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0.30 土
아침을 먹자마자 부지런히 바티칸으로 향한다.
오늘은 날씨가 좀 흐리네...
지하철에서 내려 바티칸 박물관으로 향하는 길에는 유난히도 옷가게가 많은 것같다.
특히나 레이싱 선수들이 입는 가죽점퍼같은게 쭉 진열되어있다. 이탈리아가 레이싱에도 일가견이 있지...음
거리 구경을 하면서 걷다보니 잠시 뒤 높다란 레오네 성벽이 눈 앞을 가로막는다.
이쪽은 이탈리아....성벽 안쪽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인 바티칸 시국...
성벽이 곧 국경인 셈이다.
...
Citta del Vaticano..
박물관을 보기 위해 아침부터 제법 서둘러 왔는데 벌써 줄이 길 게 늘어서 있다.
밝은 성벽을 따라 쭉 늘어선 줄이 어디까지 뻗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 모두 순례자들처럼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
하늘이 흐려 가끔 빗방울 한 두 개가 떨어지지만 다행히 줄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어서
한 20분 정도 기다리면 박물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듯하다.
....
비록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바티칸'과 '교황'의 상징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티칸은 세계 4대 종교중의 하나인 가톨릭의 총본산이고
그런 바티칸에는 바로 살아있는 성인으로 추앙받는 교황이 머무르고 있다.
가톨릭과 교황....
종교를 초월해서 교황만큼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전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본다.
그 어느 정치가나 사상가, 기업가가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 전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움직이고있으니 그 위치란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지금도 그 영향력이 대단하지만 과거 중세시대를 비롯해 종교가 인간을 지배했을 시기에는
교황의 말은 곧 법이었고 황제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었다.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교황의 인정을 받아야했고 막대한 부와 권력이 교황청으로 흘러들어가지 않았었나...
그런 무소불위의 권력 때문에 사람들의 미움과 원성을 받았을 때도 있었지만
아무튼 가톨릭의 수장으로서 교황은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며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
종교는 참 강력한 패러다임인 것같다.
오직 종교로 인해서 모든 것이 지배당할 수도 있고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시 될 수 있다는 것에대해 가끔 놀라곤 한다.
종교에 심취해본적이 없는 나로서는 오히려 내가 특정 종교에 얽매이지 않은 것을 감사하게 여기고 있다.
그만큼 나는 생각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셈 아닌가?
뭐....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교황 할아버지가 보신다면 한 마리 불쌍한 양으로 대하실지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종교란 인간의 나약함을 감싸주는 따뜻한 담요와 같은 거라고 본다.
인간을 위한 종교가 자칫 인간을 옥죄는 체계가 되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가톨릭의 심장부에 들어서니 왠지 세계평화주의자가 된 것같다. 히죽.
Musei Vaticani
학생 할인으로 8유로짜리 티켓을 끊고 역시나 보안검색대를 지나 박물관 안으로 들어섰다.
세계평화를 주창하는 바티칸도 사람을 다 믿지는 않는 모양이다...풋
세계에서 가장 큰 박물관 중의 하나인 이곳 바티칸 박물관에는 정말 명작들이 한가득 전시되어 있다.
과거 교황의 힘을 생각하면 당연지사인지도 모르겠지만...
역시나 작품의 방대함에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곳이다.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들어서는 입구부터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정신이 없다.
이거 완전히 사람들의 물결에 휩쓸려 다녀야할 것같다.
일단 사람들 가는 방향으로 따라가 보자....
...
...
"후아~~~~~"
사람들에 휩쓸려 한참을 걸었다. 솔직히 여기가 어디쯤인지 잘 모르겠다...에구구
유난히 가이드 관광객들도 많은 것같고...조각이며 그림이며 느긋하게 감상할 여유도 없고...
좁은 통로를 따라 정말 사람들에게 등 떠밀려 여기까지 왔다. 여기가 어디야?....
잠시 사람들 틈에서 빠져나와 발코니에서 열기좀 식히자고....더워라....
발코니에서는 저 멀리 로마의 끝이 바라다 보인다.
