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 7:30
아침에 일어나니까 절반이 벌써 떠나고 자리가 횡했다. 새벽부터 부시럭거리던 사람들이 이미 떠난 모양이었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더군다나 구름에 둘러쌓여서 아침을 맞이하는 기분은 정말 시원했다.
뺨을 때리는 작은 물방울들하며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소리... 그리고 어제부터 어디선가 향긋한 향기가 날아오는데
풀향기며 나무향기 꽃향기가 섞인 향긋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불어오는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서 한 며칠 푹 쉬다가 갔으면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정상이니 서둘러 움직였다.
a.m. 9:00
이 날은 정상까지 내가 큰 배낭을 짊어졌다. 먹을 게 좀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내게는 역경의 무게였다.
처음 40분 동안은 정말 죽을 맛이었는데, 계속 걷다보니까 요령도 생기고 능선이라 크게 경사도 없어서 견딜만 했으나..
아무튼 어깨를 짓누르는 그 무게는 정말 고난과 역경의 무게였다. 확 그냥 집어 던지고 싶었으니까....후훗
다리는 후들거려 죽을 맛이었지만 구름속을 걷는 그 느낌은 제법 괜찮았다.
구름이 껴서 멀리 보이는 풍경은 없었지만 뿌옇게 구름이 숲을 감싸도는 모습이 꽤나 운치있었다.
어디가서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을라고...돈 주고 흔히 할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니까...
a.m. 11:00
능선을 타고 촛대봉 연하봉을 지나 장터목 산장에 이르렀다.
여기가 천왕봉을 오르는 전초기지격으로 이곳도 최근에 지은 듯 시설이 꽤 좋고 깨끗해 보였는데,
멋있는 산장 바로 뒤로 잔인한 경사가 버티고 있어 맥을 탁 풀어 놓는 곳이었다.
아마도 이제 힘들테니 마지막으로 쉬었다 가라고 여기에 산장을 만들지 않았을까?
여기서부터 천왕봉까지 평균 1시간 2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배낭을 짊어지고 장터목 산장 뒤의 가파른 경사를 오르자 숨이 턱에 찰 무렵 넓은 고사목 지대가 나타났다.
갑자기 산 정상에 훤하게 개방된 곳이 나타나니까 일단 기분은 시원하니 좋았는데,
한 때는 낮에도 햇빛이 스며들지 않을 정도로 빽빽한 산림지대였지만 사람들이 불을 놓아 파괴된 곳이란다.
내막을 알고 나니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지만, 하얗게 죽어 버린 고사목들이 제석봉 전체에 퍼져있는 모습은 사뭇 특이했다.
무심코 발 아래를 쳐다봤는데 뭔가 꿈틀거리는게 있길래 자세히 봤더니...
바로 민달팽이...
조금 징그럽게 생긴 이 녀석은 민달팽이 치고는 꽤 커다란 녀석이었다.
처음에는 누가 먹다 버린 소세지인줄 알았으니까....^^
'통천문'도 지나고 이제 천왕봉의 주 경사로에 접어들었다.
울퉁불퉁 바위 경사가 60도 정도 되려나? 뭐 내가 느끼기에는 그 정도로 가파른 경사였다.
우리랑 같이 산장에서 하루를 보낸 사람들이 벌써 정상에서 내려오며 '수고하세요'하고 격려해주니까 힘이 나긴 났지만
10걸음 올라가고 쉬고 10걸음 올라가다 쉬고...정말 짊어진 배낭을 아래로 굴려 버리고 싶었다.^^
내 쉬는 숨소리와 쿵쾅거리는 심장고동, 한발 한발 올라가는 내 발걸음만이 있다.
그것뿐이다. 아무런 생각이 없는 무념무상의 상태처럼 그렇게 올라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런 순간을 원했었다. 정상에 선 모습이 아니고 이렇게 온 힘을 짜내 오르는 모습을 원했었다.
나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 버리는 그 어떤 것이 필요했는데,
태풍이 와서 더러운 바다를 아래 위로 확 뒤엎는 것 처럼 이렇게 해서 내 속의 무엇을 확 뒤짚고 싶었다.
.......
p.m. 12:00
저기 천왕봉 비석이 보였다.
