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0.27 水
새벽에 비가 왔었나보다.
작은 웅덩이가 만들어진 거리가 촉촉히 젖어 있다.
약간은 눅룩하면서도 상쾌한 이런 공기가 나는 참 좋다.
이곳 이탈리아에서도....언제나 그렇듯이 비온 뒤 갠 아침의 공기는 참 신선한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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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박집 아주머니 말을 듣고 피렌체 역 바로 앞에 있는 버스 터미널에 갔더니 여기가 아니랜다.
창구에 앉아 있던 아저씨가 특이한 영어로 뭐라 뭐라 설명을 해주시는데.....정확히 무슨 말인지...
여기저기 조금 헤매다가 결국 관광안내소에 가서 약도를 받아들고 SITA 버스 터미널을 찾아 갔다.
터미널 건물이 따로 크게 있는줄 알았는데, 터미널 건물조차 복고풍의 건물 외양을 그대로 갖고 있어서 얼핏 그냥 지나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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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건물을 부수지 않고 거의 내부만 고쳐서 쓰는 사람들이니 건물 외양만 봐서는 그 용도를 짐작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 것같다.
시에나 행 편도 6.5유로...
늘상 열차만 타다가 버스를 타려니까 이것도 색다르다.
열차가 편하긴 해도 버스는 버스대로 아주 구석구석까지 다녀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눈높이도 낮고....그냥 버스를 타면 창밖으로 내다 보이는 모든 거리가 다 가까이 다가와서 좋다.
'어디....보자....출발시간이 언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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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공중전화기를 집어들고 긴 번호를 눌러 집으로 국제전화를 했는데 아무도 없다.
신호음만 울리고 아무런 대답이 없는 수화기.
'어디 가셨나......'
계속 신호음만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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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떠나기 전에 부모님이 걱정을 참 많이 하셨는데...
그냥 막무가내로 이렇게 떠나온게 조금 죄송스럽기도 하다.
자식은 늘 걱정거리라고 하지 않는가....하나 밖에 없는 아들 어디 잘못되기라도 할까봐 늘 걱정이시다.
뭐 전화라도 자주 드려야 조금이나마 걱정을 덜어 드릴 수 있는데....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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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가운데 출구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이 자리가 다리를 쭉 뻗을 수 있어서 편하더라고....
버스는 피렌체의 거리를 천천히 달린다.
비가 와서 촉촉히 가라앉은 거리...사람들과 길 모퉁이마저도 가까이 스쳐가고
아르노 강을 건너고 주택가를 누비던 버스는 얼마뒤 피렌체 외곽으로 빠져나와
고속도로인지 그냥 국도인지.....아무튼 한산한 도로 위를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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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는 우리나라와 풍경이 참 비슷한 것 같다.
알프스 이북의 유럽국가들과 달리 우리나라와 날씨가 비슷해서인지 나무와 풀들이 아주 낯익다.
잡목이 우거진 산들....도로가에 널려있는 수풀들....
마치 우리나라 남해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것 같은 기분이다.
부드럽게 흔들거리는 버스....
창 밖 풍경은 너무나 평화스럽다.
아직도 초록이 싱그러운 들판들이 끝없이 펼쳐져있다. 파랗게.....
.....
SIENA...
버스타는게 살짝 지루해질 쯤에 버스는 시에나로 들어섰다.
음....작은 마을을 생각했었는데 시에나도 꽤나 크다.
가끔 이탈리아 영화에서 볼 수있는 오래된 골목길이 있는 아주 작은 마을처럼
시에나도 그런 작은 동네인줄 알았는데 작은 스타디움도 있고...버스가 멈춰선 곳은 제법 붐빈다.
'호....이거 내가 이탈리아 도시들을 너무 작게만 생각했었나본데....'
버스에 내려 잠시 뻣뻣해진 다리를 풀어준뒤 지도를 펼쳐들고 천천히 방향을 잡아 본다.
오후에 다시 피렌체로 돌아가서 5시 40분 열차로 로마로 넘어가야 되니까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있다.
'뭐....적당히 점심이라도 해결하고 갈까...'
마침 점심때고 해서 뭐 맛있는게 있나 하고 이리저리 둘러봐도 마땅히 눈에 띄는 곳이 없다.
내 눈에는 레스토랑이며 카페같은게 안 보이는데...내가 못 찾는 건가?
...
그렇게 잠시 걷다보니 어이없게도 '맥도날드'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이런 곳에도 맥도날드가 있다니.....조금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이탈리아도 나름대로 미식가의 나라 아닌가....그런 이탈리아에 맥도날드라니....아무튼 조금 의외다.
유럽에 와서 패스트푸드 먹는 것만큼 재미없는 일도 없다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바...
