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산에 오르기...
너무 답답했다.
...
어느덧 방학한지도 거의 한 달이 지나가는데 흘러가는 시간들을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는 것 같다.
복학하고 그렇게 기다리던 방학이었건만...
뭔가 멋진 계획을 만들어보려하는데 영 쉽지가 않다.
마음같아서는 또 다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유유자적 미지의 세계를 방황하고 싶지만
이제는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것만 같다. 당분간은.....
일요일 아침이기도 하고....원래부터 한산한 6호선이라 전동차에 사람이 없다.
텅빈 객차 안....
개통된지 이제 3년을 꽉 채워가는 6호선이지만 아직도 전동차에서는 '새 것' 냄새가 나는 것 같다.
1학년때 학교 앞에서는 한창 지하철 공사중이라 도로가 어수선했었는데
그때는 내심 우리 학교에 지하철역이 없다는게 불만이었지.....
'왠만한 대학교에는 다 있는 지하철역이 왜 우리학교에는 없는거야...'
6호선이 개통되고 처음 탔을 때 그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덕분에 확실히 활동 영역이 넓어지긴 했지....후후
바글거리는 서울 틈바구니에서도 이런 공허함이 존재한다는건 사막에 오아시스가 있는 것과 같은 이유일 거다.
....
....
석계역....1호선과 6호선이 만나는 곳....
여기도 환승구역이 꽤나 긴 곳이다.
컨베이어밸트처럼 생긴 '수평 에스컬레이터'....그러고보니 이 걸 뭐라 불러야 되는지 모르겠네....
아무튼 거기에 발을 딛고서 무협지에 나오는 축지법을 쓴것처럼 사람들 옆을 휙하는 지나친다.
석계역에서 도봉산가는 1호선 열차를 기다리는 중.
의정부행 열차가 꽤나 늦다....
석계역 위쪽은 내게 낯선 곳이다.
아무래도 의정부쪽으로는 갈 일이 별로 없어서 말이지.
다음에 의정부까지 한 번 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의정부에 뭐 볼 게 있을지 모르겠다.
...
휴일을 맞아 산행을 온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띈다.
배낭 메고 등산화 신은 어르신들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계신다.
"도봉산 가는가?"
"예..."
"어느쪽으로 가?"
"망월사 쪽으로 갈겁니다..."
"응 그래...나랑 같이 내리면 되겠네....처음 가는갑네..."
"예, 친구들이랑 그냥 바람 좀 쐴겸해서요..."
"아 거 좋지....산이 아주 좋아..."
옆에 앉은 어르신 말벗을 해 드리는사이에 열차는 도봉산역을 지난다.
보통 도봉산역에서 올라가는 코스가있고 망월사역으로 올라가는 코스가 있는데
1호선과 7호선이 만나는 도봉산역쪽으로 사람들이 더 많이 몰린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망월사역쪽으로 가는 거지......후후
도봉산역을 지나서 내린 망월사역부근은 마치 어느 시골마을처럼 오래된 곳이다.
서울 도심에서 조금만 떨어지면 이렇게 풍광이 달라져 버리다니....
이놈들 아직 아무도 안 왔다.
호철이는 5분 뒤에 나타났고....
민우는 10분 뒤에 슬금슬금 걸어온다.
보자마자 웃는다....차식....웃기는....후훗
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따라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걸어가고 있다.
'신흥 1길이라....'
점심은 분식집에서 산 1500원짜리 김밥 한 줄.
통통한 김밥이 생각보다 비싼 것 같지는 않다.
안 그래도 점심준비를 못했었는데 잘 됐어....
나 : 두 줄 살까?
민우 : 아니 난 됐어....
호철 : 나 라면 두 개 갖고 왔지롱....
나 : 버너하고 다 갖고 왔냐?
호철 : 아니....컵라면....보온병에 물 담아 왔지...
민우 : 헉....그걸 다 짊어지고 왔냐?
...
...
여느 산처럼 여기도 계곡을따라 음식점들이 빽빽히 이어져있다.
생맥주....족발....도토리묵....파전....동동주....
소주잔을 든 이쁜 여배우도 달력 안에서 연신 미소를 띄우며 우리에게 소주를 권하고 있다.
길 옆으로 작은 도랑마냥 계곡물이 흐르는데 생각보다 물은 깨끗하다.
이런 데도 계곡이 있다니...좀 안 어울리긴 하다.
