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旅行/유럽배낭여행 | 2004

유럽배낭여행 [베네치아 - 피렌체]

제이우드 || 2023. 6. 15. 22:50

2004.10.25. 月  

 

아침 8시 10분....

 

피렌체로 가는 열차는 산타루치아 역에서 8시 34분에 출발한다.

20분이 채 안 남았다.

 

'이런....!!'

 

부시시 일어나 고양이 세수를 하고 주섬 주섬 짐을 꾸렸다.

어제 밤에 대충 짐을 싸 두긴했지만 비몽사몽 정신이 없다.

 

아름다운 베네치아의 밤을 함께했던 누나, 형들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눅룩한 아침 공기를 머금은 베네치아의 좁은 골목길을 달려 산타루치아 역으로 향하는 사이

시계는 이미 30분을 넘어 섰다.

 

챠오, 베네치아!!

부랴부랴 역에 도착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피렌체 행 열차가 떠나 버렸다.

눈 앞에서 서서히 멀어지는 열차의 뒷모습을 발만 동동 구르며 안타깝게 쳐다봤다.

 

'으으....안돼~ 거기 서~ 저거 놓치면 다음 열차까지 한참을 기다려야한단 말이야~~'

 

안타까움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 재빨리 다른 플랫폼을 살폈다.

일단 베네치아 산타루치아 역을 출발한 모든 열차는 바로 다음역인 Mestre 역에서 잠시 정차하기 때문에

아무 열차나 잡아 타고 Mestre로 건너가면 먼저 출발한 저 피렌체 행 열차를 잡아 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광판을 잽싸게 훑어보니 5분 뒤에 출발하는 열차가 있다.

'10번 플랫폼이라.....좋았어...'

 

당장 10번 플랫폼으로 뛰어가 열차에 올랐다.

 

우.....그런데 이놈이 5분이 지나도록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이탈리아 열차 시간표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는 사람들의 말처럼

시간에 맞춰 칼같이 움직이는 다른 나라의 열차 시스템에 비해서 이탈리아의 열차는 연착이 허다하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지금이냐고....!!

 

아무튼 5분이 더 지나서야 산타루치아 역을 빠져나간 열차는

이틀전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바다 위로 아스라히 뻗어있는 철로를 따라 천천히 달려갔다.

 

마치 현실과 꿈의 세계를 이어주는 듯한 이 철길을 따라....

아드리아 해라는 꿈의 바다에 떠 있는, 거짓말처럼 신비스러운 섬 베네치아에서 이틀동안 너무나 달콤한 꿈을 꾸고 나오는 것 같다.

 

그리고....

멀어져가는 베네치아의 아련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서서히 꿈에서 깨어나고 있다.

...

 

피렌체로...

열차가 Mestre역으로 서서히 접어드는 것과 동시에 당장 내려서 달려갈 준비를 하고 문 앞에 바짝 붙어 섰다.

마침 저기 플랫폼에 열차 한 대가 서 있는게 보아하니 저놈이 아까 그 피렌체 행 열차같다.

 

열차가 서고....

문이 열리고....

 

반대편 플랫폼을 향해 뛴다............!!

 

열차 앞에서 막 플랫폼을 정리하고 있는 차장에게 손가락으로 열차를 가리키며 냅다 소리를 질러 외친다.

 

"본 조르노~ 피렌체?"

"오~ 예스~"

"그라치에~"

 

좋아 좋아....

열차에 올라타자마자 곧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런걸 두고 간발의 차이라고 하는 건가? 후후

 

...

...

 

컴파트먼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가

옆 사람 입냄새가 너무 심해서 바람 숭숭 들어오는 복도에 나 앉았다.

무슨 양말을 씹어 먹었는지.....왠만해선 참아 보려고 했는데 이건 도저히 참을 수가 있어야지....

투덜투덜..

 

시끌벅적한 열차 안....

이탈리아는 유럽의 다른 국가와는 여러면에서 확연히 다른 것 같다.

많은 면에서 말이다.....아직은 딱히 뭐라 말하기 힘들지만....

 

...

