이 흘러내리는 모습은 정말 노력하지 않은 자는 볼 수 없는 멋진 경관이다.

 

"주왕산 단풍이 절경이라하더니 왜 그러한지 이제야 알겠구나~"

옛 선비가 올랐더라면 시 한 수쯤은 거뜬히 읊조릴 만한 풍광이 이런게 아닐까 싶다.

 

 

 

 

 

여기는 주왕산 가메봉 정상.

 

 

 

 

 

.......

아~ 배고프다.

 

 

 

 

 

대자연을 배경으로 하지 않은 기념촬영 한 컷.

 

 

 

 

 

오랜만에 산 위에 올라 저기 지평선 끝까지 겹겹이 뻗어 있는 능선들을 보니 장쾌한 느낌이 벅차오른다.

파도치는 수평선을 바라볼 때의 그 공허함이 아니라, 세상을 정복한 군주가 자신의 광활한 영토를 바라볼 때의 그 뿌듯함 같은 거 말이다.

무언가 꽉 막혀있고 답답할 때 바다를 찾듯이,

새로운 무언가를 강하게 추구할 때 산에 올라 세상을 한 번 내려다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 하다.

그러면 왠지 모를 자신감과 성취감에 충만해져 돌아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절골로 내려오는 길도 쉽지만은 않다.

계곡길이만 10km에 달해 다리도 풀리고 발바닥이 다 얼얼할 지경이다.

 

그래도 계곡을 따라 정말 수채화 같은 풍경이 펼쳐져 눈이 심심하지는 않다.

계곡물에 비친 단풍색과 지는 햇살을 머금은 황금빛 단풍색을 보고도 감탄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의 아름다움 중 5% 정도는 잃어 버린 거나 마찬가지다.

 

 

 

 

 

단풍 속에 묻혀 산행을 나온 사람들마져 풍경 속에 스며들어가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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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골을 완전히 빠져 나오는데만 두어시간은 걸린 것 같다.

이미 다리는 천근만근이고, 배는 고프고 몰골들이 말이 아니다.

절골 옆이 유명한 '주산지'이지만 더 이상 다들 걷고 싶은 심정은 아닌 것 같아 아쉬움을 남겨두고 돌아가기로 했는데,

단풍구경하러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 통에 온 길이 주차장이된 통에 버스를 타려면 면소재지까지 좀 더 걸어가야할 것 같다.

 

마침 마을 사람들이 길에서 사과를 파는데, 오천원이면 커다란 비닐 봉지 한가득 사과를 담아 준다.

아삭아삭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입 안 가득 사과향이 퍼지는 이 행복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 이 맛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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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락객들 차가 너무 많아 청송가는 버스는 들어오지 않는단다.

별 수 없이 갈 때는 영주 쪽으로 가야 될 듯 싶다.

 

덕분에 차 시간도 남고 해서 맥주 한 캔씩 손에 쥐고 마을 실개천이 보이는 나지막한 정자에 앉아 쉰다.

 

몸은 고단하지만 기분은 참 달콤하다.

요 시원한 맥주 때문인지, 코끝 땀을 식혀주는 선선한 바람때문인지.....

 

 

 

 

 

청송군 부동면이라는 생전 처음 와 보는 동네 실개천에 앉아, 나른하게 지는 해를 바라보며 맥주를 홀짝이는 이 여유 이외에 내게 필요한건 없다.

딱 지금 이 순간.....

 

내 눈 앞에 흐르는 개천과 거기 비친 가로수 세 그루, 시원한 공기, 내 손에 쥔 맥주 한 캔, 친구들.

이거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