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1.2 火
'......'
새벽 2시....예상대로 잠이 안 온다.
눈만 꿈뻑꿈뻑...
동쪽으로 날아오면 서쪽으로 날아가는 것보다 시차적응이 쉬운줄 알았는데
이거 뒤죽박죽이 되버렸다....흐흐
침대에 누웠다가.....앉았다가......베개에 기댔다가...
잠은 안 오고...
애꿎은 리모컨만 꾹꾹 누르고 있다.
TV에서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소리만 떠들어대니
이거 볼륨 끄고 듣는거나 다를바가 없다....후후
...
희한하게도 우리나라 옛날 드라마가 나오는 채널이 있다.
일본어 더빙이 왜이리도 우스운지...
그래도 배경음악이 박상민의 '하나의 사랑'이다.
'가슴 속에 타오르는 그~~대~'
으아....이 고전 가요를 일본 땅에서 듣게 될줄이야....허허참..
장동건도 나오고....구본승도 나오고....스타일을 보니까 90년대 작품같은데
아무튼...좀 우습다. 풋...
...
..
새벽 6시 30분..
...
결국 TV만 보다가 새벽을 하얗게 지샜다.
커튼을 여니 하늘은 어느덧 서서히 밝아오고 있고
앵커의 낭랑한 목소리로 NHK 아침 뉴스가 시작됐다.
"오하요 고자이마스....&^%$$#@!~"
오늘 아침의 top 뉴스는 이라크에서 테러범들에게 붙잡힌 일본인 인질에 관한 내용이다.
....
결국 한 시간도 제대로 못잔 셈이다.
씻고 아침이나 먹으러 가자...
...
...
...
깔끔한 뷔페식당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바람도 쐴겸 잠깐 호텔 앞 정원에 나왔다.
이른 시간이라 아직 한산하다.
안개가 아주 자욱한 아침....
달력은 11월이지만 여긴 아직 가을도 시작하지 않은 것같다.
11월 2일....집에 가는 날이다.
그저께만 해도 로마에 있었는데, 어제는 도쿄....오늘은 우리나라로 돌아간다.
이 엄청난 거리감을 불과 하루 이틀만에 적용시켜 버리니 나로서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여기가 정말 도쿄인지...그리고 5시간 후면 정말 우리나라로 돌아가는 건지...
..
공항버스가 올 때까지 한 시간 남짓남았다.
올라가서 TV좀 보다가 천천히 준비하면 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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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크아웃을 한 뒤 호텔 로비에 따로 마련된 JAL창구에서 미리 탑승수속을 하고 배낭을 부쳤다.
'도쿄 나리타.....부산....10시 25분 비행기...'
마지막 보딩패스다.
나를 집으로 데려다줄 마지막 티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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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L 957, 32E 10:25 A.M.
공항으로 가는 도로가 꽤나 복잡하다.
아침 출근 시간이랑 겹쳐서 그런지 저기 도쿄 도심으로 향하는 차선도 많이 막히는 것같다.
...
아침 뉴스에 이라크에서 붙잡힌 일본인 인질 소식이 첫 뉴스로 나오더니
경찰들이 공항으로 들어가는 모든 차량을 상대로 신분조사를 하고 있다.
이것 때문에 도로가 더 막혔던 모양이다....
우리 버스에도 경찰 아저씨 한 분이 올라와 신분조사를 한다.
여권을 보여주면 일일이 "하이~" 하고 대답해 주는 모습이 참 특이하다.
우리눈에는 좀 간드러져보이기도 하지만 일본사람들은 이런 행동들이 그냥 몸에 배어있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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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시 29분....현재 기온 21도.
공항은 늘 분주하다.
올 때마다 기분이 싱숭생숭해지는 곳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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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세점 구경이나 해 볼까 하고 여기 저기 둘러봤는데 마땅히 구경할 게 없다.
왠 화장품 매장은 그리도 많은지....