계곡은 지리산 계곡을 따라올 산이 없지.....후후
민우 : 학생 할인 안 해주냐?
호철 : 나 저번에 돈 다 주고 갔는데...
나 : 에이....우리도 할인 해주면 좋겠다.
관리원 : 대학생이에요? 대학생도 학생증있으면 할인해 줍니다
우리 : 정말요?
민우 : 거봐....물어보고 사야 된다니까..
호철 : 우씨....저번에는 그냥 샀는데
도봉산
위치 : 서울 도봉구, 경기 양주시, 의정부시
높이 : 740m
주봉우리 : 자운봉
높이는 740m이며, 주봉(主峰)은 자운봉이다.
북한산(北漢山)과 함께 북한산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으며, 서울 북단에 위치한다.
우이령(牛耳嶺:일명 바위고개)을 경계로 북한산과 나란히 솟아 있으며, 북으로 사패산이 연이어 있다.
면적이 24㎢로 북한산의 55㎢에 비해 등산로가 더 조밀하며, 산 전체가 큰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자운봉·만장봉·선인봉·주봉·우이암과 서쪽으로 5개의 암봉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는 오봉 등
각 봉우리는 기복과 굴곡이 다양하여 절경을 이루는데, 선인봉은 암벽 등반코스로 유명하다.
산중에는 인근 60여 개 사찰 중 제일 오래된 건축물인 천축사(天竺寺)를 비롯하여
망월사(望月寺)·쌍룡사(雙龍寺)·회룡사(回龍寺) 등의 명찰이 많아 연중 참례객·관광객이 찾는다.
특히 동쪽으로 서울과 의정부 간의 국도, 서쪽으로 구파발(舊把撥)과 송추(松湫)의 간선국도가 통하여 교통이 편리하다.
[네이버 백과사전 中]
학생할인을 받고서 드디어 산행이 시작됐다.
몇마디씩 툭툭 던지고 받던 우리는 차츰 말 수가 줄어들더니 한 명 두 명 우리 앞에 있는 사람들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이것들이 말도 안 하고 걷기만 하네.....무슨 불만들있냐? 후아~'
....
..
하지만 우리의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역시나 30분을 못가서 발걸음이 느려지기 시작하더니 벌써부터 이마에 송글송글 맺히는 땀을 닦으며 가쁜 숨을 들이킨다.
우리가 추월했던 사람들은 다시 천천히 우리 옆을 지나친다.
나 : 아......덥다
민우 : 나도 이런거 가져올걸....우리 집에 있는데...
마침 구름인지 스모그인지가 태양을 가려주기에 망정이지....오늘 햇빛만 쨍하면 정말 더운 날씨다.
뻘써부터 샤워기의 시원한 물줄기가 생각나는데 어쩐다...
더워...
더워...
으으.....덥다....
민우가 가져온 오이로 갈증을 풀고 다시 발을 움직였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속도를 많이 줄였다. 천천히...천천히...
...
한참을 꾸역꾸역 올라갔더니 드디어 이정표에 망월사가 보인다.
쳇....그런데 올라온 것만큼 더 가란다....너무하네
'으으....물을 다오 물을.....'
땀에 취해 기진맥진할무렵 중간 기착지인 망월사에 도착했다.
후아....이제 절반이다.
신라시대때 창건된 절이라는데 생각보다 꽤 크다.
서울 근교에 있는 절 치고는 경치가 봐 줄만 하다. 법당도 크고....
날씨만 맑았다면 법당 앞으로 탁 트인 절경을 볼 수 있었을텐데 오늘 영 하늘이 맑지가 못하다.
망월사
신라 때인 639년(선덕여왕 8)에 해호화상(海浩和尙)이 왕실의 융성을 기리고자 창건했다.
절의 이름은 대웅전 동쪽에 토끼 모양의 바위가 있고, 남쪽에는 달 모양의 월봉(月峰)이 있어
마치 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신라 경순왕(재위 927∼935)의 태자가 이곳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인 1066년(문종 20) 혜거국사(慧拒國師)가 중창한 이후의 연혁은 확실하지 않으나,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황폐해졌다가 조선시대인 1691년(숙종 17) 동계(東溪) 설명(卨明)이 중건했다.
[네이버 백과사전 中]
주섬주섬.....민우 가방에는 군것질할것도 많다....후후
초콜렛에다가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샀다는 생전 처음보는 칼로리바도 있다.
