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한 장마도 지나가고 여름도 이제 종반에 다다랐지만 내리쬐는 햇살이 여전히 뜨겁다.
그래도 한여름을 에어컨 밑에서 보낸다는건 너무나 재미없는 발상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여름은 그리 많지가 않다. 어릴적에는 기껏해야 부모님 손잡고
여기저기 해수욕장이나 계곡으로 끌려다니며 삼겹살이나 구워먹다 왔을 것이고, 조금 머리가 컸을땐
한여름을 학교나 도서관에서 책이랑 씨름하며 보내기 십상이다. 아니면 사회생활 하느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하면서 피곤한 여름을 보내기 마련이고..
올 여름을 보내면 다시 일년을 기다려야한다.
그래서 가는 여름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었다. 늦기 전에....
a.m. 11:30
동대구고속터미널은 버스회사노선별로 터미널이 나눠져 있기 때문에 버스 타기가 조금 번거롭다.
총4개 건물로 따로 나눠져 있는데 처음 오는 사람들은 자기 노선찾는데 애먹을 때가 많다.
전주에서 3시간 30분만에 도착한 기태를 만나 오랜만에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지난 일년동안의 안부를
물었다. 역시 카투사라 그런지 휴가나왔다고 만난 내 친구들 중에 얼굴이 가장 좋아보였다. 군인이 하나도
안 타고 오히려 허옇게 변해서 나왔다. 카투사 물이 좋긴 좋은가 보다.
p.m. 1:20
원래는 북부정류장에 가서 시외버스를 타고 영주로 갈려고 했는데, 마침 고속터미널에 영주행 고속버스가
있어서 그걸 타고 가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3년전 겨울에 안동으로 동아리 합숙하러 갔을 때도
여기 동대구에서 버스를 탔던 것 같다. 경북 쪽으로는 올 일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교통편이 생소하기만 하다.
p.m 3:00
영주는 경상북도의 끝에 자리잡은 작은 도시로서 소백산을 품고 있어 자연환경이 아름답고 사과, 인삼,
한우고기가 유명하다. 원래 경북쪽이 유교문화가 강한 곳이라 유교관련 사적이 많고 소백산 자락에 부석사,
희방사 등의 사찰들도 산재해 있다.
영주버스터미널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영주반점' 앞에 군내버스정류장이 있다. 거기서 부석사행
좌석버스를 타면 된다. 배차시간이 제법 길어 기다리는 동안 상당히 무료해질 수 있는데,
그래서 이런 여행객을 노리고 택시기사들이 끈질기게 접근해오기도 한다. 상당히 친근하게 접근하기
때문에 거절하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이런 곳까지 왔는데 택시타면 너무 재미없지...
마음 급한 아가씨들을 택시에 태워보내고 우리는 옆에 있던 할아버지랑 몇마디 대화를 나눴다.
40년 전에 영주여고에 다니던 아내와 데이트하러 희방폭포에 갔었다고... 너무 아름다워서 나중에 꼭
다시 오고 싶었는데 다 늙은 오늘에야 다시 오게 됐다고 하시며 조용히 웃으셨다.
우리도 조용히 따라 웃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예쁜 추억을 가지고 있는 할아버지에 대한 부러움,
우리도 나중에 늙어서 이 할아버지처럼 예쁜 기억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
이 멋진 노신사의 얼굴에 깊게 파인 주름에는 지난 세월의 아름다운 기억들이 뭍어있었다.
p.m. 4:50
영주시내를 출발한 버스는 풍기를 지나 고개 고개를 넘어 50여분만에 부석사 입구에 도착했다.
부석사 입구는 민박집과 식당들이 많고, 마침 주말이라서 옥수수를 삶아 파는 할머니들이 부석사가는
길목을 따라 앉아 분주하게 관광객을 부르고 있었다.
부석사는 소백산 국립공원에 속해 있지만 사실은 태백산자락의 봉황산에 있다는 사실이 매표소 표지판에
안내되어 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부석사는 676년(신라 문무왕 16년) 의상조사가 왕명을 받고 창건한 우리나라 화엄종의 근본도량으로서
배흘림기둥으로 유명한 무량수전과 국보 제17호인 무량수전 앞 석등, 안양루, 조사당을 비롯 많은 문화재가
산재한 고찰이다. 사실 매표소 옆에 있는 안내문을 한 번만 읽어 봤더라면 조금이나마 더 알고 봤을 텐데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까 못보고 지나간 것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절에 들어서자마자 방 배정을 받으러 종무소에 들렀다.
약간 깐깐해보이는 아주머니께서는 우리 행색이 별로 맘에 안드는 눈치셨다.
하긴 기태 그 놈은 반바지차림이고 나란 놈은 샌들을 신고 와가지고서는
산사예불체험을 한다니 그럴만도 하다. 몇 마디 훈계아닌 훈계를 듣고 아주머니로부터 스님들 입는 바지
하나를 빌려 방으로 들어갔다. 절 옆으로 관광객 출입이 금지된곳에 산사예불체험자들을 위한 숙소가
따로 마련되 있었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그리 크진 않았다.