시야를 가로막는 것은 하나도 없고 그저 평탄하기만한 로마의 스카이라인...
산이라고는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 이 매끄러운 배경이 왠지 모르게 허하게 느껴진다.
너무 넓어서 그런가.....
...
...
다시 군중 속으로 들어간다.
...
한참을 그렇게 또 사람들 틈에 끼어 걷다가 갑작스럽게 '라오콘'과 마주쳤다.
분명 책에서 사진으로 본 그 라오콘이다....
냉큼 다가가서 찬찬히 살펴보니까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아마 세상에서 이 작품만큼 대상의 고통이 생생하게 전해지는 것은 드물 것이다.
단단하게 죄여오는 거대한 뱀의 힘에 힘겹게 저항하는 라오콘과 어린 두 아들...
뒤틀린 팔과 긴장된 몸뚱아리는 너무나 생생해 근육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정말 살아있는듯하다.
'참 잘 만들었네....잘 만들었어....'
아폴로를 섬기는 트로이의 신관으로서 그리스군의 목마를 트로이성에 들이는 것을 반대했다가
신의 노여움을 사 포세이돈이 보낸 거대한 뱀에 의해 두 아들과 함께 죽음을 당한 '라오콘'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런데 '라오콘' 옆에 있는 안내판을 보니까 지금의 모습은 원래의 모습이 아니란다.
과거 어떤 관람객이 조각상에게 해를 가하는 바람에 오른팔이 떨어져 나갔는데,
원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니까 오른팔이 위로 쭉 뻗어있는 모습이다.
지금과 그 느낌이 사뭇 다르긴하지만 아무튼 그정도로 부서진게 천만 다행이네...
...
여행을 하면서 참 많은 작품들을 봐 왔지만 라오콘처럼 강한 인상을 줬던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역시나 명작은 명작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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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창고가 따로 있을까 싶다.
여기가 보물창고가 아니면 도대체 어디가 보물창고란 말인가...
전시장을 다 채우고도 모자라 복도에 그냥 널려있는 수많은 대리석 조각들과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화려하게 장식된 회랑은 정말 휘황찬란하다.
유럽의 여느 궁전들과 비교해도 결코 부족하지 않은 이 화려함...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온통 대리석으로 뒤덮인 복도를 따라 걸으면서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수 밖에 없었다.
...
얼마쯤 더 걸어가니 복도 가득 빽빽히 들어찬 사람들이 한결같이 고개를 치켜들고 열심히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뭔가하고 의아해할 겨를도 없이 저기 회랑 끝 천장까지 한번에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바로 시스티나 성당으로 가는 회랑의 그 유명한 천장화였다.
'오호.....'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화사하고 책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큰 작품이다.
그림 하나하나의 화려한 색상하며 섬세한 표현도 근사하지만
둥그스름한 회랑의 천장을따라 저 끝까지 이어진 천장화의 전체적인 모양새가 더 눈길을 잡아 끄는것같다.
회랑의 천장화까지 왔으니 이제 시스티나 성당 근처까지 왔나보다.
...
....
'라파엘로의 방'에 있는 라파엘로의 수작 'Scuola D'Atene'...'아테네 학당'...
역시나 책에서 사진으로 보던 것과는 그 느낌이 확연히 다른 작품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색채가 진중한 것같지는 않지만 말그대로 구성은 참 돋보이는 그림같다.
책에서 설명한 것처럼 원근감도 아주 뚜렷하고 학자들의 특성을 참 실감나게 표현했고...
여행 가이드 책에 나와 있는 그림의 설명을 읽으면서 학자들 하나하나의 모습을 찾아보는 재미도 썩 괜찮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디오게네스, 유클리드........
.........
......
대학자들을 뒤로하고 라파엘로의 방을 빠져나와 계단을 타고 곧장 내려가면
미켈란젤로 불후의 명작인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만나볼 수 있다.
...
거대한 벽화와 천장화에 둘러싸인 시스티나 성당 내부는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상대적으로 작은 성당을 가득채우고 있는 커다란 벽화들은 사뭇 위압적인 느낌마져 준다...