이탈리아로 내려오니 날씨가 참 많이 따뜻해졌다.....

 

열차는 피렌체를 향해 달리고 우리의 산과 들을 많이 닮은 이탈리아의 풍경들이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간다.

끄적끄적 밀린 일기를 쓰는 동안 로미오와 줄리엣의 도시 베로나를 지났다.

...

 

FIRENZE S.M.N

정오를 지나서야 피렌체에 도착했다.

Firenze....

영문으로는 Florence.....일명 '꽃의 도시'

화사하게 핀 꽃처럼 한때 이탈리아에서 가장 번성했던 도시국가 중의 한 곳이다.

뭐 너무나 유명한 곳이지...

 

이탈리아의 시작을 베네치아에서 시작했지만

베네치아는 워낙에 특이한 곳이라 일상적인 이탈리아의 모습을 봤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제 피렌체에서부터 정말 이탈리아 본토를 가로지르게 됐는데

말 그대로 보이는 것이 전부 다 문화재라는 이탈리아이니만큼 아무래도 좀 부담스럽다.

  

뭐 부담없이 즐기자고......

부담없이....그러나 너무 가볍지 않게.....

점심무렵이지만 역안은 사람들로 꽤나 번잡하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키가 그렇게 크지는 않은 것 같다.

아무래도 라틴족이 게르만족보다 덩치가 작긴하지....

늘씬늘씬하던 위쪽의 아가씨들과 달리 아담하고 이목구비가 조각같은 미인들이 많은 것 같다. 헤헤

 

음...

처음 와보는 곳이지만 피렌체 역의 플랫폼은 왠지 눈에 익은 듯하다.

because...

바로 '준세이'가 밀라노로 떠난 '아오이'를 뒤쫓아 서성이던 그 곳이기 때문이지.

밀라노로 떠난 아오이를 뒤쫓아 급히 역으로 달려온 준세이가 사람들의 틈속에서 애타게 아오이를 찾던 장면이 기억난다.

그곳이 바로 여기였지...

 

'냉정과 열정사이'

 

피렌체가 워낙 유명한 곳이긴 하지만

내가 피렌체로 오게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소설과 영화 때문이다.

아마 최근에 이 소설이나 영화를 보고 피렌체를 좋아하게된 사람이 꽤 많을 거다.

누구나 한 번은 해 봄직한 약속이고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 봤을 그 사랑이야기에 다들 반해버렸지..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고.....

 

피렌체로 오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준세이'와 '쿠폴라'밖에 없었다.

쿠폴라...피렌체의 쿠폴라...

영화 속에서 마치 날아가는 듯한 화면으로 보여준 쿠폴라와 피렌체의 정경은 정말 잊을 수가 없었다.

눈부시게 반짝이던 쿠폴라의 지붕과 피렌체의 하늘....

 

언젠가 나도 꼭 저 쿠폴라 위에 올라가야지 하고 다짐했었는데....

생각보다 그 기회가 빨리 찾아온 것 같다. 어찌보면 너무나 뜻밖에 말이다.

....

 

아무튼 오늘 피렌체의 쿠폴라에 오를 생각을 하니 벌써 잔뜩 기대가 된다.....

 

준세이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그 쿠폴라에 오른다...

....

 

오늘은 내가 '준세이'가 되는거다.

  

 

라면과 김치 그리고 찬밥...

마중나온 민박집 아주머니를 따라 버스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글쎄....조그만 소도시를 생각했던 나에게 6차선 대로가 깔려있는 피렌체의 모습은 상당히 의외였다.

왠지 이탈리아하면 그 옛날 도시 공국이 그랬던 것처럼 격리되고 오래되고 뭔가....뭔가 그런 분위기일 것 같았는데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피렌체의 현대적인 모습이 조금은 엉뚱한 듯도 하다.

숙소는 조용한 주택가에 자리잡은 아주 고풍스럽고 멋진 다세대 주택이다.

