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0.26 火
어제밤 상당히 찜찜한 사태가 발생했었다.
....
어제 아침 일찍 베네치아에서 피렌체로 넘어올 때 열차시간에 쫓겨 허둥지둥 서두르다가
비누, 칫솔, 치약, 샴푸, 일회용 면도기가 들어있는 작은 주머니를 빠뜨리고 온걸 알아차렸거든...
씻고 자려는데 아무리 찾아도 안보이더라고...
어쩐지 베네치아 숙소에서 나올 때 뭔가 허전하다 했다.
'크....거기 빈에서 산 왁스도 들어있는데....한 번도 안 썼는데....'
어제 저녁에 양치질을 못했더니 입안이 영 텁텁하다.
여기 가까운 편의점이 어디더라..
..
피렌체의 미로
7시에 대충 아침을 챙겨먹고 '우피치 미술관'으로 향했다.
미술관 입장하는데 예약을 해야 될줄은 몰랐는데, 우피치는 예약 안 하고 가면 아침 일찍부터 줄서서 순서대로 들어가야 한다네...
"그기 아침 일찍 안 가면 한참 기다려야돼....가는 길 알지? 지금 아침 차려줄테니까 얼른 먹고 가"
"가는 길 아니?"
"뭐 대충 가면 되겠죠머...어제 그 근처까지 가봤어요"
민박집 아주머니의 재촉에 민박집에 있던 다른 누나 2명이랑 우피치 미술관으로 향했다.
길을 뭐 정확히 알아야 할 필요있나...대충 방향만 맞으면 되는거지...
....
그렇게 이른 시간이 아닌데 거리는 한산하다.
'여기는 출근시간 러시아워 그런 것도 없나....'
바람이 선선하니 잠이 확 깬다.
역으로 가는 갈림길에 도착했다.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 역으로 가서 산 로렌초광장을 거쳐 두오모를 지나가면 베키오 궁으로 갈 수 있다.
근데 방향을 보아하니 역으로 가지 말고 이 왼쪽 골목으로 쭉 가면 대충 베키오 궁과 이어져 있을 것 같다.
'역으로 갔다가 가려면 좀 둘러가는 거니까.....음 이 골목으로 쭉 가면 대충 나오겠는데...'
"누나들, 우리 이쪽으로 갈까요?"
"우리는 길 몰라...너만 따라 갈게..."
"이길이 맞는거야?"
"이 방향이 맞아요..!!"
포부도 당당히, 발걸음도 가볍게 이른 아침 피렌체 골목의 정취를 느끼며 그렇게 베키오 궁으로 향했다.
...
그런데...
포부도 당당히 앞장서서 걷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거 좀 이상하다.
...
한 20분을 걸어온 것 같은데 계속 주택가 골목만 나온다.
'이상한데....이쯤 걸어오면 두오모 꼭대기라도 보여야 하는데....'
베키오 궁은 고사하고 두오모 조차 안 보인다.
계속 걸어도 거기가 거기같은 골목들만 쭉 이어져 있다.
"아직 멀었니?"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이 길이 맞긴 맞는거야?"
"예....아마 다 왔을 거에요...."
"길은 확실히 아는거지?"
"에....헤헤..."
아.....당황스럽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들어선 것같다.
사방을 둘러보니 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건물들 뿐이라 동서남북이 어딘지 영 헷갈린다.
누나들의 얼굴엔 점점 초조함의 기운이 역력해지고, 나 또한 입술이 약간 말라온다.
방향을 꺾어서 다시 한 5분쯤 걸어갔는데도 도무지 갈피를 못잡겠다.
'핫, 여기가 아닌가벼...큰일났다'
사태의 전말을 걱정스럽게 주시하던 누나가 내 얼굴에 드러난 당황스런 표정을 읽었는지 드디어 문제 해결에 나섰다.