5년 만에 다시 왔다. 그땐 고3 지금은 24살...
나에겐 지난 5년간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는데, 이 곳은 별로 변한게 없었다. 아니 모든게 그대로인 것만 같았다.
5년 전 그때는 내가 이런저런 일을 겪을지 상상이나 했었을까?...그 많은 일들을 말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5년인데 그 사이에 나는 너무 변해 버린 것 같아서 마음 한 구석이 조금 씁쓸해졌다.
앞으로 5년 안에 난 또 어떻게 변하게 되고 무슨 일을 겪게 될까?
대답은 역시 '모르겠다'이다.
...
구름이 껴서 저 아래 경치를 보지 못한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우리의 욕구를 보상받기에는 충분한 감동을 받았다.
우리에게 이곳은 에베레스트 정상보다도 높은 곳이었으니 말이다.
호석군의 태극기를 들고 감격의 기념샷도 날리고, 기념 통화도 몇통 해주고
환식 : 어디고?
나 : 천왕봉이다..
환식 : 므라고?
나 : 천왕봉 왔다고..
환식 : 거짓말 하지마라 느 집 뒷산 아이가?
나 : ㅡ..ㅡ;
천왕봉에서의 감격을 가슴에 담고 중산리로 하산길에 접어 들었다.
아쉬움에 두어번 뒤돌아서 천왕봉이라고 새겨진 비석을 바라보면서..
p.m. 2:00
천왕봉에서 법계사까지 내려오는 길은 악명높은 경사로이다. 내려가는 데만 1시간 20분 정도 걸린다.
온통 바위라 발바닥도 아프고 내려가자니 다리가 풀려서 후들후들 거리고 아무튼 내려가는 길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아마 이길로 올라왔으면 완전히 주저 앉았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산행에서 느끼는 또 다른 쾌감은 역시 내려오면서 끙끙거리며 올라오는 사람들을 보고 느긋히 웃어주는 일이다.
'얼마나 남았는겨?','많이 가야되나요?'하고 묻는 사람들에게 '조금만 가면 됩니다...씨익'하고 대답하는 기분은
가진자의 여유랄까, 아는자의 오만함이랄까 아무튼 선험자의 호기라서 대답할 때면 은근히 웃음이 났다.
원래 산은 내려올 때 그 기분 때문에 간다고 하니........^^
법계사 밑 로터리 산장에서 마지막으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
사람됨됨이는 같이 여행을 가보면 안다고...식사준비할 때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
호석군은 물 받아서 라면 끓이고 코펠 헹구고
나는 띵가띵가 사진이나 찍고.....
류군은 사람됨됨이가 참 반듯한게 여행가면 사랑받는 타입이고
나는.....천상 혼자 돌아다녀야할 팔자고......후후
아무튼 처음부터 끝까지 류군 참 고생 많이했다. 너무 고생만 시켜서 다음부터 나랑 안 놀지 걱정이지만....^^
어디선가 다람쥐가 쪼르르 달려나와서 포즈를 취하길래 몇 컷 찍어 줬다.
오랜만에 보는 다람쥐....
녹차 한잔으로 여유를 부린뒤 계곡물에 피곤한 발도 담그면서 그렇게 우리의 하산길을 마무리해 갔다.
계곡물은 아직 너무 시려서 발을 30초도 담그기 힘들 정도였지만 피곤한 발을 잠시 쉬기에는 이 만한 것도 없었다.
마침 '여기서 발담그고 가세요~' 하듯이 물이 잔잔한곳이 있어서 잠시 휴식....
p.m. 5:30
조금 늑장을 부려서 그런지 하산하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산이 워낙 크기도 하고 발바닥도 아프고 이제 온 몸이 천근만근이니 한 발 한 발 떼어 놓기가 힘들었다.
뭔가 속을 확 뒤집고 싶었는데 상당히 효과가 좋은 것 같다.
답답함도 짜증스러움도 많이 버리고 오는 것 같다.
대신에 그것 보다 훨씬 더 좋은 걸 많이 담아오는 기분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내려올 산을 왜 그리 자꾸 올라가?'
나에게 한 가지 대답이 떠올랐다.
'언제나 그대로인 그곳에서 변한 내 모습을 비교하려고 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