성당 전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저 그림이 바로 '최후의 심판'이고
사람들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천장화가 그유명한 '천지창조'다.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으로 미켈란젤로는 거의 드러누운 상태로 4년 5개월만에 천장화 '천지창조'를 완성했다.
그때 떨어지는 분진 때문에 미켈란젤로의 시력이 아주 나빠졌다는 뒷이야기도 있듯이
작업 자체가 아주 고행이었다고 한다. 성당 전면에 있는 '최후의 심판'은 미켈란젤로가 '천지창조'를 완성한 22년 후에
클레멘트 7세의 부름을 받고 다시 로마에 찾아와 그려낸 명작이다.
'천지창조'나 '최후의 심판' 모두 그림에 대한 해석이 아주 방대하기 때문에
책에 나와 있는 해설을 따라 벽화를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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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를 다룬 '천지창조'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은 뭐니뭐니해도 '아담의 창조'일 것이다.
닿을 듯 말 듯 손가락을 뻗는 이 그림....우리가 숱하게 봐온 그림이다.
창세기에 아담의 탄생이 이런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참 기막힌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쭉 한 번 훑어보니까 '아담의 창조'랑 '에덴동선에서 추방'....이 두 그림만 무슨 의미인지 알겠고
나머지 그림은 내가 창세기를 모르는 바 무슨 내용인지 해설을 안 보고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최후의 심판'같은 경우에도 그림의 각 부분들이 의미하는 바가 너무나 다양하다.
일단 예수 그리스도가 수염도 없는 젊은이로 묘사된 점도 특이하고
그리스도 오른쪽 아래에 어떤 사람이 인간의 가죽을 들고 있는데 이는 순교한 바르톨로메오를 표현한 것이지만
미켈란젤로는 그 가죽에 자신의 얼굴을 표현해 자신이 받은 부당한 대우에 대한 불만을 나타냈다고 한다.
지옥에서 흑인을 끌어올리는 천사는 인종문제를 다룬 것이고....
원래 이 벽화는 모든 인물이 나체로 그려졌다가 너무 음란하다는 평가때문에 후대에 다시 살짝 가려진거라고 한다.
아무튼 참 할 말이 많은 그림임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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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안이 조금 소란스럽다 싶으면 관리인들은 손가락을 입 앞에 갖다 대고 "쉬이잇" 하고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곤 한다.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이대면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No photo, thank you" 하면서 제지하기도 하고...
아까 내가 사진 찍을 때는 미처 날 발견하지 못했었나보다.....근데 사진이 잘 안 나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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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로마시내를 둘러보고 오늘 바티칸 박물관을 구경하면서 느꼈는데
로마에서는 가이드 관광을 하는 것도 꽤 괜찮을 것 같다.
우르르 몰려다니는걸 싫어하는 나로서는 가이드 관광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여기는 워낙에 문화 유적이 많고 작품 하나를 구경해도 역사적인 배경지식이 많이 필요로 하기때문에
혼자 구경하다보면 아무래도 수박 겉핥기식이 되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누가 옆에서 하나하나 설명해주면 더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
...
나에게 보내는 엽서....
정신없이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다가 박물관 안에 있는 우체국에 들렀다.
.....
엽서나 한 장 써 볼까해서 말이다....
여행을 하면 꼬박꼬박 엽서를 보내거나 사서 모으는 사람도 많다던데 나는 여행 내도록 엽서 한 장 쓴적이 없다.
몽마르뜨에서도 엽서만 만지작거리다가 그냥 지나쳤고 프라하에서도 그랬던 것 같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아무에게나 보내고 싶은데 그러지 못했다...
아무리 전화나 e메일이 난무한다지만 편지나 엽서만이 가지는 아날로그 방식의 애뜻함을 모방할 수는 없는 것같다.
....
중학교 때 외국에 있는 펜팔친구와 편지를 주고받았던 때가 기억난다.
서로의 편지를 받아보려면 보름이고 한달을 기다려야 했지만 나는 그 기다림의 과정이 참 좋았다.