"우리 저 아가씨에게 물어보자"
"네, 그게 좋겠어요~"
차마 여기가 아닌것같다는 말은 못하고 진땀만 빼던 나는 쌍수를 들고 누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지나가던 아가씨의 도움으로 우리는 다시 방향을 잡고 미술관으로 향했다.
알고보니 우리는 우피치 미술관을 한참이나 지나쳐왔던 것이다.
'이런....'
...
이번에는 누나들이 앞장서고 나는 졸졸 따라가기만 했다.
그 복잡하다던 베네치아의 골목길에서도 길 한 번 안 잃어 버리고 잘 찾아다녔는데
이렇게 피렌체에 와서 고전할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유럽에와서 이렇게 헤매기는 처음이지 싶다.
'으으....어디가서 길 안다고 나서지 말아야겠다...'
줄서기...
나의 불찰로 예상보다 30분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이미 먼저온 사람들로 줄이 길 게 늘어서있다.
조금만 일찍왔었어도 저 앞에서 기다리는건데.....아깝네...
어찌됐건 이제부터는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누나 그러니까 그게 말이죠, 우리가 처음 가던 그길이 방향은 맞는거에요....."
"그래 그래 알았어..."
"나는 모르겠는걸 그냥 너희들 따라만 왔어....왔으니까 된거아냐?"
두 누나들을 상대로 나는 애써 나의 실수를 합리화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뭐 다들 별 상관없다는 반응이다.
사태가 이정도에서 진화된게 천만다행일세....후후
....
기다리던 줄이 절반만큼 줄어드는데 한시간 반이 걸렸다.
파리 루브르에서도 이렇게 줄서서 기다리지는 않았는데.....여기가 대단하긴 대단한 미술관인가보다.
르네상스의 본고장인만큼 르네상스 회화의 총체를 볼 수 있는곳이니 당연한건지도....
중간중간 교대로 한명씩 줄을 세우고,
서로서로 다시 한 번 르네상스 회화에 대한 기억을 열심히 일깨워주면서 지루함을 달랬다.
그러고보니 미술관은 파리 이후로 참 오랜만에 와본다.
베네치아에서 아카데미아를 못본게 지금 조금 아쉽단말이야...
오랜만에 보는 미술관이니 만큼 재밌게 보고 나와야지....
이럴줄 알았으면 미술사책이라도 가져올걸 그랬나.
머리속에 담겨있던 얼마되지 않는 '우피치 미술관' 부분을 다시 펼쳐들고서 열심히 다시 각인시킨다.
다시 줄이 조금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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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ffizi Gallery
무려 장장 3시간을 기다린 끝에 겨우 미술관 내부로 진입했다.
9.50유로....역시나 그렇게 저럼하지 않은 요금을 지급하고서야 르네상스 회화들과의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르네상스...'
우리는 르네상스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중세 종교의 억압속에서 짓눌린 인간의 감성이 다시 활짝 꽃피운 시기라는 정도....아니면 그 이상...
인간 감성과 지성의 등불로서 암흑의 중세를 종결시킨 르네상스의 파장은 유럽사에서 차지하는 그 비중이 지대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고보면 이곳 이탈리아 사람들 참 대단하다.
로마제국시대에서부터 바티칸 로마 교황청, 그리고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유럽인들에게 미친 영향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아무튼 르네상스의 본고장에 와서 르네상스 시대의 귀한 작품을 만나는 기회를 가지게 된건 참 기대되는 일이다.
르네상스....과거 화려했던 피렌체 대공국의 시대로 거슬러 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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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그림들은 우피치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이다.)
Annunciation, Botticelli
Annunciation, Da vinci
'Annunciation'....'수태고지'
크리스찬이 아니라든지 성경을 접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우리에게 '수태고지'라고 알려진 이 그림의 제목을 보고 단번에 그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고지?.....고지가 바로 저기다 할 때 그 고지?'
내가 생각하기에 '수태고지'....그러니까 한자로 '受胎告知'라는 이 제목은 그리 썩 잘 지어진 이름같지는 않다.