런던에서 파리로 넘어올 때 워털루 역에서 버거킹 햄버거를 먹은 뒤 용케도 패스트푸드에는 입도 대지 않았다.
여행하면서 그곳 음식을 먹어 보는 것만큼 재밌는 일도 없잖은가.....햄버거라니....가당치도 않지....
..
그런데....
평소같으면 쳐다도 안 봤을테지만 어쩐지 오늘은 다른 곳을 찾아 헤매고 싶지 않다.
요즘에 오히려 현지 음식과 민박집에서 주는 푸짐한 한식에 너무 충실한 탓인지 평소 우리나라에서 먹던것보다 더 잘먹는 것같다.
그러니까 햄버거로 한 끼 때우는 게 그리 나쁘진 않은 듯 하다.....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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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여기도 세트메뉴를 시켜야 되나.....가격이.....'
대충 우리나라 맥도날드와 세트메뉴 종류가 비슷한 것 같은데 하나 눈에 띄는게 있다...
'Orientale'....오리엔탈레?....
사무라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걸로 봐서 일본풍의 세트메뉴인 듯하다.
음....우리나라에 없는 메뉴니까 저걸로 한 번 먹어볼까?
"본 조르노~ 오리엔탈레~"
"시~"
"니혼진 데스까?"
주문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종업원 하나가 반색을 하면서 일본말로 내게 말을 건다.
'오호....이 놈 봐라....일본어 좀 하네...'
일본어 공부 좀 한 것 같은 이 종업원....
내가 오리엔탈레를 주문하니까 의례 일본사람인 줄 알고 일본어로 대화 몇 마디 해 보고 싶었나보다....끌끌
허긴 우리도 지나가는 외국인은 다 미국인인줄 알고 "어메리칸?" 하고 영어로 묻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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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맥도날드가 감자튀김 하나는 참 맛있는 것같다.
학생들이 깔깔대며 떠드는 건 우리나라나 여기나 마찬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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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내가 시에나에 오게된 이유는 순전히 시에나의 좁고 오래된 골목길을 보기 위해서다.
늘 이런 이국적이고 고풍스런 골목길을 마음껏 걷고 싶어 했거든....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 사이로 미로처럼 얽힌 골목길과 계단들을 꼭 한 번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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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펴고 걷다가 그냥 책을 덮고 마음 내키는 곳으로 그냥 걸었다.
큰 길을 걷다가 불쑥 작은 골목 안으로도 들어가 보고....
다시 큰 길로 나와 사람들이랑 같이 걸으면서 가게 쇼윈도우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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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따라 걷다보면 다시 오르막도 나오고
가끔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기도 하고...
동네 아주머니랑 가까이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작은 교회 앞 마당이 나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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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여기저기를 걷다보면 숨은그림찾기처럼 뜻하지 않게 이런 재밌는 구경도 할 수 있다.
처음에 진짜 사람인 줄 알았다.....발상이 참 재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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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고 한산한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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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얗게 잘 빨린 시트가 바람에 나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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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포 광장
캄포광장...
좁은 골목길을 걷다가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발길이 향했다.
넓은 부채꼴 모양의 광장으로 시에나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첫인상이 아주 독특한 광장이다.
광장의 가장자리를 빙 둘러싼 오래된 건물들과 광장의 경사가 모아지는 정점에 우뚝 솟은 푸블리코 궁전...
뭐랄까 광장의 전경이 참 예쁘다고 해야 할까.....아주 남다른 시선처리를 필요로 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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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한 가운데 있는 분수대 '폰테 가이아'...
푸블리코 궁전 옆에 보면 로마의 건국신화인 늑대 젖을 먹는 로물로스와 레무스의 조각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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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꼴의 정점에 서서 광장을 빙 둘러다보면 건물들이 광장을 품안에 깊숙히 안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캄포 광장은 다른 광장과 달리 탁 트인 개방성보다는 아늑하고 속닥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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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던 아저씨에게 사진 한 컷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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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 콜라의 저주
어째 슬슬 다리가 꼬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문제가 생겼다.
갑자기 일이 순식간에 벌어지는 바람에 너무 당황스럽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봐도 내가 찾는 곳도 없다.
'으으....이런.....이런......'
발걸음이 빨라지고 어느덧 식은땀이 한 방울 맺힌 것같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아까 맥도날드에서 콜라 한 컵을 다 마신게 화근이었다.
'으으....마려워 죽겠다....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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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화장실 표시가 있어서 뛰어 갔더니 표시판을 따라 300m 더 가란다.
'뭐냐 300m 너무 멀잖아....이런....'
뛰지도 못하고 어그적 어그적 진땀 흘리며 화살표를 따라 걷는다.
'이놈의 300m 왜이리 긴거야....'