우리는 방에서 호리호리한 체구의 한 아저씨와 인사를 나눴다. 안동교도소에서 근무하시는 분인데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대학을 진주에서 다니셨다고 한다. 덕분에 서로 친근하게 이야기도 주고 받고
사찰생활에 대해 많은 조언을 들었다. 낯선 사람과의 대화에서 서로가 공통의 분모를 갖는다는 것은
대화를 훨씬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해주는 것 같다. 아저씨는 주말에 자주 이런 사찰을 찾는다고 하는데
절에서 조용히 수양을 하면 그렇게 좋단다. 알고 봤더니 다음카페 '부석사의 향기' 회원이시데...
절에서는 밥먹는걸 공양한다고 한다. 절에서는 먹는 것이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5시 30분. 일상적으로는 상당히 이른 시각에 저녁 공양이 시작됐다. 내 생애에 절에서 공양이래 봤자
석가탄신일날 절에서 나눠주는 비빔밥만 먹어봤는데 막상 절 밥을 마주하니 다소 허탈했다.
뭐 특별한 진수성찬을 기대했던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물 종류라도 많을 줄 알았는데....
석가탄신일날 먹은 비빔밥은 다 맛있었는데....
아쉬움을 남기고 큰 그릇에 김치, 상추무침, 열무김치, 밥을 같이 넣고 미역만 넣고 끓인 미역국을 떠서
그래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었다. 절에서 음식 남기면 큰일나니까 일부러 조금씩만 덜어서 먹었다.
글쎄...음식도 일종의 탐욕중에 하나일까. 식탐이란 말도 있으니까. 욕심부리지 않고 자기가 꼭 필요한
만큼만 취하는 지혜를 우리는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공양간에 이런 내용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오늘 내가 먹는 이 음식은 배를 채우기 위함이 아니고 수행을 위한 보약으로 생각하고 먹어야 한다.'
무량수전은 듣던대로 우아하게 부푼 기둥을 축으로 세월의 힘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아주 운치 있는 목조저녁공양을 하고서야 절 깊숙히 들어가 조금 구경을 했다. 절 가장 안쪽 부석과 무량수전이 자리 잡고 있다.
건물이었다. 오랜 세월 이렇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 그저 고맙기만 했다.
부석은 무량수전 바로 왼쪽 뒤에 있는데 부석앞에 부석의 유래에 대한 전설이 적혀있었다.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공부를 할 때 의상대사를 사모하던 선묘낭자가 있었다.
하지만 의상대사가 신라로 돌아가게되자 헤어짐을 슬퍼한 나머지, 바다에 빠져 용이되어
의상이 탄 배가 무사히 바다를 건널 수 있게 지켜주었다.
후에 의상이 왕명을 받들어 절을 세웠으나 지역의 이교도들이 반대해 어려움에 쳐했다.
그때, 용이된 선묘낭자가 나타나 바위를 들어 이들을 놀라게 하니 그 뒤로 아무 반대가 없었고
이에 절 이름을 부석사라 하였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실을 풀어 바위 밑을 지나면 거침없이 통과한다고 하는데,
언뜻보니 뜬거 같기도 하고 붙은 것 같기도 하지만 그만큼 성스러운 바위라는 걸 아는게 중요하지 않을까.
p.m. 6:30
곧 저녁 예불이 시작됐다.
가족 신앙으로 불교를 접해왔기 때문에 나 자신이 독실한 불교신자라고 말 할 수는 없다.
어머니 따라 절에 가면 불전함에 보시하고 삼배하는게 전부였으니까.
동양적인 수행의 과정과 절제된 수도의 생활이 어떤 것인지 조금이나마 느끼고 싶어서 이렇게 예불체험을
신청하긴 했지만 처음 접하는 일련의 과정이 사뭇 어색한건 어쩔 수 없었다.
예불은 무량수전에서 이뤄졌다. 남향인 무량수전 안에, 불상은 특이하게 동편을 바라보고 모셔져있는데,
그래서 다른 절과는 달리 부석사에서는 법당에 들어가면 왼쪽으로 몸을 돌려 앉아야 한다.
오래된 목조건물에서 베어나오는 은은한 향내와 운치가 더해져 법당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참 편안해 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스님의 차분한 염불에 따라 천수경도 몇 구절 외워보기도 하고 난생처음 108배도 하고나니
새삼 몸가짐이 경건해지고 조금이나마 마음이 차분히 가라 앉는 것 같았다.
저녁예불을 마치고 법당을 나서니 벌써 날이 저물어 있었다. 산사의 밤 바람은 벌써 제법 한기가 느껴졌다.
달빛만 비춰주는 마루턱에 앉아 정말 오랜만에 밤하늘을 바라봤다. 별도 많이 보이고....
앉아서 아저씨랑 옥수수를 까먹으며 몇마디 이런저런 얘기도 했다.
내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잘 생각해보라는 아저씨의 말씀을 들었지만
글쎄....아마 이 질문에 대해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풀숲 저편에 어디서 날아왔는지 반딧불이가 깜박깜박 엉덩이를 밝히고 있었다.
새벽 예불에 참석하려면 일찍 자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