차라리 '마리아에게 예수의 회임을 알리는 천사 가브리엘'이라고 했으면 더 명확하지 않은가.
한글로 풀어쓰면 제목이 길어지니까 한자로 짧게 줄여놓은 것 같은데, 괜히 그렇게 딱딱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는지...
아무튼..
책에서 이 그림을 두고 '수태고지'라고 언급했던게 기억나 괜히 딴 생각을 해 봤다.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동정녀로서 그리스도의 회임을 알리는 성경의 내용으로
그만큼 종교적으로 아주 의미 있는 장면이기도 하고....
......
Birth of Venus, 1485. Botticelli
보티첼리의 역작으로 우리에게 아주 잘 알려진 '비너스의 탄생'...
비너스의 탄생 직후의 장면을 표현한 그림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크로노스가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해 그 남근을 바다에 버리자 바다 거품이 모여들었는데,
키프로스 섬 근해의 그 바다거품 속에서 비너스가 탄생했다고 전해진다.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비너스를 해안으로 밀어주고 있고, 계절의 여신 호라이가 외투로 비너스를 감싸안으려는 모습이다.
비너스를 주제로 한 그림이 워낙에 많지만 비너스가 조개 껍질 위에 수줍게 서 있는 이 그림처럼 비너스의 순수함을 나타낸 그림은 드문 것 같다.
가끔 사우나 벽이나 비싼 욕실제품 겉면에 장식되는 그림이기도 하지.....후후
Primavera, 1476. Botticelli
보티첼리의 또 다른 역작 '프리마베라'.
봄을 뜻하는 프리마베라....
화면 가운데 비너스를 중심으로 제일 왼쪽에 신들의 사자인 헤르메스, 그 옆에 하늘 하늘 속이 비치는 옷을 걸친 미의 여신들이 있다.
오른쪽에는 꽃으로 몸을 장식한 봄의 여신이 서 있고, 그 옆에 꽃의 여신이 바람의 신에 떠밀리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많은 그림들이 대부분 템페라화라서 그런지...
이렇게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그림들이 참 은은하다. 수채화도 아닌 것이 유화도 아닌 것이....참 묘하다.
아무튼 유화보다는 훨씬 부드럽고 신비스러운 느낌을 갖는 것이 템페라화인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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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urn of Judith, Botticelli The Discovery of the Body of Holophernes, Botticelli
'유디트'.....이 역시 참 유명한 소재다.
아시리아의 군주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해 잠자리를 같이한 뒤 그의 목을 베어 버린 유디트.
적장의 목을 베어 이스라엘 민족을 구해낸 구약성서의 유디트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이미 런던 내셔날 갤러리나 파리에서도 몇몇 유디트 작품을 봤었다.
빈에서 클림트의 유디트를 안타깝게 못봤었지만 말이다.
뭐랄까....어찌보면 참 잔인하고 섬뜩하기도 한 유디트의 행동이 의미하는 여러 가지 다양성...
애국심....정조....욕망....
이런 극적인 부분들이 사람들에게 오묘한 쾌감과 자극을 주는 것 같다.
Salome with the Baptist's Head, Alonso Berruguete
갤러리를 걷다보면 유디트와 아주 흡사한 그림을 발견할 수 있다.
한 여인이 역시나 한 남자의 잘려진 머리를 들고 있는 다소 섬찟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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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그림은 '유디트'가 아니다.
서양화에서 잘려진 남자의 머리가 나오는 그림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유디트'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살로메' 이야기이다.
'살로메'....이 이야기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살로메는 헤롯왕의 형인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의 딸이다. 하지만 필립보가 죽은 뒤 헤로디아는 헤롯왕과 결혼해버린다.
이를 두고 세례자 요한(John the Baptist)이 두 사람을 비난하는데, 어느날 헤롯왕의 생일날 살로메가 춤을 추자
기분이 좋아진 헤롯왕이 살로메에게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주겠다."라고 약속을 한다.