어차피 살 돈도 없지만 나리타 공항 면세점은 좀 심심한 구석이 있는 것같다. 씨익...
....
공항 구경에 별 재미를 못 붙이고 일찌감치 탑승자 대기실로 넘어가려고 보안검사를 받았다.
아침 뉴스 때문인지 아니면 여기는 원래 이런건지 심사원들의 눈매가 예사롭지 않다.
늘 하던대로 가뿐하게 금속탐지기를 지나치고 X레이 투시기를 넘어오는 내 짐을 기다렸다.
짐이래봤자 배낭은 이미 화물로 부쳤으니, 와인이랑 올리브유가 든 종이가방과 보조가방 뿐이다.
그런데 심사원 아저씨가 내 종이 가방을 한 번 더 봐야겠다는 거다.......왜 그러지?
X레이 투시기를 유심히 바라보던 아저씨는 종이가방 내용물을 한 번 봐도 되겠냐고 묻는다.
"뭐 그러세요..."
와인 한 병이 나오고....올리브유 한 병이 나오고....초상화 한 점이 나오고.....
밑이 뜯어질까봐 두 겹으로 넣었던 종이가방까지 들어내 이리저리 보는가 싶더니....
다시 주섬주섬 담아주고서 허무하게 "아리가또~"하고 다시 건내준다.
'흥, 뭐냐 이거....'
저 아저씨...혹시 X레이 투시경에 비친 와인 병과 올리브유 병을 무슨 폭탄으로 오한거 아닐까..
허긴 길쭉허니 가만보니까 와인병은 폭탄이랑 비슷하게 생겼다...
내가 저거 들고 무슨 테러라도 할 것처럼 생겼나? 쿡쿡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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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주로가 훤히 내다보이는 대기실에 앉아 비행 시간을 기다린다.
아직도 제법 기다려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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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뚱히 앉아있기가 뭐해서 대기실 안에 있는 작은 서점에 들러 버릇처럼 이 책 저 책 뒤적거린다.
일본 특유의 세로 쓰기와 오른쪽으로 넘기는 책장이 이색적이다.
일본어 독학 한답시고 몇 번 들여다 본적이 있어그런지 가끔 아는 단어가 있긴 한데...
역시나 당최 무슨 얘기들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후후...
띄어쓰기가 없는 일본어라 페이지 한가득 빽빽히 적혀있는 글자들이 마치 무슨 그림같다.
띄어쓰기가 없으면 불편하지 않을까?.....
왠지 일본어로 된건 무슨 뜻인지 그냥 참 궁금하다.
워낙에 우리와 부딪치는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도대체 이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말하고 있는지 늘 궁금했다.
돌아가면 일본어 공부도 더 해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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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에서 그동안 열심히 버텨준 내 두 다리와 신발에게 감사의 뜻을 전해야 할 것같다.
아무 탈 없이 잘 견뎌준 덕분에 이렇게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다.
.....
한달동안 여기저기 참 많은 곳을 누비고 다녔지만,
루브르에 갔을 때가 아마 내 다리가 제일 고생했을 때였지 싶다.
그때는 아직 여행 초반이라 하루종일 걷는데 익숙하지도 않았었고
런던에서부터 내셔날 갤러리, 대영 박물관을 거쳐 파리에 넘어온 뒤로 오르세까지 봤던터라
그날 루브르를 둘러볼 때는 다리가 퉁퉁 붓는 것만 같았다. 후후....
집에 가면 이제 좀 쉬게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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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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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행 비행기 탑승이 시작되고 사람들은 천천히 줄을 서서 비행기에 오른다.
도쿄와도 작별할 시간이다....
오사카에서처럼 잠깐이라도 도쿄 도심을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호텔에서 잠만 자고 떠나서 아쉽긴 하지만
이제 일본은 내게 너무나 가까운 나라가 되버렸다.