막상 이런 집에서 사는 현지인들은 자신들의 거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지 모르겠지만,

밋밋한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이런 예쁜 건물은 정말 꿈같은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깨끗한 침대위에 배낭을 눕히고 '김제동'을 닮은 민박집 아주머니에게서 이런저런 얘기를 듣는다.

조선족 아주머니신데 특유의 연변사투리가 참 친근하다.

한국에서 이민간 교포들이 운영하는 영국, 프랑스의 민박집과 달리 이탈리아에는 조선족분들이 운영하는 민박집이 대부분인데,

화교상권에 속해있으면서도 한국인과 말이 통한다는 장점을 잘 살려 인지도가 꽤 높은편이다.

외국에서 나와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은 곧 내 친구가되고 내 가족도 되는거거든....

 

문든 생각난건데 한국학생들은 이렇게 한국인 민박을 이용해가면서 여행하는데

다른 나라 애들은 숙소를 어떻게 해결하면서 이동하는지 사뭇 궁금하다.

다들 호텔 아니면 유스호스텔만 이용할까? 흠...

....

 

짐을 풀자 슬슬 배가 고파온다.

어느덧 점심때가 지났다. 어쩐지...

 

"헐....배고파..."

"우리 라면 끓여먹을까?"

"아주머니 우리 라면끓여먹어도 되요?"

"거럼....그기 냄비 있지? 그기 끓여먹어....내 김치 내주께..."

 

동행한 친구가 스위스에서 사온 일본산 라면과 아주머니가 내주신 찬밥과 김치로 감격적인 점심식사를 했다.

라면과 찬밥 그리고 김치의 조화.....크.....이 얼마만에 접해보는 환상의 조합인가~

평소에는 라면 국물은 안 마시지만 오늘은 깨끗이 비웠다.

아~ 감동의 맛~!!

귀국하면 라면이나 잔뜩 끓여먹어야겠다.

삼겹살도 먹고 싶고.....흐흐

 

 

산타마리아 노벨라 교회

라면으로 행복해진 배를 두드리며 민박집을 나와 천천히 시가지로 향했다.

약간은 희뿌연 하늘...

아담한 골목길을 따라 저 멀리까지 똑같은 모양의 집들이 늘어서 있다.

이쪽을 봐도 똑같고 저쪽을 봐도 똑같다. 이거 좀 헷갈리는데....

피렌체의 골목에 적응하려면 또 한두 번 꽤나 두리번거려야할 듯하다.

장난감처럼 생긴 이쁜 자동차.

너무 귀엽게 생겼다. 굴러가기나 할지 모르겠다.

우리나라도 너무 큰 중형승용차만 만들지 말고 이렇게 디자인 이쁘게해서 만들면 잘 팔릴 텐데...

나는 요렇게 작은 차가 좋더라....

 

버스타고 온 길을 그대로 거슬러 올라가 다시 피렌체 중앙역앞에 당도했다.

지도의 출발선상이 중앙역이라 이제 여기서부터 하나하나 찾아가면 된다.

..

피렌체 중앙역 앞에 있는 산타마리아 노벨라 교회.

얼핏보기에도 세월의 무게가 잔뜩 뭍어나는 교회다.

벽돌 여기저기가 터지고 갈라져있는 뒷면의 모습과 달리,

교회를 빙 돌아 가면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깔끔한 정면을 만날 수 있다.

교회앞 넓은 광장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소였을거다.

오늘도 어김없이 잔디가 깔린 광장에는 여기저기 사람들이 모여있다.

벤치위에 꾀죄죄하게 드러누워 자는 사람도 있고...

삼삼오오 모여 쑥덕거리는 무리들도 있고...

음료수대 위에서 장난치고 있는 비둘기 두 마리가 아니라면 그렇게 산뜻한 분위기는 아닌것같다.

산타마리아 노벨라 교회 앞 지하도를 건너 산 로렌초 광장에 들어서면 피렌체 시가지 입구에 들어서게 된다.

산 로렌초 교회를 지나 두오모로 향하는 길은 테라스와 창문이 예쁜 집들이 길을따라 끊임없이 이어져있다.

...

길거리를 따라 쭉 늘어선 좌판을 구경하는 것도  심심찮은 볼거리를 제공해 준다.