이에 미리 헤로디아의 사주를 받은 살로메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달라고 말해 그의 목을 얻게 되는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이 그림에 있는 저 남자의 머리는 바로 세례자 요한의 목인 것이다.
역시나 참 비극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림이지만 유디트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니는 작품이다.
'살로메'는 '유디트'와 달리 인간의 어리석음과 그로 인한 안타까운 희생을 말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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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문화를 접할 때는 이렇듯 회화 하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참 중요한 것같다.
단순히 종교를 넘어선 역사의 기록으로서 기독교를 한 번 대해보는 것도 서양 문명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것같다.
Madonna of the Goldfinch,Raphael
라파엘로의 '검은 방울새의 성모'....
아주 유명한 그림이지...
Portrait of Lady, Jean Perr?l
단아한 르네상스 시대의 한 여인....
어느 부자집 아가씨였을까? 아니면 귀족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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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usa, Caravaggio
카라바조의 섬뜩한 메두사 그림.
섬찟한데.....훗
Bacchus, Caravaggio
다소 느끼한 미소를 띄우고 있는 이 꽃미남 청년은 술의 신 '바쿠스'.
카라바조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터라 눈에 익었다.
바로크 미술의 대명사이자 후에 렘브란트에게 영향을 준 카라바조의 그림은
역시나 보티첼리와 같은 이전의 르네상스 화가들의 그림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을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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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전시실까지 다 둘러보고 회랑에 나와 창밖을 바라보니
피렌체의 오래된 지붕과 저만치 가까이에 아르노강과 베키오 다리가 내다 보인다.
음....
루브르의 방대함에 혀를 내둘렀던 탓인지 우피치는 그렇게 큰 것 같지가 않다.
3시간 동안 줄서서 기다린 것치고는 조금 허무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은 그림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나의 안목 때문일거라고 확신한다.
인류 문화사의 큰 변혁기인 르네상스의 유물들을 직접만나본 것으로 3시간의 기다림은 충분히 보상받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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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껏 3시간을 기다렸지만 이 그림들은 나를 위해 500여년을 기다려주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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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도시....
미술관에서 나와 시뇨리아 광장에 섰다.
날씨가 어제보다는 훨씬 맑아서 그런지 비록 복제품이긴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거대한 '다비드 상'이
내려다 보고 있는 시뇨리아 광장 여기저기 참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두오모의 끄트머리가 뾰족하게 바라다 보인다.
'두오모에 오늘 올라갔더라면 전망이 더 좋았을뻔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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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키오 다리를 배경으로 스케치에 열중하고 있는 여학생들....
다들 참 이쁘게도 생겼네....후후....
이렇게 운치있는 도시에서 미술공부를 하면 저절로 좋은 작품이 나올 것만 같다. 안 그럴까?
한때는 나도 미술공부를 하면 어떻까하고 혼자 생각했던적도 있었는데...
음....글쎄....지금도....이젤을 펼쳐놓고 슥슥 연필로 스케치하는 미술전공자들을 보면 참 부럽기도하다.
아르노강과 베키오 다리의 운치있는 배경속에 아름다운 사람들이 또 하나의 그림이 된다.
....
...
보석들로 번쩍이던 저녁의 베키오 다리보다는
조용히 아르노 강을 내려다 보는 한낮의 베키오 다리가 더 보기 좋은 것같다.
오고가는 많은 사람들....
...
아르노강을 따라 걷다가 다시 두오모 광장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배가 고파 들린 두오모 광장 근처의 자그마한 샌드위치 가게....
뭘 먹을까 이리저리 둘러봤는데 뭐 마땅히 먹을만한게 없어서 그냥 제일 싼 걸로 주문했다.
2.6유로짜리 작은 샌드위치.....
특이하게 샌드위치 안에 가지가 들어있다. 희안하네....
빵이 좀 딱딱해도 뭐 그런대로 먹을만 하다.