비행기타고 12시간을 날아가야 하는 곳도 있는데 여기는 정말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으니 오늘의 아쉬움은 접어 놔도 괜찮지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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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내 카트 위에 있는 우리나라 신문들이 너무도 반갑다.
여행하느라 우리나라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신경도 안 쓰고 다녔었는데
그동안 너무 무심했던게 내심 미안한건지 이제와서 새삼 모든게 궁금해진다.
별 일은 없었을까.....요즘은 또 무슨 사건이 터졌나.....
신문에는 여전히 여야의 정치공방이 첫면을 장식하고 온갖 사건 사고가 전면에 가득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요란한' 우리나라 신문을 보고 있으니 정말 다 돌아온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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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비행...
활주로에 들어선 비행기는 이제 날아오를 준비를 한다.
엔진 소리가 점점 커지고 늘 그렇듯이 나는 또 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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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 25분 부산행....
동체가 작아서 활주로를 달릴 때 진동이 제법 컸지만
가볍게 떠오른 기체는 곧장 나리타 공항을 벗어나 하늘로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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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에서 부산까지 비행기로 몇 시간일까....
생각보다 제법 긴 2시간 정도.....비행도착 시간이 12시 25분에 맞춰져있다.
오사카까지 한 시간이었으니 그럴만도 한데....그래도 생각보다 비행시간이 긴것같다.
기내식이 또 나온다....아직 점심시간 안 됐는데....간식인가? 씨익...
내가 좋아하는 초밥이다.
이제 이것도 마지막 기내식이다....아쉽네....기내식은 참 맛있는데...
'우물우물....'
바다가 내려다 보인다.
푸른 바다에 하얀 파도가 부서지는 모습까지 보인다.
'이 바다만 건너면....조금만 있으면......'
...
...
12시 25분...
기내 방송이 나오고 드디어 천천히 고도가 낮아진다.
그리고 모든게 점점 또렷해진다.
산도 보이고....
군데군데 들어선 아파트 단지도 보이고....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도 보인다.
제 마음대로 지어진 집들이 만들어내는 회색의 풍경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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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익숙한 저 풍경들...
역시 멋없는 우리나라...
한 달 만에 보는 그리운 우리나라다.
모두 보고 싶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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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비행기 게이트가 열리고 통로를 따라 입국장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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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아주 천천히...
입국장으로 향하면서도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정말 도착한걸까....우리나라에 온걸까...'
...
기분이 참 묘하다.
고국의 품이라는게 이런 느낌인지...
기쁘기도 하고...반갑기도 하지만
한 달 만에 다시보는 이 모든 것들이 새삼 조금은 멀 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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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에 스탬프가 찍힌다.
'REPUBLIC OF KOREA, 대한민국, IMMIGRATION ADMITTED 2004. NOV. 02'
여권 한쪽 귀퉁이에 찍힌 네모난 스탬프.....
....
'고맙습니다'라는 내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퉁명스런 입국심사관을 보니 우리나라가 맞긴 맞나보다...
...
.....
'입국' 게이트를 통과해 공항 대합실에 서니 긴 한숨이 흘러나온다.
여행이 끝난게 아쉬워서인지....무사히 마무리한 안도감때문인지....
이 한숨의 의미가 무언지는 나도 정확히 설명을 못하겠다.
허탈함 때문일까....
한 달 전....
바로 이 자리에서 저기 '출국' 게이트를 지나 길고 긴 여행을 떠났었다.
....
이제 막 여행을 떠나려는 그때의 내 모습이 어른거린다.
상기된 표정에 다소 긴장한 듯 한 어깨....
사뭇 비장한 표정을 짓고 앉아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런 말이 없다.
...
내 인생 최고의 모험을 감행하던 날....나는 그렇게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 다시 이 자리에 서게된 지금...
하룻밤 사이에 꿔 버린 너무나 아름다운 꿈처럼
지나간 시간들은 거짓말같은 추억이 된 것 같다.
마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들처럼....
