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하라-아침
여관 아주머니 성함이 '구마모토'인데 이 여관에서 유일하게 영어가 가능한 아주머니시다.
대마도 전통 요리에 일가견이 있으셔서 우리나라 신문에도 소개가 됐던 나름 유명인사이기도 하고.
덕분에 어제에 이어 오늘도 정갈한 아침상을 받았다.
우럭처럼 보이는 손바닥만한 생선과 김이 모락모락나는 쌀밥.
밥솥이 좋아서 그런가, 밥은 참 잘 지어졌다. 후후.
김은 우리나라 김보다 향이 좀 덜 한 것 같다. 원래 일본에서도 우리나라 김을 더 높게 친다고 한다.
아무튼 정갈하고 든든한 아침 상.
대충 짐정리를 하고 체크아웃.
좀 뒹굴거리고 싶지만 렌트카 반납 시간이 아침 10시인지라 서둘러야 한다.
90도로 허리를 꺾어 인사하는 여관 아주머니들과 거의 맞절을 주고 받은 후 렌트카를 몰고 주유소로.
여기도 렌트카를 반납할 때는 다시 휘발유를 가득 채워야 한다.
덕분에 일본에서 주유도 해본다.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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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하라 여객터미널 앞 주유소. Shell.
희한하게 주유구는 우리와 같이 왼쪽에 있다.
"겐킹 만땅데스"
"하이~"
한 10분쯤 먼저 도착해 어제 그 도요타 직원을 기다리고 있으니 정확히 10시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헐레벌떡 뛰어온다.
멋적게 웃으며 '스미마셍'을 연발하는 이 친구 참 유쾌하다. 같이 사진이라도 찍을걸 그랬다.
"가솔린 만땅데스카?" / "하이~"
"에...카 오케이?" / "하이~ 오케이~"
이 얼마나 간결하지만 완벽한 대화인가? 흐흐
흔적痕迹
이즈하라 항의 풍경은 우리의 여느 바닷가 풍경과 참 많이 닮았다.
작은 오징어 잡이 어선과 옹기종기 들어 앉은 항구의 건물들은 여기도 친근하기 그지 없다.
가까운 이웃.
어찌 이렇게 비슷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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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아라 쇼핑 센터 바로 뒤에는 쓰시마 역사민속 자료관이 있다.
입구에 서있는 고려문高麗門과 조선국통신사비지비朝鮮國通信使之碑
역사의 굴곡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료관에 전시된 '조선통신사행렬도'나 자료관 입구의 '조선통신사비'를 보면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이다.
한 때는 이런 시절도 있었구나 하면서...조금은 씁쓸한 여운도 남는다.
자료관의 연표를 살펴보다가 조금 놀란 사실은
조선통신사가 19세기 초 순조 시절에도 파견되었다는 점이다.
200여년 전.
19세기의 마지막 조선통신사.
역사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직전 당대에 파견된 조선통신사들은 무슨 마음으로 현해탄을 건너갔을지
또 에도까지 가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참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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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조선통신사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또 다른 흔적.
덕혜옹주결혼봉축비.
봉축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망국 조선의 비통한 사연이 깃들여 있다.
너무나 무력하게 무너진 조선왕조의 비참한 흔적과
한 때 주도적이던 조선의 흔적.
신의信意를 교환한다던 통신사가 오고간 긴 세월동안
두 나라가 나눈 신의信意는 허상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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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쇼인萬松院
대마도를 다스리던 소(宗)家 집안의 '선산'이라고 볼 수 있는 '반쇼인'.
나름 일본 3대 묘지 중 하나인 국가 사적이다.
일본 3대 묘지 중 하나가 교토나 도쿄 근방에 있지 않고 이런 변방 대마도에 있다는 게 참 뜻밖이다.
소(宗)家 20대 소 요시나리(義成)가 아버지인 소 요시토시(義智)를 기리며 창건한 보리사.
