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0.28 木
피렌체에서 로마로 넘어오는 열차 안에서 만난 우리나라 신혼부부가
마침 내가 묵기로 한 숙소에 머물고 있던터라
어제 저녁 늦게 도착했지만 숙소잡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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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면서 신혼여행 온 커플을 두 쌍 만났는데
신혼여행을 이렇게 배낭여행으로 하는 것도 참 낭만적이고 좋을 것같다는 생각을 해봤다.
당사자들은 고생이 너무 심하다며 별로 권하지는 않지만 뭐 내 눈에는 참 좋아보인다....부럽기도 하고....
실은....
뭐 좀 이른 감이 있지만 나도 신혼여행을 어떻게 갈지 대충 생각해 둔게 있다.
커다란 크루즈선박을 타고 해상여행을 떠나는거지...
우아하게 바다 위를 미끄러지는 크루즈선 난간에 기대어
그대와 함께 광활한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바라보는거지....후후
멋지지 않나?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멋진 것같단말이야...
아무튼...
어젯밤 민박집에서 원영이형과 성준이와 다시 재회의 기쁨을 나눈 우리는
오늘 우리 유레일 패스의 마지막 목적지로 폼페이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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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미니역에서 나폴리까지....
아침에 테르미니역까지 걸어가면서 적잖이 놀랬다.
어제 밤에는 어두워서 주변을 잘 못봤는데...
지금 보니까 거리가 너무 지저분하고 사람들도 약간 불량스러운 것같다.
온통 널려있는 쓰레기...퀭한 눈동자의 사람들...
심지어 길바닥에 나뒹구는 '변'까지...
아무리 이탈리아라지만 그리고 아무리 로마라지만 이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한 것같다.
마치 영화에서나 보던 할렘가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대충 보니까 역 주변에는 중동이나 중앙아시아, 인도계 사람들이 모여사는 것 같은데
사람들의 행동이나 행색을 봐서는 약간 경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원래 이런 역 주변 환경이 좀 억세긴 하니까 뭐 알아서들 조심해야겠만
너무 단정하고 말쑥한 차림의 유럽사람들만 대하다가
로마의 이런 어수선함을 대하자니 내가 괜히 민망해지는 것같다.
...
길고 긴 테르미니역의 플렛폼을 가로질러 나폴리행 열차에 올랐다.
일단 나폴리까지 간 다음 사철이나 다시 국철을 타고 폼페이까지 들어갈 예정이다.
어김없이 오늘도 열차가 5분 늦었다.....후후
10시 27분 나폴리행 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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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출발한 열차는 남쪽으로 남쪽으로 달려간다.
베네치아까지는 단풍이 물들어 있었는데 여긴 아직 완연한 늦여름 정취를 간직하고 있어서
연두빛 초록들이 제법 두껍게 내려앉아 있다.
확실히 로마로 들어선 이후부터 날씨가 확연히 상쾌해졌다는걸 옷이 말해주고 있다.
런던에서부터 늘 입고 다니던 재킷을 벗어던지고 오늘은 얇은 긴팔 하나만 입고 나왔는데
이렇게 할랑하니 좋을 수가 없다. 아~ 날아갈 것 같애~
...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원영이형이 대뜸 소리친다.
"재훈아...근데 오늘 니 생일아이가?"
"응? 생일?"
"오늘 28일 아이가.."
"어!!.......그러네..."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오늘......정말 내 생일이다.
오늘 날짜가 28일이라는건 알고 있었는데 28일이 내 생일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후후..이럴 수가...
여행을 하면서 하루하루가 정말 꿈같은 일상이 되다 보니까 생일을 생각할 필요성을 잃었던 것같다.
졸지에 나폴리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24번째 생일을 맞이하게 됐는데
유럽에서 맞이하는 생일.....이런 기분도 꽤 괜찮은 것같다.
음...
지금 나에게는 지중해를 바라보며 나폴리로 향하는 이 현실이 커다란 선물일 따름이다.
나폴리에서 폼페이까지..
