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 외출
준비물 세가지
다이어리....
MP3 플레이어....
천경자 수필모음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
...
저녁 10시......이미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 청량리역으로 향한다.
갑작스럽다...
나 자신도 놀랄만큼 갑작스럽게 마음을 먹었다.
뭔가가 내 의지를 집어 삼킨 듯 그냥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그냥 이렇게 여름이 가는게 아쉽기도 하고
길고 길었던 방학이 끝나가도록 변변한 바다구경도 못한게 안타깝기도 했지만...
이렇게 꼭 바다로 가야한다는 의무감은 없었는데 이상하게 난 바다로 향하고 있다.
...
오늘 아침에 눈을 떴더니 한동안 흐렸던 하늘이 너무 맑은 푸른색을 띄고 있었다.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자니 불현 듯 푸른 하늘이 내 눈앞에서 푸른 바다로 변해버렸다.
하늘을 생각하면 바다가 떠오르는건 또 뭐란 말인가.....
...
11시 출발 강릉행 열차표를 끊고 열차에 올라선다.
금요일 저녁을 맞아 마지막 휴가를 떠나려는 사람들이 한 가득이다.
원래 강릉행 밤기차가 연인들을 위한 기차라지만 이거 원....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나 데리고 올 걸....풋
밤기차의 낭만.....로망.....그래 좋은 거지....
...
천천히 기차가 미끄러지고
나는 이어폰을 꽂고 볼륨을 높인다.
Buzz.....'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왠지 가사 내용이 내 마음을 대신 말해주는 듯....
저 푸른 바다 끝까지
말을 달리면 소금 같은 별이 떠있고
사막엔 낙타만이 가는길 무수한 사람
길이 되어 열어줄거야
낡은 하모니카 손에 익은 기타
Your melody
어린왕자 Your melody
찾아 떠날래~~~
Far away
U're my sunshine
we were together
나는 사랑보다 좋은 추억 알게 될거야
텀블러 한잔에 널 털어 넘기고
이제 나를 좀 더 사랑할거야~~
....
....
"자는 척 하지 말고 우리모두 맥~주~, 아~ 맛있겠다 맥주~"
객실에서 카트를 미는 역무원아저씨의 재미있는 농담에 살짝 웃어주고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온 천경자의 수필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을 펼쳐든다.
화가이자 작가 천경자.....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고 이 사람이 쓴 글도 한 번 읽어 보고 싶었다.
...
오늘 밤은 이 책 한권이랑 MP3 플레이어와 친해질 필요가 있다.
내일 새벽까지 여기 앉아 있으려면 무척 심심할테니....
아주 기나긴 밤이 될거다.
.........
.......
.....
[05.08.28]
역시나 새벽에 기차로 움직인다는건 힘겨운 체력싸움을 의미한다.
좁은 의자에 불편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보면 겨우 든 잠도 깜빡깜빡 깨기 마련이다.
이거 불편해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내가 제일 싫어하는게 잠 못자는건데, 자야할 때 못자고 있으면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제천...영월...증산......이제 태백까지 왔다.
태백도 참 오랜만이다. 3년 전에 왔었지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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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속을 달리다가 반딧불처럼 빛나는 나트륨등을 보니 참 예쁘다.
아무것도 아닌 가로등 불빛도 한데 모여서 점점이 반짝이니까 아주 그럴 듯하다.
왠지 까만 바다에 집어등을 밝히고 떠있는 어선들 같다.
......
그나 저나....
참 멀다....
평소같으면 곤히 잠들어 있을 시간에 난 왜 이렇게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거지?
뭣땜에....푸허헐
태백산맥을 지나 기차가 동해안으로 다가가자 벌써 어스름 하늘이 밝아 오기 시작한다.
정동진
드디어 도착...
기나긴 밤을 달려 진짜 오고야 말았다.
밤새 달려온 기차는 플랫폼에 사람들을 한가득 토해내고 사람들은 일제히 바다를 향해 환호성을 지른다.
서늘한 새벽 아침 공기가 폐속 깊숙히 스며드는게 느껴진다.
열차에서 내리면 정말 거짓말처럼 눈앞에 온통 바다가 펼쳐진다.
세상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기차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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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색깔을 무슨색이라고 해야할지....
해가 뜰 때도 하늘이 저렇게 붉게 노을지는 모습은 처음본다.
물감으로 저 색깔을 만들려면 무슨색들을 섞어야 할지 참 난감할 것 같다.
주황색에 흰색 조금.....자주색과 분홍색, 빨간색을 잘 섞으면 저런 색이 나올까....
참 많은 하늘을 봤지만 오늘 하늘색은 정말 이쁘다.
적당히 흩어진 구름에 화사하게 빛나는 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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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포함해서 오늘 여길 찾은 사람들은 정말 운이 좋은 사람들인 것 같다.
이렇게 멋진 하늘을 보기란 쉽지 않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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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가 도착했을 때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해변에 서서 그리고 플랫폼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나처럼 떠나는 여름이 안타까워 찾아 왔을까..
마침 계단에 나란히 앉아 있는 여학생 네 명의 뒷모습이 귀여워서 살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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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특히 동해바다는 언제봐도 질리지 않는다.
저 넓은 수평선....
드디어 해가 살째기 얼굴을 내민다.
참 오랜만에 보는 일출.....
일출을 보면 비로소 우리가 여기 이 움직이는 지구 위에 살아있다는걸 실감하게 된다.
여기 이렇게 '내'가 있다는 존재의 의미를 증명해 주는 것처럼 말이다.
연인은 서로 포근하고...
친구는 서로 다정하고...
혼자는 가슴 벅차다......
하얀 파도의 거품 위로 노랗게 물든 하늘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다....