축구 좀 제법 한다는 나라답게 클럽 유니폼이랑 휘장이 내걸린 좌판이 대부분인데,

물론 정품이 아니라 디자인이 좀 떨어지긴 하다...

일본 관광객을 겨냥한 상품으로 '나카타'의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도 종종 눈에 띄고.

그밖에 가짜 명품 핸드백이랑 밸트도 많고....각종 악세사리까지 여자들이 구경하면 꽤나 좋아할 만한 것이 가득하다.

물건이 좀 조잡한 듯도 하다만은.....

분위기가 우리나라 재래시장과 참 비슷하다.

그래서 그런지 북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왠지 정겹고...

..

길거리 환전소에 걸려있는 환율표.

우리나라 사람들이 여기서 돈 좀 쓰는가보다....

당당히 걸려있는 'KOREA REP.' 환율표....환율이 좀 올랐나?

 

그러고보니 지갑에 돈이 별로 없네....베네치아에서 계속 쓰기만 했으니..

'어디 인출기 없나?'

 

두오모 광장

살짝살짝 두오모의 끝이 보이다가도 다시 골목에 가려 안 보이기를 여러번...

드디어 두오모. 산타마리아 대성당 앞에 이르렀다.

 

'히야....참 크네...'

 

지오토의 종탑과 함께 우뚝 솟아있는 두오모 성당의 하얀 대리석 전면을 보자 가슴이 막 벅차오른다.

이거 생각보다 훨씬 크다. 고개를 뒤로 잔뜩 젖혀도 건물 전체가 한 눈에 안 들어오니....

아무튼 사진에서 보던 거랑 똑같은 모습의 두오모 성당이 내 눈앞에 있다는게 영 믿기지 않는다.

유럽에서 참 여러번 놀라는것같네....후훗

 

이 기쁨을 잠시 아이스크림과 함께...

근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작은 콘에 아이스크림 한 컵 떠서 성당 앞 계단에 앉아 감격에 젖는다.

....

미켈란젤로의 역작. '천국의 문' 

두오모 성당 앞에 있는 산 조반니 세례당의 세 개의 청동 부조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고등학교 윤리책에서 봤던 것 같은데...

사람들이 경쟁하듯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찰라 나도 한번 찍어 줬는데 아마 이게 진품은 아닐 듯싶다.

음....

저 문을 통과하면 천국으로 갈 수 있을까? 후후

산 조반니 세례당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두오모 광장을 가로질러갔다.

두오모 성당이 워낙 커서 한 눈에 다 바라볼 수가 없는 바람에

광장을 가로질러 한참을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니 뾰족한 쿠폴라가 드러난다.

 

'하.....저기 있구나 쿠폴라...'

 

수많은 인파속에 파묻혀 쿠폴라 앞에선 지금

이 공간과 이 시간이 그저 꿈만같을 뿐이다.

....

새하얀 외부와 달리 대성당 안은 별다른 장식없이 커다란 공허감이 존재하는 곳이다.

시야를 가리는 곳 없이 뻥 뚫려있는 곳이지만

어두운 조명과 함께 그윽한 기운이 사람들을 지긋이 눌러주고 있다.

 

...

아두운 조명사이로 저 높이 쿠폴라 천장에 그려진 미켈란 젤로의 '최후의 심판' 프레스코화만 밝게 빛나고 있다.

 

그런데 쿠폴라에 올라가려면 어디로 가야되지?

두리번 두리번...

...

쿠폴라에 올라가려면 성당안에서 나와 다시 반대편으로 돌아가야된단다. 여기가 아니었던거야?

어쨌든 성당 우측에 난 출구로 나오니 쿠폴라가 성큼 다가와 있다.

밖으로 나온김에 친구 선글라스를 빌려 쿠폴라를 배경으로 한 컷....후훗

 

쿠폴라에 오르다...

 

쿠폴라로 올라가는 입구는 성당 전면 좌측 바깥 측면에 있다.

성수기에는 길 게 줄을 설 정도라는데 오늘은 사람도 별로 없고 한산하다.