너무도 꿈만같았던 시간들이었기에
현실마저도 현실로 남지 못하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버렸다.
.....
.....
'이제 집에 가자.....'
여행기를 쓰고 나서....
내가 유럽 여행을 다녀오고 여행기를 처음 쓰기 시작한게 벌써 9개월 전 일이다.
그때 찍어온 사진만 해도 1,000 여장이고 지도와 팜플렛 그리고 각종 입장권과 영수증만 해도 한 가득이어서
이것들을 정리하는 데에만 꽤 많은 시간을 보냈었다.
처음부터 여행을 끝마치고 나면 여행기를 써 볼 생각이었기 때문에,
여행하는 동안에는 내가 생각하고 느낀점을 되도록 있는 그대로 남기려고 노력했었다.
틈나는대로 그때그때의 생각을 적어보기도 하고, 저녁에 침대에 누워 그날의 이야기를 정리한게
여행기를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됐던 것 같다.
...
처음에 이 여행기를 쓰기 시작했을 때는 작업이 이토록 길어질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었다.
길어야 두 달 안에 마무리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이 여행기를 마무리하기까지 자그마치 아홉 달이 걸렸다.
물론 중간에 학기가 시작되는 바람에 넉 달 정도는 작업을 별로 하지 못했던 탓도 있지만
하루하루 써야할 분량이 생각보다 만만한 것이 아니어서 작업 속도가 빠르지 못했다.
어떤 경우에는 하루 분량의 이야기를 쓰는데 일주일이 걸린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글을 길 게 쓰다보니 문장의 앞뒤 연결이나 표현같은 것도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읽어보고... 지우고... 다시 쓰고, 또 읽어보고... 지우고... 다시 쓰고... 이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겨우 작업을 마무리 하긴 했지만 사실은 지금도 고치고 싶은 부분이 너무 많다.
...
작업량이 생각보다 방대했지만 그래도 이 여행기만큼은 대강 쓰고 싶지가 않았다.
그때 그 느낌과 그 생각을 고스란히 모두 다 담아내고 싶어서
수첩도 꺼내보고 사진도 넘겨 보면서 열심히 그때를 회상해 글을 썼다.
마음같아서는 비디오카메라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장면을 다 표현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다가는 절반도 못쓰고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나름대로 충실하게 기억을 되살렸기 때문에 사소한 일들은 제쳐 두더라도 커다란 기억들은 거의 모두 담아냈다고 본다.
하지만 글로 남기는 데에도 한계가 있고, 잊혀지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추억들이기에
이렇게 짧은 이야기로 남길 수밖에 없는게 여전히 안타깝다.
...
작업 기간이 예상보다 많이 길어졌지만 덕분에 나는 지난 아홉 달 동안 다시 여행을 떠난 기분이었다.
기억을 더듬으며 한 자 한 자 자판을 두드리는 동안, 어느덧 나는 유럽의 거리를 걷고 있는 행복한 상상에 빠질 수 있었다.
여행기를 쓸 때만큼은 나는 다시 여행중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작업 기간이 길어지면서 처음보다 여행의 기억이 조금 흐려진게 아쉽기도했지만
여행의 추억은 여전히 내 가슴을 설레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
길게만 느껴졌던 한 달간의 유럽 여행을 다녀온지도 벌써 아홉 달이 지났지만
지금 생각해도 내가 정말 이런 여행을 했나 싶을정도로 꿈만 같았던 순간이었다.
그때의 그 자유스러움과 그때의 그 당돌함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가 '네 인생에서 가장 자유로웠던 순간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스물 네 살 때의 10월'이었다고 말할 거다.
이렇게 아름다운 기억을 가질 수 있어서 감사하고
그렇게 값진 경험을 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
앞으로 이 보다 더 아름다운 여행 이야기를 쓸 수 있길 바라며
내 인생에서 가장 자유로웠던 여행 이야기는 이걸로 끝내야 할 것같다.
2005. 7.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