후에 요시토시의 법호에 따라 반쇼인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도쿠가와德川 역대 장군의 위패와 통신사 관련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다지 사찰이라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아마 독립된 사찰이라기 보다 소(宗)家 묘소를 관리하는 성격이 강해서가 아닐까.
소(宗)家 무덤이 있는 곳까지 일렬로 나열해 있는 석등의 모습은 가히 장관이다.
내가 본 대마도의 그 어떤 유적들보다 장엄하고 경건한 것 같다.
언덕 위로 뻗어있는 돌계단과 그 양쪽에 솟아있는 석등이 만들어 내는 반복적인 원근감은 강한 흡입력을 만들어내
분위기만으로 참배자를 경건하게 만드는 위엄있는 자태를 뽐내고 있다.
경건한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신화시대에나 나올 법한 거대한 삼나무가 우러러 보이는 묘소가 모습을 드러낸다.
어른 네다섯이 팔을 둘러야 할 만큼 커다란 덩치를 뽐내는 나무들은 묘소를 둘러싸며 참배객을 압도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선봉을 맡은 소 요시토시의 무덤도 있는 이곳은
일본 3대 묘지로 손색이 없는 경건함과 위엄을 갖추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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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치만구신사 八幡宮神社
후덥지근한 날씨에 시원한 장국에 말아먹는 메밀소바對州そば는 정말 근사한 선택이다.
짭쪼름한 간장소스에 파 송송 띄우고 한 젓가락 말아서 먹으면 그저 고마울 따름.
여행 중에 먹는 즐거움이 없다면 얼마나 고단할까 :)
워낙에 우리에게 익숙한 일본 음식이라 아주 색다른 맛은 없지만
그래도 현지 음식이라 단순한 소바 하나도 남달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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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바 한 접시를 뚝딱 해치우고 찾아간 곳은 나의 대마도 마지막 공식 일정으로 잡힌 하치만구 신사.
한자대로 뜻 풀이를 하자면 8번궁 신사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딱히 참고할 만한 역혁 안내판이 없어 자세한 창설 유례는 모르겠으나
모셔진 신은 활과 화살弓矢, 전쟁의 신이란다.
전쟁의 신을 모신 곳이라지만 시내 한 복판에 있는 신사라 그런지
신사 특유의 약간 무겁고 음침한 기운이 조금 덜 한 것 같다.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경내와 한가로이 노니는 비둘기떼 덕에 어느 한적한 공원 한 모퉁이 같은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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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에 깨알 같이 적어둔 사람들의 소원은 다 이루어 졌을까.
다 이루어질 수 없다면 절반이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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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하라 풍경 厳原町
하치만구 신사를 끝으로 내가 계획했던 대마도 공식 일정이 모두 마무리 됐다.
이즈하라가 생각했던 것 보다 넓지 않았던 탓에 가보고 싶었던 곳은 거의 다 둘러 봤는데도,
오후 늦게 출발하는 비행기 시간까지 서너 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덕분에 자의반 타의반 이즈하라 골목을 기웃거리는 비공식 일정이 계획됐다.
골목 여기저기를 어슬렁 거리며 찰칵~ 찰칵~
내가 좋아하는 자전거와 우체통 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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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요즘 우리나라 시골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물펌프.
요즘 어린이들은 알랑가? :)
여기 가운데 뻥 뚫린 곳에 물을 몇 바가지 끼얹고 열심히 손잡이를 들었다 놨다 하면 옆 주둥이로 물이 쏟아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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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대부분의 가정이 개인 주차장을 가지고 있거나 이렇게 공용 주차장을 만들어 이용하는 덕에
좁은 골목이지만 차가 길가에 세워진 모습은 찾아 보기 힘들다.
손바닥 만한 공간만 있으면 용하게 차를 주차시켜 놓는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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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 도착으로 유명한 일본 버스.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정시에 도착하고 출발한다.
타고간 거리에 따라 요금이 차등적으로 부과되는 것도 특징.