음....어디갈 때 민우 데리고 가면 간식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씨익...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법당 옆에 앉아서 초콜렛을 우물거리며 잠시 휴식을 가졌다.
땀이 좀 식으니까 조금 살 만하네...여름 산행은 역시 더위와의 싸움이여
법당에서 불공드리고 남은 주전자물을 얻어 마시고
수다 좀 떨다가 다시 배낭을 어깨에 걸었다.
법당 기와지붕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 하나 찍고....
포즈가 무슨 논일 하다 나온 사람같네....후후
....
....
'아.....바람이 필요해....'
앉아서 쉬다가 다시 오르막을 오르려니 발걸음이 영 무뎌진다.
바람은 야속하게 숨을 죽여 버렸고 후텁지근한 공기와 닿아 땀에 젖은 몸이 다시 축축해지는 것 같다.
민우 : 어, 내 손수건 어디갔지? 에에에.....아까 절에 놓고 왔나보다
망월사를 출발해 5분쯤 걸어가고 있는데 민우가 여기저기 뒤지면서 손수건을 찾는다.
호철 :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게 갔다와...
민우 : 우리가 얼마쯤 왔지? 아~ 이거원.....
나 : 조금밖에 안 왔어....어여 갔다와라
헐레벌떡 다시 내려갔다 뛰어오는 남군 덕택에 호철이와 나는 잠시 즐거운 쇼를 감상할 수 있었다.
엉뚱 청년 남민우.....후후후
여전히 바람이 필요해.....
햇볕이 없어서 좋긴한데.....오늘 하늘은 바람에 너무 인색한 것같다.
계속 이렇게 더울라나....
...
서서히 능선에 가까워 오는지 우뚝 솟은 바위 봉우리가 눈앞에 서 있다.
꾸역꾸역 오르다보니 드디어 능선에 다다랐다. 드디어....
역시...등산을 하면 인생의 우여곡절을 다 느껴볼 수 있다. 그래서 좋지....
저 아래에서부터 힘겨운 오르막을 오르다보면 어느덧 저 멀리멀리 내려다 볼 수 있는 능선에도 서게 된다.
언제 올라가나 한참을 올려다 보지만 조금씩 한 발 한 발 오르다보면 나도 모르는사이에 거기 설 수 있다.
고생을 참고 견디다 보면 언젠가는 그 고생길 위에서 지나온 발자국을 되돌아 보는 위치에 오르게 되는 거다.
인생이란 그런거 아니겠어...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고....
'자...이제부터는 좀 수월하겠네.....근데....여기가 어디라??'
능선을 따라가니까 산세가 사뭇 달라졌다.
얌전하던 길이 암벽길로 바뀌어서 밧줄을 타고 올라야 하기도 하고
비스듬한 바위 위를 미끄러져 내려가기도 해야 한다.
나지막한 산이라고 얕봤는데 흙산과 바위산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산이다.
흔히 말하는 '지루하지 않은 산'이지.....
원래 도봉산 암벽등반도 유명하잖아...
....
....
호철 : 배고프다..
나 : 꼭대기 가서 묵자
호철 : 꼭대기가믄 앉아 먹을 때도 없다
민우 : 그래? 그럼 여기 어디서 먹을까
나 : 그러든가...
컵라면 두 개, 김밥 한 줄, 밥, 김치...
후식으로 자두랑 귤 조금.....
커다란 바위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호철이가 힘겹게 메고온 보온병에서 뜨끈뜨끈한 물을 부어 컵라면을 익혀 먹고
참기름이 고소하게 밴 김밥 하나를 입에 넣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후후
역시 산에오면 라면을 먹어 줘야 한다니까....
...
행복한 점심식사를 끝내니 힘이 난다.
마지막 힘을 다해 성큼성큼....
마지막 오르막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다.
이제 이 고개만 넘으면 정상이닷~!
저기 우뚝 솟은 돌바위가 도봉산의 주봉인 '자운봉'.
봉우리 하나가 거대한 암벽 덩어리다.
우리 : 으와.....저긴 어떻게 올라가냐....
용감한건지 무모한건지 정말 산을 잘 타는건지.....
몇몇 사람들이 보기에도 아찔할 정도로 가파른 암벽을 맨몸으로 기어 오르고 있다.