열차는 나폴리 역으로 천천히 접어들었다.
선로변으로 늘어서 있는 낡은 아파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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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의 첫인상은 낡은 선로 옆의 허름한 아파트와 저 멀리 보이는 고층건물의 묘한 대조였다.
세계 3대 미항으로 꼽힌다는 나폴리....
아쉽지만 오늘은 그 아름답다는 나폴리항을 다녀갈 여유가 없을 듯하다.
아름다운 항구도시의 이미지 대신 다소 삭막한 나폴리의 인상을 간직하게되 조금 유감이긴 한데...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삭막한 듯하지만 그 속에서 나름대로 사람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곳 같다.
어찌보면 이탈리아사람들이야 말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가장 매력적인 존재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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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의 정취를 조금도 누릴 새도 없이 우리는 다시 폼페이행 열차를 타기 위해 허겁지겁 뛰어야 했다.
원래 폼페이까지는 사철이 많지만 운 좋게도 국철과 시간이 맞아 떨어져 열차표를 굳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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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 50분...
가까스로 올라탄 폼페이행 열차는 나폴리 역을 빠져나와 해안 선로 위를 천천히 달린다.
창밖으로 바라본 지중해의 잔잔한 모습....
햇빛 부서지는 지중해를 배경으로 폼페이로 향하는 풍경은 참 소박하다.
해안을 따라 낡은 아파트촌도 보이고... 공터에서 공놀이하는 애들도 지나가고...
남부 이탈리아의 소박한 풍경은 바로 이런걸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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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소박한 풍경을 감상하는 동안 열차는 자그마한 폼페이역에 도착했고
우리를 반겨준건 눈부신 남부 이탈리아의 햇살이었다.
요 며칠 계속 흐릿한 하늘 밑에 있었던터라 오늘 햇살은 눈살을 제법 찌푸리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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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로 돌아가는 열차시간을 확인한 뒤 폼페이역 밖으로 나왔는데,
길가의 가로수와 하얀 건물들이 남국의 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는 뜻밖의 아름다운 모습에
화산재가 나뒹구는 삭막한 곳을 상상했던 나로서는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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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구경도 하고 동네구경도 하면서 폼페이 시가지를 가로질러
폼페이 유적지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음료수 한 잔으로 갈증도 달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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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는 예로부터 지역주의가 아주 심한 곳인데
로마를 기점으로 이탈리아 남부는 북부에 비해서 소득수준이 좀 떨어진다고 한다.
내가 베네치아에서 여기 폼페이까지 내려오면서 얼핏봤지만 남부와 북부사람들의 생활모습이 다소 다른건 확실한것같다.
로마제국 멸망후 워낙 오랜기간동안 각자 도시공국으로 발전해오면서 지역주의도 심해지고...
근래에와서는 북부지방에 비해 남부지방의 개발이 많이 뒤떨어져 지역편차가 더 심각해진 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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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나폴리를 지나면서부터 계속 이 생각을 했었는데,
한 국가 내에서 지역별로 이처럼 생활수준의 차이가 두드러진다는게 다소 놀랍기도 하고....
하지만 여기 사람들의 얼굴에서 그늘을 찾아보기는 힘든 것같다.
뭐 이들의 속내를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왠지모르게 사람들의 표정이나 행동을 보면 이 곳 사람들이 훨씬 더 쾌활하고 밝아보이는건 나만 느끼는 감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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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흔적..
"그 옛날 폼페이라는 아주 번성한 도시가 있었어...
도로에는 수레가 달리고 광장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지.
그런데 어느날...무시무시한 화산폭발로 도시는 아수라장이 된거야..
하늘에선 희뿌연 화산재가 죽음의 눈꽃처럼 끝없이 쏟아져 내리고
뜨거운 화산의 열기는 사람들의 가슴을 얼어붙게 만들었어.
사람들은 절망의 비명을 외쳐댔지만
도시는 그대로.......그대로.......사라져 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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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료 10유로....