표현이 적절한 건가?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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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바다도 바다지만
하늘이 너무 아름다운 날이다.
저 맑은 하늘이며 환상적인 색감의 구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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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하는 말이지만 낭만이라는 건 제3자의 시각이다.
어떤 주체보다는 그 주체를 바라보는 객체의 느낌 말이다.
맨발로 모래사장에 발자국을 찍는 한 여인의 뒷모습도 살짝....
글쎄....모르는 사람들의 사진만 찍어주는 것 같아 조금 아쉽기도 하지만
원래 사진이란 그 사람이 모를 때 찍어야 제일 자연스럽고 잘 나오는 것 같다...
이 다음에 나도 한 사람의 사진을 원없이 찍어 줄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그때도 아마 사진을 아무말 없이 몰래 몰래 찍어 줄 것 같다.
지금 이렇게 좋은 풍경속에 내 전속 모델이 되어줄 누군가가 없다는게 좀 아쉽기는 하다.
캬.....풍경이 아깝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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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와 놀다가 모래를 털어내는 두 친구도 옆에서 살짝 한 컷....
이건 의도한 사진은 아닌데 꽤 분위기 있게 잘 나온 것 같다.
저녁 느낌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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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여행한다는건 많은 변수가 있는 것 같다.
얽매이지 않아서 좋기는 한데 때로는 누군가와 얘기하고 싶어도 말 할 상대가 없어 심심할 때도 있다.
늘 '셀린느'를 만날 기대를 조금은 갖고 있지만 막상 기회가 주어져도 선뜻 말 붙이기가 어려운 것 같다.
혼자 여행한다는 건 나름대로의 대담성과 긴 침묵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누군가가 옆에 있어주는 것과 아무도 없는 빈 공간만 있다는 건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니 말이다.
하지만 조금의 낯짝과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뜻밖의 즐거움도 많이 만들 수 있는게 혼자하는 여행의 즐거움이 아닐런지...
나에겐 그 '조금의 낯짝'이 부족하다.....후후
이렇게 바다가 바라보이는 벤치가 있다는건 참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풍경이 좋은 벤치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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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잔칫집에 먹을거 없다'는 말도 있지만 정동진은 생각보다 아주 근사한 곳이다.
물론 개발이 안 된 옛날 모습이 더 좋았다는 말에는 공감하지만 아직까지는 충분히 멋있는 장소임이 분명하다.
밤새 불편한 의자에서 뒤척이며 고생한 보람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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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경포대 바다도 한 번 가보고 싶은 마음에 강릉으로 향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에 왔었으니까 보자....후아 7년 전에 일이다.....
그때 경포대의 그 투명한 옥빛 물색깔을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넓은 모래사장도 처음 봤었고.....
동해바다를 그렇게 가까이 본 적도 그때가 처음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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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에서 강릉까지는 20분 정도....
강릉까지 가는 철도는 동해바다를 옆에 끼고 뻗어 있다.
바다를 옆에 끼고 달려가는 열차...
우리나라에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철도 노선중의 하나가 이곳이지 싶다.
강릉 경포대와의 짧은 재회
강릉까지 왔건만 시간은 아직 아침 8시도 되지 않았다.
평소같았으면 이제 이불 속에서 부시시 눈을 떴을 시간인데
어제 밤은 서울....지금은 강릉....
시간이란 얼마나 잘게 쪼개 쓰느냐에 따라 하루를 이틀 삼일처럼 길 게 쓸 수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부지런하게 움직이기가 힘들어서 문제지만....
역앞에 있는 식당에서 간단하게 뭐 좀 먹고서
202번 시내버스를 타고 경포대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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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는....이건 절대 나쁜 뜻이 아니라....왠지 사람들도 다 순박해보이고
거리의 풍경이나 이런 여러 가지 모습들도 수수하니 편안하다.
왠지 쌀쌀맞고 차가워보이는 서울 사람들과는 많이 다른 것 같다.
뭐 다 그런건 아니겠지만....말이 그렇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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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버스는 강릉 시가지를 빙 돌아 경포대로 향한다.
예전에는 자가용으로 가는 바람에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줄 몰랐는데
시내 버스를 타고 외곽으로 제법 나가야 한다. 대략 15분에서 20분 정도....
종점이 경포 해수욕장이라 찾긴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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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장한 해변이라 그런지 인적이 별로 없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내리쬐는 햇살이 제법 따가운 해변.....
7년 전에 왔던 그 곳이다....저 바위가 낯이 익네....
그때나 지금이나....
사방 200도 시선이 닿는 곳은 모두 수평선이 펼쳐진 이곳은 여전히 꿈속같은 바다다.
고등학교 시절에 비해 마음의 크기가 조금 커져서 그런지 그때만큼 여기가 드넓어 보이진 않지만
이렇게 탁 트인 바다를 마주하고 있으니 기분만큼은 날아갈 것 같다.
이게 보고싶어서 밤새 달려온거 아니겠어.....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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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원하던 풍경을 보고나니 맥이 탁 풀린 느낌이다.
정말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막무가내로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이렇게 여름을 보낼 수 없다는 어떤 의무감 같기도 하고...
'나 자신'에 대한 또 다른 '나'의 보상심리가 작용한 것 같기도 하다.
개강을 앞두고 또 한 학기를 버티게 만들어줄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 필요도 있었고....
아무튼 어제 밤에 출발해 지금 이시간까지 이제 12시간이 지났다.
마냥 들뜬 금요일 밤부터 그냥 어영부영 흘려보낼 수도 있는 토요일 오전까지...
12시간만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참 놀랍기도 하다.
쩝....돌아갈 때는 버스타고 가야겠다.
아마 자리에 앉자마자 서울까지 내내 잘 것 같다....피식
안녕.....2005년의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