.....
.....
"이 길로 쭉 가면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다는데요..."
"그래? 그럼 우리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러 가자"
배도 대충 채웠겠다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이나 먹어볼까 하고
론리 플래닛에서 잘라온 피렌체 지도를 펼쳐들고서 천천히 골목길을 거닐었다.
"흠....여기 어디인 것같은데... "
"너 또 길 못 찾는거 아니니?"
"에이 아침 일은 잊어요~"
"호홋~"
참...길이 어렵단 말이야..
아무튼
피렌체의 골목길도 그러고보니 참 이쁘다.
르네상스의 발원지답게 곳곳에서 오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이탈리아 특유의 활기 속에 함께있는 세월의 무게...
난 이런 곳이 좋더라....
....
....
아이스크림 가게를 찾아 헤매다보니 갑자기 넓은 광장에 이르렀다.
어라 여기가 어디지?
뒤적뒤적.....
아이스크림을 찾다가 본의 아니게 들어선 이곳은 산타크로체 광장..
저기 눈앞에 보이는 공사중인 성당이 산타크로체 성당이다.
좁은 골목길 끝에 이렇게 확트인 광장이 있을 줄이야...
광장 크기도 적당히 넓고 아늑하게 자리잡은 것이 그렇게 복잡하지도 않아 참 좋다.
...
"우리 저 성당에 들어가 보자"
"아마 돈 내야 될걸요....성당은 이제 별로..."
"얘는 성당이 무슨 돈을 받어..."
"허이구 참 돈 받는다니까요..."
"내기 할래?"
"좋아요....음....진 사람이 아이스크림 쏘기!"
"좋아! 내가 가서 보고 올게"
글쎄... 나도 왜 이렇게 자신있게 내기를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왠지 저 성당 안에 들어가려면 돈을 내야 할 것만 같았다. 여행 중에 쌓인 직감이라고나 할까....
얼마뒤....성당 앞으로 신나게 뛰어간 누나가 멋쩍게 서서 웃고 있다.
"거 봐요....돈 낸다니까...."
"어우....성당 보는데 무슨 돈을 받어..."
발걸음을 돌려 다시 광장을 가로지른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비둘기를 쫓는 예쁜 꼬마아이가 광장의 평온함을 더해주고 있다.
.....
"우리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야죠? 헤헤"
"그래 그래 알았어~"
광장을 벗어나 다시 오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아까 지나친 작은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분명히 이 근처가 맞는데....도무지 아이스크림 가게를 찾을 수가 없다.
'가게가 없어졌나...?'
....
한참을 헤매다 거의 포기하고 돌아 설 찰나....
아까 우리가 지나쳤던 골목 한 가운데에 자그마한 네온 간판을 내건 아이스크림 가게를 발견했다.
보기에 그냥 허름하고 규모도 작아서 아까 지나칠 때 이곳이 아이스크림 가게인지 몰랐나보다.
'이야 이런데 이렇게 숨어있다니....'
허름한 나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생각보다 내부는 아주 고풍스럽고 널찍하다.
손님이 꽤나 많은걸 보니 유명하긴 유명한 곳인 가보다.
은은한 조명아래 진열장 안에는 색색의 아이스크림들이 윤기있게 빛나고 있다.
'저건 딸기같고....저건 바나나....저건 바닐라.....어라 저것도 흰색이네....'
보기만 해도 시원하고 향긋한 아이스크림들이 정말 다양하다.
뭘 먹지? 다 먹어보고 싶은데...
이탈리아의 아이스크림 '젤라또'는 맛있기로 유명하다.
아이스크림의 원산지가 이탈리아라고 하는 사람도 있던데....
아무튼 이탈리아의 아이스크림은 그 역사가 오래된 만큼 공장에서 만들어낸 다른 아이스크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대대로 자신들만의 비법으로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곳이 많기 때문에 가게마다 아이스크림 맛도 틀리고
정말 다른 곳에서는 느껴보지 못하는 그런 상큼한 맛을 갖고 있는 것같다.