다리는 점점 더 꼬여오고....심장박동이 점점 더 빨라진다. 이런...
한참을 힘들 게 버티니 드디어 저기 화장실이 보인다......
'자....고지가 저 앞이다....조금만 더......'
이윽고 화장실 입구.....급한 마음에 막 뛰어 들어가려는 찰라
문이 안 돌아간다....떡 하니 문 앞에 붙어 있는 동전투입구. 0.50유로 란다.
'이게 뭐야 또 유료냐....으으 나 좀 살려줘...'
오늘따라 동전지갑에 0.50유로짜리 동전이 왜이렇게 안 보이는지....
조금만.....
조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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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대는 아는가......
마려운 세상과 마렵지 않은 세상의 차이를....
마렵지 않은 세상은 너무나 행복한 세상이다....음헤헤
여행하면서 오늘처럼 진땀빼긴 처음인 것같다.
콜라 하나가 이렇게 사람 당황하게 할 줄이야.....너무 방심했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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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화장실 앞에서 바라본 풍경이 더 없이 평화롭다.....후후....
풍경이 평화로운건지 내 마음이 평화로운건지...
참 우습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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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골목을 걷다....
다시 홀가분한 기분으로 캄포 광장에 들렀다.
아까 못다 느낀 정취에 흠뻑 적셔보고 싶어서 말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바닥에 비스듬히 기대어 한껏 여유를 부려본다.
지나가던 비둘기에게 발로 깔짝깔짝 장난도 쳐 보고....
이렇게 바닥에 주저앉아 누군가와 한없이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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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바닥에 드러누워 팔베개를 하고 잠깐 낮잠을 잤으면 좋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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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여기 앉아 마냥 뒹굴거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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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나에도 두오모가 있네...시에나 대성당...
온통 붉은 벽돌색인 시에나의 풍경 안에서 새하얀 대성당이 아주 두드러진다.
한 번 올라가볼까 싶지만....
내 기억속에 두오모는 피렌체 쿠폴라 하나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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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조금 모여들더니 이윽고 빗방울이 조금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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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밑으로 계단을 따라 내려와 우산을 받쳐들고 다시 골목길을 누빈다.
우산을 미쳐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총총히 모퉁이를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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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다리 밑으로 바라다 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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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을 누비며 작은 자동차도 지나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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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나의 조용한 풍경이 바라보인다.
산 도메니코 성당의 모습도 보이고....
창밖에 널린 빨래가 참 정겨운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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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골목길에 붙어있는 빨간 우체통...
우체통을 보니까 문득....그냥 누군가에게 엽서 한 장 보내고 싶어진다.
'여기 이탈리아 시에나야.....난 잘 있고......잘 지내....'
그냥 아무에게나 짧은 소식 한 줄이라도 적어서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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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이 부스스 흩날리니 골목길이 물기를 머금어 더 매끈해진다.
비도 오고....이제 슬슬 돌아갈 시간이 된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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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이 제법 굵어져 바지 끝단이 질퍽하게 젖어든다.
다시 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산 도메니코 성당에서 바라본 비에 젖은 시에나의 풍경...
여기 서있으니까 하얀 대성당이랑 멀리 캄포 광장의 푸블리코 궁전이 한 눈에 다 들어온다....
음....
오늘 정말 소원대로 이쁜 골목길은 실컷 누비고 다닌 것 같다.
피사에 들를까 시에나에 올까 많이 고민했는데 여기 오길 참 잘 했나보다....씨익
.......
.......
시에나에 처음 도착했던 그 곳에서 다시 피렌체행 버스에 올랐다.
돌아오는 버스 안은 왠지 좀 기분이 가라 앉는다.
떠남이란 늘 이런 것이다.
이제는 익숙해질만도 하련만....떠난다는 것은 늘 아쉽고 무겁다.
남는 것은 기억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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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여전히 차창을 살짝 살짝 긁고 지나가고....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을 주체할 수 없어 결국...
결국....
스르르 잠이들고....
침까지 흘리며 자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벌써 버스가 피렌체 시내로 접어들고 있었다.
....
....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민박집에서 배낭을 챙겨들고 아주머니와 아저씨께 작별 인사를 드린 뒤 지체없이 역으로 향했다.
역까지 걸어가는데 오늘따라 왜이리 배낭이 무거운건지....
역에 도착해 열차 시간을 확인해보니까...30분 정도 여유가 있다.
...
역시나 점심으로 햄버거 하나 먹으면 배가 금방 고파진다.
아무래도 열차를 타면 로마까지 두 시간동안 저녁을 굶게 될 것같은데....
간단히 뭐 좀 먹고 탈까나....