편지함을 들여다보면서 언제쯤 편지가 도착하려나 몇날 며칠을 기대감에 부풀어 보내기도 하고,
어느날 편지함에 꽂혀있는 낯선 나라의 소인이 찍힌 편지를 받아보면서 함박웃음을 짓곤 했었다
....
외국에 나가면 꼭 편지나 엽서를 보내고 싶었다.
단 몇줄의 짧은 안부만이라도 적어보내면 그게 다 나중에 소중한 추억거리로 남아 있을테니말이다...
10월 2일 영국 런던에서
10월 31일 이탈리아 로마까지
내 생애 가장 잊지 못할
멋진 여행이었다.
2004. 10. 31
바티칸 우체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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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는 아무래도 여행 마지막 날짜가 더 멋있을 것같아 오늘이 아닌 내일 날짜로 썼다.
아마 이 엽서가 다시 내 손에 돌아올 때면 나는 집에 돌아가 있겠지....
나에게 보내는 엽서 한 장....
교황의 얼굴이 도안된 예쁜 우표 두 장을 정성스레 붙이고 엽서를 우체통 안으로 떠나 보냈다.
이것으로 또 하나의 추억만들기가 이뤄진 셈이네...씨익
....
...
Basilica di San Pietro
바티칸 박물관에서 나오자마자 달려간 곳은 자그마한 카페 겸 레스토랑...
많이 걸었더니 배가 심하게 고프다...후후
유창한 영어로 주문을 재촉하는 주인 아저씨....성격도 급하셔라....생각 좀 합시다~
맛있어보이는게 워낙 많아서 또 한참을 고민하다가 만만한 파스타 하나를 주문했다.
피자 종류도 많고 스파게티, 파스타도 원체 종류가 다양해서 메뉴 선택하는게 여간 곤욕스러운게 아니다.
납작하고 커다란 만두처럼 생긴 파스타...
토마토 소스와 치즈 가루가 뿌려져 있고 속에는 다진 고기가 들어있다.
맛있다.............그런데.............
양이 너무 적다....흑흑
한 입 먹었을 뿐인데 벌써 1/4이 없어진 것같다. 이런...
마지막 한 조각의 파스타를 입에 넣고 디저트로 주스 한 병까지 마셨건만 배는 여전히 공허하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피자 한 판 먹는 건데.....
....
피자 한 판.....흑
....
본래 교황령은 로마를 비롯해 이탈리아 중부의 넓은 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중세 이후 흔히 '로마 교황령'이라해서 로마자체를 교황의 도시로 동일시해온게 사실이다.
교황령은 곧 교황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이었던 것이다.
비록 지금은 '바티칸 시국'이라하여 아주 작은 구역을 차지하고 있지만
교황령으로서 바티칸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대통령이나 수상의 백마디 말보다 교황의 한 마디가 더 큰 위력을 발휘할 때도 있지 않은가...
종교의 힘이란 그만큼 대단한 것이다.
아마 가톨릭이 존재하는 한 교황과 바티칸의 권위는 계속 유지되겠지....
광장 한 가운데 솟아있는 저 오벨리스크처럼 말이다.
...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광장을 둥그렇게 감싸고 있는 이 회랑에는 비밀이 하나 있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오벨리스크와 광장의 분수대 사이의 어느 지점에 서면
회랑의 4열 기둥이 모두 하나로 겹쳐보이게 된다.
4열의 얼기설기한 기둥이 어느 지점에서 딱 겹쳐져 하나로 보이는게 제법 신기하다.
한발짝만 벗어나면 4개의 기둥이고....다시 한발짝 움직이면 하나가 되고...
서양 건축가들은 자신들의 건축물에 이런 트릭을 숨기길 좋아했나보다.
기둥이 겹쳐져 하나로 보인다든지...빛의 각도를 조절해 특정 부분을 비춘다든지...
그만큼 웅장한 건축물 속에도 치밀하고 정교한 기술이 배어있음을 보여주려고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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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벨리스크 밑에 앉아 잠시 사람구경 좀 하다가 가야겠다.