아마 한 번 먹어보면 자꾸 먹고 싶어질껄.....후후
...
"리소로 주세요..."
얼핏 이탈리아에 가면 '리소' 아이스크림을 먹어 보라던 사람의 글이 떠올라 새하얀 리소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리소....Riso....Rice....그러니까 쌀로 만든 아이스크림이다.
부드러운 쌀알이 조금 씹히는게 맛이 아주 담백하고 깔끔하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아주 좋아할 듯...
"어우 맛있다야..."
"그죠....공짜라서 더 맛있네요..."
"이게~!!"
지오토의 종탑...
아이스크림을 홀짝거리며 다시 걸어간 곳은 두오모 광장.
여전히 쿠폴라는 가슴설레게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다.
광장을 서성거리며 잠시 시간을 보낸다.
...
누나는 오늘 처음으로 쿠폴라에 올라갈거란다.
'두오모...쿠폴라....후아....나도 또 올라가고 싶다...'
"같이 올라 가자~"
"아니에요....전 됐어요..."
하지만 하루만에 또 다시 쿠폴라에 오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쿠폴라에서의 기억과 상념은 거기 그렇게 오랫동안 그대로 놔 뒀으면 해서 말이다....
오늘 또 올라가면 왠지 어제의 기억이 그만큼 퇴색해 버릴 것만 같다.
그래도 솔직히 피렌체의 하늘이 몹시도 그립다.
오늘도 그 아름다운 하늘과 지붕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참 좋겠는데....
어떻하지....어떻게 해야 하나....
.....
.....
나름대로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국 내 발걸음은 지오토의 종탑으로 향했다.
어제의 약속과 현재의 희망 사이에 절묘한 절충안을 찾은 셈이다.
피렌체 하늘에 대한 두 가지 기억을 가지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은 일 아닌가?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게 굳이 합리화시킬정도로 피렌체의 하늘이 그리웠던 거다.
쿠폴라와 대각선으로 마주보고 수직으로 솟아 있는 지오토의 종탑....
오늘은 또 다른 공간에서 피렌체의 하늘과 만나보고 싶다.
....
입구에서 6유로 티켓을 사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계단을 하나하나 밟을 때마다 내 시야는 급격히 높아진다.
거의 수직상승을 하고 있는 지오토 종탑의 좁고 경사진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서
지상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자유로움과 함께 하늘을 나는 듯한 아찔함을 함께 느끼고 있다.
쿠폴라와 달리 종탑은 구조적으로 아주 개방적이기 때문에
뻥 뚫린 사방으로 내려다 보이는 풍경이 제법 아찔하다.
종탑 한 가운데 뻥 뚫린 부분을 가려놓은 창살....
창살 사이로 아래층이 까마득하게 내려다 보인다.
철근 콘크리트도 아니고 대리석으로 어떻게 이렇게 고공건축물을 지을 수 있는지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금방이라도 옆으로 스르륵 기울어져 버릴 것만 같아 머리가 조금 곤두서는데.....
아무리 태연한척 하려해도 긴장을 전혀 안 할 수가 없다.
몇백년이 지난 석조건물에 이렇게 높이 올라가도 아무 문제가 없을지....좀 불안하긴 하다.
쿠폴라에 오를 때는 그래도 아주 천천히 차분한 마음가짐이었는데
종탑의 모든 것은 구조적으로 아주 긴장감있고 극적이라 상승감이 아주 극도에 다다른다.
계단을 그렇게 많이 밟고 올라온 것같지는 않은데
어느덧 쿠폴라가 바로 눈앞에 마주 서 있고...
곧 마지막 층에 다다르게 될 것같다.
'저 위에는 또 어떤 하늘이 펼쳐질까....'
....
시원한 바람이 잠시 내 얼굴을 감싸쥐는 동안
살짝 눈을 감았다 다시 뜨면 아름다운 피렌체의 전경이 눈 아래에 펼쳐진다.