꼭대기에 까맣게 움직이는게 분명 사람인데...
우리 : 헉.....저긴 좀 힘들겠는데....
지금 우리 눈 앞에서도 용감한 아저씨들이 위태위태한 자세로 암벽을 오르고 있다.
여기도 꽤나 위험해 보이는 구만....
호철 : 올라갈래?
나 : 갈까?
민우 : 싫어....
나 : 가능할까...
민우 : 아저씨들도 가는데 젊은 애들이 좀 그렇긴 하다....
호철 : 싫다....저 사람들은 산에 자주 오는 사람들이잖아...
나 : 그래...난 오래 살고 싶다.
내가 보기에 저 암벽을 그냥 오른다는건 우리나라 아저씨들 사이에 만연한 특유의 군대식 '깡'의 작용인 것 같다. 피식
나 : 이 길로 가면 어디로 가는 거냐? 저 위로 가는 길은 없니?
호철 : 일로 가면 도봉산역으로 내려가는거야...
민우 : 저리 돌아가면 길이 있지 않을까....
나 : 뭔가 있을 것 같은데...
우리의 선택은 무모한 도전으로 괜한 병원비를 축내는 대신 암벽을 배경으로한 즐거운 사진찍기 놀이었다.
너무나 우리다운 놀이.....
남민우씨와....신호철씨....
대학와서 나랑 밥먹은 횟수가 가장 많은 친구들 중 두 명이다.
아마 내가 산에 가자고 조르면 흔쾌히 동조해줄 녀석들도 이놈들일거다.
허긴...그러니까 오늘 이렇게 같이 왔겠지....후후
같이 산에 오를 친구가 있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 한가....씨익
힘드냐?? 후후
고지가 저기다.......어서 움직여 !! 끙차
...
눈앞을 가로막은 암벽을 밑으로 돌아가니 어이없게도 훨씬 완만한 암벽이 있다.
나 : 여기 길 있네...뭐냐 이게...
민우 : 아~ 신호처리~ 길 없다며...
호철 : 어...여기 길이 있었네~ 훗
이렇게 좋은 길을 두고 저 앞에서 용쓰는 아저씨들은 역시나 무모한 객기를 발산하고 있는 건가? 후후
맞은편에서는 자운봉에 오르려는 사람들이 역시나 맨 몸으로 아슬아슬 암벽을 오르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기는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다.
다쳐....
이쯤 오니까 바람이 정말 시원하게 불어준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인가보다....
'어어어어.........시원해......시원해.....'
발 밑에서 꾸물꾸물 움직이는 사람들이 내려다 보인다.
.....
암벽 꼭대기.
오늘 날씨가 산행하기에는 썩 나쁜 날씨는 아닌데
정상에서 경치구경하기에는 별로 안 좋은 날씨다. 뿌옇게 흐려서는.....
하늘이 좀 더 맑았으면 경치가 아주 좋을 것 같은데....
그래도 이렇게 탁 트인 공간에 서 있다는게 참 좋다.
녹색으로 넓게 퍼진 산줄기 너머로 도로도 보이고 희뿌연 하늘 밑으로 서울의 끝자락이 희미하게 비친다.
비록 최정상은 아니지만 눈앞에서 정상을 바라봤으니 그걸로 족하다.
산이 좋아지기 시작하면 나이가 든거라던데....
이제는 나도 그럴 나이가 된건지 모르겠다.
방학이랍시고 집에만 뒹굴거리다가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무작정 산에 올라왔는데 아주 잘 한 듯 싶다.
산은 언제나 가슴과 머리속을 확 뒤집어 줘서 지저분한 잡생각을 떨쳐 버리게 해주는 존재이다.
가끔 어딘가 답답하고 몸이 찌뿌둥할 때 산에 오르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이 아닐까....
3학년 여름방학....
아마 이렇게 여유있는 방학을 보낼 기회도 이제 몇 번 남지 않았다.
대학생활의 남은 방학도 세 개....
4학년이 되고 졸업 논문을 쓰고 진학준비를 하고....그것도 아니면 다른 준비를 하겠지....
이렇게 생각하니 이제 내게 온전히 주어지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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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멋지게 '브이~'를 그려주고 무작정 올라온 산행을 마무리 했다.
이왕 이렇게 발도장을 찍었으니 다음엔 관악산, 북한산에도 발자국 남기러 올라가야지.....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