노선이 많지 않고 요금이 저렴한 편도 아니기 때문에 대마도에서 버스만으로 여행하기는 힘들지만
한 두 번 타보는 것도 재밌는 경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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止まれ....멈추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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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술집.
저녁 무렵에는 열렸더니만 낮에도 장사를 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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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하라에서 본 유일한 서점.
조그마한 동네 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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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의 그늘을 따라 햇빛을 피해 터벅터벅.
일요일 한낮이지만 부산가는 배도 떠난 시간인지라 한국관광객도 없고 거리는 마냥 한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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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일본식 2층 가옥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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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름창고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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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 자판기 참 좋아한다.
무심히 걷다가 주위를 둘러보면 항상 반경 20m 안에 자판기 한 대 쯤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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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골목을 누비다 우연찮게 마주친 고쿠분지國分寺
조선통신사들이 대마도에 도착하면 객관으로 사용하던 곳이란다.
조선통신사 객관적 국분사
朝鮮通信使 客館跡 國分寺
이렇게 곳곳에 남아 있는 교류의 흔적이
한낱 지난 날의 생소한 이야기가 되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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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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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 공중전화
내가 좋아하는 또다른 피사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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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을 걷다가 가장 정이 갔던 곳이 여기다.
미술학원에서 한 번 쯤 그려본 골목 풍경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모습.
좁다란 오르막길과 구석에 놓인 작은 화분.
정겹게 어깨를 나란히 한 작은 집들이 어딘지 모르게 정이 가는 풍경이다.
아랫층에서 뭘 먹는지....
옆집에서 뭐라 떠드는지....
윗집 애가 왜이리 쿵쾅거리는지....
단번에 알 것 같은 정겨운 다세대 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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進入禁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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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경찰서 앞 나카라이 기념관이 있는 거리는 '무사의 거리'로도 알려져 있다.
얇은 살대로 만들어져 안팎이 훤히 보이는 이런 대문은
상대방의 무장 여부를 집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무사의 집' 특징이라고 들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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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하라 시내는 천천히 걸어도 반나절이면 족할만큼 아담한 크기이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우리네 골목과 닮은 듯 다른 이즈하라 골목 속을 천천히 유람하는 것도
생각지도 못한 아기자기한 볼거리를 볼 수 있어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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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으로
한낮의 찌는 듯한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예정된 버스는 예정된 시간에 정확히 티아라 쇼핑 센터 앞에 도착했다.
승객이 거의 없는 버스는 천천히 이즈하라 거리를 빠져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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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시선 쯤이야 가방 속에 접어 두고
이틀만에 제법 눈에 익은 풍경들을 스쳐 공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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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다면 작다고 할 수 있는 대마도에 공항이 있다는 게 한편으로 재밌다.
그래도 국내선 청사는 대마도 특산품을 파는 면세점도 그럴 듯하게 있고 제법 번화하다.
내가 보기에는 대마도에서 티아라 쇼핑 센터 다음으로 인구 밀도가 높은 곳 같다 :)
국내선 청사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조그만 국제선 청사.
국제선이라고 해 봤자 한국에서 내가 타고 온 비행기가 전부인 이곳에
그래도 있을 건 다 있고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직원도 있다.
말끝마다 '고객님~' 하고 깎듯이 대하는데, 처음에는 한국에서 파견나온 직원으로 알 만큼 한국말을 참 잘 한다.
재미있었느냐, 어디어디 가봤냐, 다음에 또 와라 조곤조곤 안부도 묻는 싹싹한 아가씨다.
어쨌거나 늦여름 긴 해도 서산으로 기울고
해가 뉘엿뉘엿 프로펠러 위로 질 때 쯤 조그만 비행기는 사뿐히 활주로를 날아 오른다.
금요일 오후에 땡땡이치고 몰래 떠나온 잠깐의 일탈도 이제 마무리 할 시간.
잠깐의 일탈이었지만 오랫동안 벼르던 일탈이었기에 아쉽다기보다는 뭔가 이루고 돌아가는 것 같다.
앞으로도 오래 기억 될 일탈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