'후아....'
....
....
....
....
용기를 내어 고개를 살며시 내밀어보니 저 아래 까마득히 두오모 광장과 세례당 지붕이 내려다 보인다.
으으....진짜 높네....
종탑이 쿠폴라 보다 낮음에도 불구하고 몸으로 느끼기에는 이곳이 저기 쿠폴라 위 보다 훨씬 더 높은 것같다.
주변의 낮은 기준에서 유난히 혼자 불안하게 우뚝 솟은 종탑의 정점에 서 있으니 이거 정말 아찔하다.
완전 수직 구조라 아래가 내려다 보이지 않으니 더 그렇고....
좁은 통로 안쪽으로 등을 대고 바짝 붙어서 살금살금 옆으로 게걸음을 친다.
....
구름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
....
이렇게 같은 눈높이에서 쿠폴라를 바라보는 것도 참 색다르다.
여기서 보니까 피렌체를 배경으로 한 쿠폴라가 더 예뻐 보이네...
어제보다 좀 더 깨끗한 피렌체의 하늘을 만난 것같아 기분이 좋다.
어제의 하늘은 어제의 하늘대로....그리고 오늘은 오늘의 하늘대로 다 아름답다.
우뚝 솟은 쿠폴라와 피렌체의 지붕들...
....
오늘도 여전히 쿠폴라 위에는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이 모여있다.
저 사람들도 나처럼 피렌체의 이 하늘을 가슴속에 오래오래 담아 두겠지...
꽃의 도시 플로렌스....
그 이름만큼이나 화사한 하늘을 가진 피렌체...
마지막으로 이 하늘을 떠나보내기 전에 역시나 아쉬운 마음에 한참동안 물끄러미 하늘만 바라다 본다.
'이 하늘을 나는 절대 잊지 못할거다....'
미켈란젤로 언덕
베네치아로 떠나는 누나를 역까지 바래다 주고서
버스를 타고 피렌체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미켈란젤로 언덕으로 향했다.
의외로 피렌체 야경이 멋있다는 민박집 아주머니의 귀뜸을 들은게 있거든...
버스는 시가지를 빙 둘러 아르노강을 지나 언덕길을 달려 올라갔다.
하지만 미켈란젤로 언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뒤...
아쉽게도 피렌체의 석양은 또 놓치고 말았다. 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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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공기가 참 시원하다...
야경이 내려다 보이는 난간에 기대어 누나가 작별선물로 건내준 오렌지를 까먹으며 피렌체의 야경을 바라본다.
뭐 휘황찬란한 야경은 아니지만 은은한 조명이 빛나는 피렌체의 야경은 나름대로 볼 만한 것같다.
아르노강을 따라 쭉 이어진 가로등 불빛에 베키오 궁과 두오모도 어렴풋이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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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이렇게 여행자의 여유를 마음껏 누려볼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행복한일이지....
피렌체는 참 나랑 잘 맞는 도시인 것같다.
왠지모르게 끌리고 왠지모르게 모든게 다 사랑스럽다.
오래된 골목도 좋고....아리따운 피렌체의 아가씨들도 좋고....
상큼한 아이스크림도 좋고....여기서 만난 많은 사람들도 좋다.
다 좋은데....
무엇보다도 쿠폴라 위에서 내려다본 아름다운 피렌체의 하늘이 좋다.
그 파란 하늘과 적주황색의 지붕들.....정말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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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멋진 도시를 또 떠나야 하는게 못내 아쉽지만,
오늘밤이 피렌체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 될 것같다.
내일은 시에나에 갔다와서 로마로 넘어 가야한다....로마로....
이제 슬슬 내 여행도 끝이 보이는 것같다. 여기까지 참 많은 곳을 돌아 왔네....후후
자~ 떠나기 전에 피렌체의 야경이나 가슴 속에 실컷 담아두고 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