단체로 수학여행이라도 왔는지 학생 한 무리가 시끌벅적하게 내 옆을 지나간다.
일요일이면 교황이 주관하는 정오미사를 보러 사람들이 구름처럼 밀려든다는데 오늘은 토요일이라 한산하다.
언젠가 TV에서 이 넓은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신자들의 모습을 본적이 있는데
교황의 작은 손짓에 열광하던 군중들의 모습이 생생하다.
사람들은 먼 발치에서라도 교황을 직접 본다는 것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같았다.
어찌 되었건 교황처럼 성스러운 인물을 직접 대한다는 것은 정말 흔치않은 기회이니 말이다.
....
성 베드로 성당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또 줄을 서서 보안검색을 받아야 한다.
가방은 X레이 투시기를 지나고... 사람들은 일렬로 금속탐지기를 지나가고...
검색대 옆에는 복장규제를 안내하는 팻말이 붙어 있어 눈길을 끈다.
베드로 성당의 복장규제도 여행객들 사이에는 이미 상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특히나 여성들의 짧은 스커트나 민소매 옷에 대한 규정은 참 재밌는 것같다.
그만큼 보수적인 상징성을 의미하는 것이겠지만 요즘은 많이 완화되서
너무 노골적인 미니 스커트만 아니라면 민소매 옷같은 경우 그냥 통과시켜주는 듯하다.
성 베드로 광장은 원래 경기장으로 쓰였던 곳이라고 한다.
베드로가 여기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배드로가 묻힌 자리에 성당을 세운 것이 오늘날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시초가 되었다.
그 후 교황 율리우스 2세때에 새로운 성당 건축이 시작되어 120년동안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많은 건축가들의 손을 거쳐 오늘날과 같은 성당의 모습이 갖춰졌다고 한다.
하늘에서 보면 십자가 모양의 '성 베드로 대성당'과 둥근 모양의 '성 베드로 광장'이 열쇠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는 '천국의 열쇠'를 상징하는 것으로 교황청과 베드로의 상징이기도 하다.
...
성당 앞에 5개의 거대한 문이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중에서 제일 오른쪽에 있는 문이 '성스러운 문'이라 하여 25년마다 한 번 열리는 문이다.
2000년에 열렸었다고 하니까 2025년이 되야 저 문이 열린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2025년이면 내가 마흔 다섯이다...꽥~!
...
'오~ 신이시여....'
성당 안으로 들어선 나는 온몸을 휘감는 범접할 수 없는 위압감에 잔뜩 경직해 버렸다.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내 머리는 저절로 숙여지고 무릎은 한없이 낮아진다....
어떻게.....어떻게 이런 공간이 있을 수 있을까...
공기마져 무거운 이 엄숙함이 이 넓은 성당 안을 가득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다.
마치 거울처럼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과 저 높이 솟아있는 거대한 돔은 사람들을 한 없이 보잘것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숨쉬기조차 조심스러운 이 경건함...
가톨릭과 교황의 위치는 정녕 이런 것이었나......그저 엄청나다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미켈란젤로가 24살의 나이에 만들었다는 아름다운 피에타는 방탄 유리로 가려져 있어 카메라에 찍히길 거부하고 있다.
플래시 불빛이 반사되 사진이 영 엉망이다....허긴 사진으로 남긴다는게 무슨 의미가 있나....
성모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묘사 되었다는 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너무나 애처로운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성스러운 성모를 대상으로 이런 표현을 써도 될지 모르겠지만 피에타의 성모는 참 미인이다....훗.
...
성당 가운데에는 베르니니의 거대한 청동제 발다키노가 교황이 사용하는 대제 위에 우뚝 솟아있다.
그냥 단순한 장식 외에 뭔가 더 깊은 뜻이 있는 것같긴한데 자세한건 잘 모르겠다.
아무튼 중요한 사실은 이것도 엄청 크다는 것.......다들 왜 이리 큰거야...
....
이렇게 엄청난 성당을 짓기위해 120년 동안 투입했을 자본과 인력들을 상상하면 정말 놀라울 뿐이다.