지도를 펼쳐든 우리는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온 사람들처럼
그 옛날 폼페이 시민들이 걸었을 그 길을 걸으며 평화롭던 폼페이를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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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행복하게 살았을법한 집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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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가 끄는 수레들로 가득했을 도로는 텅 빈 모습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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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된 폼페이의 거리를 가득 메워 어슬렁거리는 관광객들이
왠지 내 눈에는 마치 옛 폼페이 시민들의 희미한 환영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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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이라도 불씨를 피워 음식을 만들어낼 것같은 주방의 모습과....
주방 너머로 들여다본 집 안의 모습은 폐허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정갈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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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한 모자이크 바닥에서부터...
선명한 원색의 벽장식은
2000년 전의 것이라고 여기기에는 너무도 세련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색상을 도대체 어디서 구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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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한 가운데에는 수레바퀴에 닳아서 움푹 패인 바퀴 홈이 그대로 남아있어
그 옛날 번성했던 폼페이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얼마나 많은 수레가 왕래했으면 이 단단한 도로에 저런 깊은 홈을 남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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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회랑을 돌아들어가면 어두침침한 건물 내부에서 화산재에 그대로 묻혀 버린 한 사람의 주형을 만나게 된다.
화산재에 갇힌 사람의 모습을 석고 주형으로 복원한 것이다.
어둡고 딱딱하게 굳어있는 한 사람의 모습,
얼굴을 파묻은채 모로 누워 웅크린 이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
모든 것을 체념하고 옆으로 누워 웅크린 이 폼페이 시민의 어깨가 금방이라도 두려움에 바르르 떨릴 것만 같다.
천천히 자기 몸을 뒤덮는 화산재 속에서 이 사람은 엄습해오는 죽음의 공포에 홀로 맞서다 떠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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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폼페이를 삼킨 베수비오 화산은 오늘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폼페이를 내려다보고 있다.
저렇게 고요한 정적 이면에 이런 슬프고 끔찍한 재앙을 갖고 있을줄은 아무도 몰랐을거다.
정작 저 화산이 자신들을 영원히 잠재워 버릴 줄을.....
인간의 힘과 세월은 자연 앞에서는 한갓 허술한 모래성과 찰나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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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그릇이나 항아리를 따로 모아둔곳이 있는데
아직 복원작업 중인 것을 비롯해서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물이 아주 상당하다.
아무래도 하루아침에 화산재에 묻힌 것들이 대부분이라 보존상태는 꽤 좋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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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로 남은 유적지의 운치를 살려 만든 레스토랑....
분위기가 꽤 괜찮은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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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지도에 매춘부가 살았었다는 한 고급 저택 앞에 섰다.
역시나 벽 한쪽에 그려놓은 그림이 이 집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는데,
이런걸 보니까 지금 사람들이나 2000년 전의 사람들이나 그렇게 달랐던 것같지는 않다...훗
넓은 정원이 딸린 집안 내부는 천장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환하게 비춰주는데
몇군데만 손보면 지금 당장이라도 사람이 살 수 있을정도로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바닥은 대리석에 정원엔 나무가 자라고....
그 옛날에도 이렇게 좋은 집에서 살았다니 참 놀랍다. 부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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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가 생각보다 커서 꼼꼼히 다 돌아보려면 시간이 많이 든다.
계속 돌바닥 위를 걸었더니 발바닥도 아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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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을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당시 폼페이 사람들의 쾌락적이고 향락적인 생활을 벌주기 위해 신이 내린 처사'라고...
뭐 이런 말로 폼페이의 존재를 신비스럽게 포장할 수도 있지만,
아무튼 2000년 전에 이정도로 발전한 도시가 있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도로와 인도가 분리되고, 상수도와 하수도가 설치됐으며, 대리석 욕조에 대중 목욕탕,
화려한 신전과 거대한 원형경기장까지.....폼페이 시민들의 일상은 그만큼 충만했을 것이다.