마땅히 뭐 먹을 게 있나 하고 이리저리 살피니까
대합실 안에 있는 카페테리아.....여기가 마음에 든다.
열차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을 위해서 간단한 마실거리와 빵을 파는 곳인데
사람들이 모두 긴 테이블에 종업원들과 마주 서서 음식을 먹고 있다.
금방 이사람이 먹고 나가고 또 저사람이 먹고 나가고 또 다른 사람이 주문을 하고....아주 분주하다.
가만 보니까 계산대에서 계산 먼저 하고 그 영수증을 테이블에 갖다 주면 음식을 내주는 것 같은데...
음료수 한 잔이랑 페스트리 빵 한 조각, 디저트까지 2.50유로...
영수증을 받아 웨이트리스에게 건낸다.
"음료수는 뭘로 드릴까요?"
"우나 카페~"
작은 컵에 담겨 나온 커피....
양이 아주 적어서 두 모금 꼴딱 꼴딱 마시면 다 없어질 것같다.
옆에 아저씨가 커피에다가 우유랑 설탕을 듬뿍 뿌리길래 나도 우유랑 설탕 듬뿍 뿌리고 마셨다.
음....향이 아주 좋다....그런데 양이 정말 적다. 진짜 두 모금 마시니까 잔이 비네....
고소한 페스트리 빵을 먹고 디저트는 토마토 주스.
"컵에 따라 드릴까요?"
"네, 고마워요..."
토마토 주스를 입안 가득 머금고 시계를 보니 열차시간까지 15분이 남았다.
'슬슬 가 볼까...'
....
....
....
지금 30분째 플랫폼과 전광판만 번갈아 바라보고 서 있다.
내가 성격이 급한 편은 아니지만 이건 좀 너무 한게 아닌가 싶다.
열차가 연착이라니....예정시간 보다 15분이 지났다.
이탈리아 열차가 연착이 허다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정말 이정도인 줄은 몰랐다. 참나....
언제 들어올거라는 표시도 없고.....
로마행 뿐만 아니라 그 앞에 편성된 열차가 줄줄이 다 연착이다.
이렇게 연착이 많은데 어떻게 열차시스템이 별 탈 없이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마땅히 앉을 곳도 없고...
할 수 없이 플랫폼에 멀뚱히 서서 열차 들어 오기만을 기다린다.
나를 포함한 몇몇 외국인들의 얼굴에서는 아주 짜증스러운 표정도 엿보였지만
뭐 대부분의 이곳 사람들은 그저 그러려니 하는 표정이다.
이 양반들 천성하나는 좋네...
....
한참이 지나서야 전광판에 연착표시가 뜨고 출발 예정시간이 35분 늦춰졌다는 표시도 나온다.
어지간히도 밀렸다...
....
그렇게 플랫폼에 서서 지나가는 이탈리아 아가씨들을 구경이나하며 30분을 더 기다리니까
그제서야 허름한 로마행 열차가 힘겹게 플랫폼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어찌 생각하면 참 이해가 안되는 상황이지만 '이탈리아'라면 이 모든게 설명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왠지 다른 유럽국가들처럼 치밀하고 정확하지 않은 이 허점들이
이탈리아만의 매력이라 생각하면 너그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여기는 이탈리아란 말이지.....후후
낡은 열차칸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해지는 피렌체를 바라보며 이제 정말 로마로 향한다.
내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로 향하고 있는 거다. 벌써....
여행의 끝이 다가오니까 그동안 지나간 많은 일들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런던과 파리에서 머물렀던 일은 벌써 아주 오래전 일이된 것같고..
그동안 만난 많은 사람들의 얼굴도 이제 기억속에 푹 잠겨 버린 것만 같다.
센강 유람선 위에서 만난 사람들...프라하에서 정든 사람들...
베네치아행 야간열차 안에서 만났던 오스트리아 학생들과 스페인 아가씨...
베네치아의 달빛 아래에서 포도주를 나눠 마시던 형들과 누나...
아.....벌써 그립다....한명씩 사진이라도 다 찍어둘걸 그랬다.
아직 여행이 끝난 것도 아닌데...
마지막 입성지인 로마로 향하는 열차라 그런지 왠지 가슴이 짠해져 온다....
'아직 로마가 남아 있잖아....벌써 아쉬워 하기는 이른거 알지?'
괜히 너무 감상에 젖어 버린 것같아 이렇게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로마에서의 멋진 휴일을 계획해 보지만
흔들리는 차창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쉽사리 가라앉은 감정을 살릴 수가 없다.
'그래....아직 아쉬워하긴 이르지....'
...
....
어둠을 뚫고 열차는 지체없이 달렸고...
두 시간 뒤...
어둠이 내려앉은 로마....
로마는 그렇게 어둠이 깔린 첫인상으로 내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