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파리의 기억'
원제는 'TIME, LOVE, MEMORY: A Great Biologist and His Quest for the Origins of Behavior'이며 저자는 '조너던 와이너(Jonathan Weiner)'이다.
책을 다 읽은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변역서의 제목을 '초파리의 기억'이라고 한 것은 썩 잘 한 선택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원제목을 그대로 사용했더라면 저자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더 잘 전달되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각설하고,
이 책은 '시모어 벤저'의 '초파리 행동 유전 연구'를 소개하면서 '행동도 유전되는가?' 라는 질문을 다루고 있다.
아버지의 걸음걸이와 내 걸음걸이가 닮았다던가, 집안에 유독 왼손잡이가 많다던지, 잠잘 때 삼대(三代)가 모두 코를 곤다던지....
살면서 한 번 쯤 이처럼 가족끼리 닮은 점을 보며 신기해하거나 유쾌해한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눈, 코, 입이 닮은 것 처럼 겉으로 확연히 비교 가능한 외모와 달리 우리의 행동이 유전된다는 것은 직관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행동'이 유전된다는 것은 지극히 '환원주의적'인 생각으로 '인간의 복잡한 행동 양상이 어떻게 유전자 한 두 개에 의해 조절된단 말인가?' 하는 궁극의 의구심을 불러 일으킨다.
이는 일반적인 '행동의 정의'가 가져오는 오해에서 비롯된다.
특히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한 패턴의 행동 양상을 보여주는 '인간의 행동'은 '유전자 : 행동'의 연관성을 살피기에 너무 많은 요소를 가지고 있다.
행동 양상을 연구할 때 '사람'은 그리 좋은 '모델 시스템'이 아닌 셈이다. 우리가 깨어있는 동안 수행하는 수많은 의식적인 행동은 '환원주의적 접근법'으로 설명하기에 무척이나 벅차 보인다.
하지만 '행동'의 범주를 좀 포괄적으로 받아들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몇몇 신경정신질환을 살펴보면 일련의 행동 양상과 특정 유전자와의 연관관계를 좀 더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가령 우리가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도 보통의 행동이며, 뚜벅뚜벅 똑바로 걷는 것도 보통의 행동 양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행동은 특정 유전자의 이상으로 인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말 더듬(stuttering)'이나,
운동 신경의 퇴행으로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는 '파킨슨 병(Parkinson's disease)'으로 나타나고,
이러한 질병들이 유전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유전자 연관 연구(linkage study)'를 통해 증명되었다.
유전자의 작은 변화만으로 우리는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 제대로 걸을 수 조차 없으니, 유전자가 행동을 조절한다는 명제 성립한다고 볼 수 있다.
분명 유전자가 이상해지면 행동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시모어 벤저가 초파리의 행동 실험을 통해 초파리 행동을 조절하는 유전자의 존재를 제시했을 때,
사람들은 초파리의 다양한 행동 양상 자체를 믿으려 하지 않았고, 유전자가 그러한 행동을 조절한다는 주장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최근 신경생물학 분야에서는 사람의 합리적인 선택, 충동성에 대한 연구까지 특정 수용체(receptor)를 통해 설명하고자 하니, 우리의 행동과 의지까지 유전자 수준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시류는 분야의 큰 줄기로 자리 잡은 듯하다.
여전히 초파리와 마우스를 이용한 행동 실험 결과조차 해석의 여지가 불분명하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행동 분석은 더 뜬 구름 잡는 얘기인 것 같지만
이제는 유전자와 행동의 연관성은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