2000년이라는 유구한 세월이 흘렀건만 벽돌 하나하나와 바닥에 깔린 작은 돌조차도
그때 그 폼페이 시민들의 손길을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는 듯해 아주 남달랐던 경험이었다.
커다란 원형 경기장을 마지막으로 폼페이는 다시 기억 속에 묻어둬야겠지만
2000년 전에 사라진 도시.....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나.....
시공간을 뛰어넘어 만나본 폼페이는 나에게 왠지모를 허망함을 가르쳐준 것같다.
산타마리아 로사리오 성당 앞에서....
다시 폼페이 역으로 향하는 길에 근처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러 또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손에 쥐었다.
늘 먹어도 맛있는 이탈리아의 아이스크림..
이상하게 이탈리아 아이스크림은 암만 먹어도 질리지가 않는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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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햇살은 어느정도 수그러들었지만 살랑거리는 바람은 여전히 시원하다.
열차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있어서 분수대 옆에 앉아 머리도 식히고 사람구경을 하면서 느긋하게 시간을 때우는데
흙빛의 유적지에서 이제 막 벗어난 탓인지 산타마리아 로사리오 성당 앞의 광장의 모습이 아까보다 더 생기있어 보인다.
뛰어 다니며 장난치는 꼬마들,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지나가는 아주머니, 분수대 옆에 앉아있는 많은 사람들...
동네 사람들이 여기저기 앉아서 이야기하며 쉬는 모습이 참 정겹다. 여긴 진짜 사람 사는 동네 같네...
광장에 가득한 길쭉한 열대나무와 분수대의 시원한 물줄기가 마치 남국의 어디를 연상케 한다.
이탈리아 남부의 정취라는게 이런걸 두고 하는 말인지도.....
온몸에 흙을 묻히고 수돗가에서 지들끼리 장난치며 노는 꼬마애 세 명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우리도 키득키득 웃어봤다.
얼굴에 심술이 가득한게 녀석들 생긴게 완전히 장난꾸러기다......후후
저렇게 옷 다 젖으면 나중에 엄마한테 혼나지.....
사람이란 서로 이렇게 가까이 부대끼며 사는게 제일 좋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동네 사람끼리 이렇게 공원에 앉아 이야기도 하고, 애들은 자기들끼리 뛰어 놀고...
다른 곳보다 이탈리아가....그리고 특히나 남부 이탈리아의 사람냄새가 더 진한 것은 그만큼 더 따뜻한 햇살때문일까?
아무튼 보기에 참 좋다....
...
한산한 폼페이역..
....
..
나폴리역에 '흔적'을 남기고 로마로...
폼페이에서 다시 나폴리로 돌아온 우리는 곧장 로마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나폴리에서 출발해 독일 뮌헨까지 넘어가는 이탈리아 열차.
오늘은 왠일로 열차시간이 딱딱 맞아 들어가는 것 같다....
출발 5분 전....
'아이스크림을 너무 많이 먹었나.....배가.....'
잠잠하던 배가 요동을 쳐서 혼자 궁시렁 거리며 컴파트먼트 문을 열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이탈리아 열차가 다른건 뭐 그럭저럭 괜찮은데 화장실이 좀 별로란 말이야....
어쨌든...
큰일을 마무리 짓고 변기 물을 내리는 순간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엇....!!"
나도 모르게 입에서 터져나온 짧은 비명소리.
나는 재빨리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와 플랫폼으로 뛰어내려갔고
플랫폼 위에 선 나는 그대로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충격적이게도 철길 위에 나의 흔적이 아주 적나라하게 떨어져 있는게아닌가...!!!!!!
".....헉!!....."
변기에 물 내리는 순간 갑자기 변기 밑이 뻥 뚫리면서 땅바닥이 보이더라고...
순간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는데 진짜 이런 불행한 일이 생길줄은 몰랐다.
열차가 승객들의 흔적을 철길 위에 그대로 뿌린다는 소리를 듣긴 들었는데
그건 다 옛날 소리인 줄로만 알았다. 설마 요즘도.. 그것도 유럽에서 그런 일이 있을라고 했는데...