역시나 교황과 가톨릭의 힘이기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았을까...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
기독교의 시작이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였다지만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이후부터 사실상 기독교의 중심은 로마였다.
교황과 가톨릭의 타락이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어 많은 대립을 초래하기도 했지만,
교황과 바티칸의 존재는 여전히 전세계 가톨릭 신자들 뿐만아니라 우리 모두의 안식처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바티칸은 종교적인 입장을 떠나 인류애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위한 기도를 멈춰선 안될 것이다.
너무나 삭막한 이 세상에서 바티칸은 어쩌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마지막 에덴동산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아마 종교의 힘으로 이 세상이 진정 평온해질 수 있다면 난 주저 없이 신을 믿을 것이다...
....
아무튼.....
성 베드로 광장 한 가운데에 서서 다시 대성당을 바라보니 아까와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같다. 씨익...
....
....
성 베드로 광장 정면에 뻗어 있는 큰 대로가 '화해의 길'이다.
교황청과 무솔리니 정부간의 라떼라노 협정체결을 기념해 만든 길이라는데 쭉 가면 '천사의 성'에 당도할 수 있다.
...
가는길에 아이스크림가게에 들려 2.5유로짜리 밀크쉐이크를 사먹었다.
여긴 아이스크림을 바로 믹서에 갈아서 우유랑 섞어준다....흠....밀크쉐이크를 원래 이렇게 만드는건가? 오호..
시럽이 좀 많이 들어갔는지 좀 달긴 한데 아무튼 맛은 썩 괜찮다.
갈 때는 버스나 한번 타 볼까....
....
..
로마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저녁을 먹고 침대위에서 잠깐 뒹굴다가 원영이 형이랑 밖으로 뛰쳐나왔다.
로마에서의 마지막 밤을 그저 조용히 보낼 수도 있겠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아쉬움에 견딜 수가 없을 것만 같다.....
정말이지.............견딜 수가 없을 것같다.
...
어둠이 깔린 로마의 거리를 걸었다.
가로등이 켜지고 가게의 쇼윈도는 환하게 밝혀졌다....
스쳐가는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가 눈부시다....
계속 걷는다....
걸으면서 본다......로마의 거리와 로마의 사람들....
하찮은 간판과 스쳐지나가는 사람의 얼굴까지 열심히 들여다 본다.
이 모든 것들을 다 놓치기 싫다.....이 모든 것들이 다 잊혀질까 안타깝다.....
그러면 안 되는데....그러면 안 돼.....
....
트레비 분수의 조명은 밤이 더 아름다운 것같다.
너무나 밝게 어른거리는 물빛.....저 아름다운 조각과 더 아름다운 사람들...
분수를 바라보며 다정히 앉아있는 저 사람들과도 이제 이별이다.
그리고
내 마법이 걸린 동전 두 개와도 이별이다.....
과연 이 분수대 앞에 다시 설 수 있을 날이 내게 찾아 올까?
....
주말의 로마저녁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토요일 저녁 명동 거리만큼은 아니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많으니 조금 위안이 되는 것같다.
그냥 사람들 틈 속을 걸으며 잠시나마 울적한 마음을 달래본다.
옷도 하나 샀다.....가벼운 레이싱 점퍼....
여기 이탈리아 친구들처럼 이걸 입고 스쿠터를 탔으면 더 좋았을텐데 그러지 못하는게 너무 아쉽다.
....
내가 좋아하는 스페인 계단에 앉아 광장의 아름다운 야경을 바라본다.
여긴 정말 개인적으로 너무 마음에 드는 곳이다.
이렇게 앉아 있으면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바라보는 로마의 야경도 오늘로 끝이다.
내일이면.....내일이면 이 모든 것들을 두고 돌아가야한다.
...
기분이 이상하다.
처음에는 떠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는데
이제는 돌아가야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난......난 그저 여기 이렇게 늘 있었던 것만 같다.
꿈 같다.....이 모든게......
꿈에서 깨면 모든게 다 희미해져 버릴 것만 같다.
...
내일 저녁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 지금 이렇게 스페인 계단에서 바라보는 저 불빛들조차도 그리울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