21세기에 그것도 나름대로 선진국이라는 이탈리아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냐고...!!
그러고보니 역 안의 철길 위에 이런 흔적들이 아주 즐비하다.
여기에 한 무더기....저기에 한 무더기....저기에도......
그래 어쩐지 철길이 하얗다 싶었는데 그게 다 하얀 소독가루였던거다. 이런.....
잽싸게 주위를 둘러봤는데 다행히 반경 20m 안에는 사람이 없다.
누가 볼까 후다닥 다시 열차에 뛰어 올라 컴파트먼트 안으로 냅다 들어갔다.
"아따 놀래라......니 얼굴이 왜 그리 빨게?"
"짜식....먼일인데 혼자 부끄러워하노..."
"에헤헤....머 아무것도 아니라...."
부끄럼에 빨게진 얼굴을 진정시키며 괜히 여기저기 눈치만 살피고 앉아 있다.
으아.....살다가 이렇게 민망한 경우는 또 처음인 것같다.
이거 본의 아니게 나폴리에 이렇게 커다란 흔적을 남길줄이야...
잠시후 이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열차는 서서히 나폴리 역을 빠져나와 로마로 향한다.
참.....웃기지도 않는다...
'휴우....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리네....쿡쿡'
...
한참을 달려 창밖에 서서히 어스름이 깔리고 후덕한 차장아저씨가 표검사를 한다.
이제는 끝이 다 구겨진 유레일표 케이스....
오늘부로 이 유레일표도 마지막이다....
여행하는 동안 정말 제일 소중히 간직했던 녀석이 아닌가 싶다.
여행하는 내내 나의 발이 되어준 녀석이니까....
처음 이 녀석을 손에 쥐고 두근거려 했던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날이 되 버렸다.
이거 되게 서운하네....
'덕분에 여행 참 잘 했지.....짜식 너도 고생했다...'
너덜너덜해진 귀퉁이를 펴서 다시 고이고이 가방속에 집어 넣는다.
마지막까지 같이 가야지....
....
..
Happy Birthday to You~
저녁이 한참 지나서야 민박집에 도착한 우리는 내 생일을 핑계로 다 같이 모여앉을 자리를 마련했다.
내가 굳이 사양 했지만 오늘 분위기를 보아하니 내 생일이 아니더라도 다들 서로 어울릴 것 같더라고...
로마의 밤을 조용히 보내긴 다들 아쉬웠던 모양이다....피식
..
우리나라처럼 24시 편의점을 쉽게 찾아보기 힘든 곳이라 멀리 아랍계 수퍼마켓에서 어렵사리 맥주랑 간식거리를 구했다.
거기다 너무나 고맙게도 민박집 아주머니가 손수 12유로짜리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사다 주셔서 분위기는 한껏 무르익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이렇게 거나한 생일축하를 받게 될줄이야....그것도 생면부지인 사람들로부터....
로마에서 맞이하는 24살 생일....이거 생각할수록 꽤나 근사하다...후후
쑥스러운 생일축하노래가 흐르고 기념사진도 찍고...
오랜만에 맥주병을 기울인 사람들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으며 로마의 밤을 즐겼다.
어제 열차안에서 만났던 신혼부부는 오늘도 깨가 쏟아지는 애정 행각을 보여주었고
집에다가 각자 다른 핑계를 둘러대고 같이 배낭여행 온 명랑한 커플도 만만치 않은 닭살 행각을 보여주었다.
친근한 연변사투리로 들은 민박집 아주머니 인생 얘기에 짠해지기도 하고...
"아~ 이럴 때는 삼겹살에 소주가 최곤데~"
"하하하하하~"
소주에 삼겹살이라.....
뭐 평소에 소주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오늘은 왠지 소주의 그 쌉싸름한 맛이 그리운 것같다.
오늘따라 모든게 그리워진다.
가족들....친구들....그리고 내게 익숙한 일상들.....
로마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밤도 이렇게 저물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