쿠폴라 위가 그렇게 넓은 곳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을 한꺼번에 올려보내지는 않는다는군...

....

그렇게 비싸지도 그렇다고 저렴하지도 않은 요금을 내고서

드디어 쿠폴라에 오르는 계단앞에 섰다.

 

그럼 이제 두오모의 463개의 계단을 타고 쿠폴라에 올라볼까나...

...

'하나, 둘, 셋, 넷, 다섯.............열일곱........스물 다섯.......서른 하나....서른 여섯...아니 서른 일곱인가?'

 

이런 곳을 오를 때면 사람들은 괜히 한 번씩 계단 숫자를 세어보기도 한다.

하지만 왠만한 인내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아마 100개도 못 헤아리고 중간에 포기해 버릴 거다. 후훗

 

나선형의 계단은 빙글빙글 가파른 수직 축을 이루며 나를 감아 올린다.

....

그동안 이곳을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의 발바닥에 의해 닳아 버린 계단을 하나 하나를 디디며 하늘로 향했다.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는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천천히....

계단 하나 하나를 정성스럽게 어루만지듯 그렇게 천천히 걸어 올랐다.

...

'히익...놀랬잖아...'

계단을 돌아 나가다가 왠 주교 모양의 대리석 조각상과 눈이 딱 마주쳐 약간 주춤했다.

우리나라 사찰의 사천왕상처럼 쿠폴라를 오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려는 뜻이 담긴 대리석상이 아닐까?

그냥 짐짓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은 죄가 많아서....후훗

약간 숨이 가파 올 때 쯤이면 쿠폴라 하단부에 이르르게 된다.

여기서부터는 성당 내부로 발코니처럼 길이 이어져 있기 때문에 저 아래로 예배당이 아슬아슬하게 내려다 보인다.

'후아....높다.....'

이제는 왠만해서 이렇게 교회나 성당을 보고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이렇게 위에서 내려다보니까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13세기 14세기 무렵에 이렇게 어마어마한 건축물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니 정말 혀를 내두르게 한다.

정말 뭐라 말해야 할지....

 

저 아래 조그맣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천상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천사의 입장이 된 듯하다.

혹시 이 성당을 만들 때 이런 성스러운 공간에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간자의 입장을 나타내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던건 아닐까.

...

이 성당 안에서 인간은 너무 작은 존재일 뿐이다.

여기서 고개를 들면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아주 가까이 바라볼 수 있다.

꿈틀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쏟아져 내릴 듯한 저 모습들....

지상 100m 위의 작업대에서 미켈란젤로는 무슨 생각을 하며 이 그림을 그렸을까?

 

지상의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의 엄숙함을 보여주기 위해 이렇게 높은 곳에 저 그림을 그렸을까

 

회화적인 아름다움에 더해 제작 자체가 난관이었을 이 프레스코화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잔잔하지만 요동치는 물결을 일으키는 것같다.

이제 다시 쿠폴라의 둥그스런 돔을 따라 계단을 밟아야 한다.

빛이 새어나오는 저 위.....

 

꿈에 그리던 쿠폴라가 저 위에 있다.

꿈에 그리던 그 하늘.....

 

.....

여기가 어딘지 생각났다.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를 보면 쿠폴라 계단을 오르는 준세이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쿠폴라에 오르기 바로 직전 그 장면에서 보여주던 그 계단이 바로 이곳이다.

담담히 계단을 오르던 준세이의 그 표정이 기억나는지..

 

텅빈 계단을 따라 영화 속의 준세이가 내 눈앞에서 다시 저 계단을 오르고 있다.

준세이의 뒷모습....

 

이제 거의 다 올라 온 것 같다.

..

 

쿠폴라....너무나 아름다운 그 곳...

좁은 계단을 빠져나와 드디어 쿠폴라 위에 올라 섰지만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와 갑자기 밝은 곳으로 나왔을 때 잠시 눈앞이 흐려지는 것처럼

나는 바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

사실은 피렌체의 하늘을 바라보기전에 잠시 마음의 준비를 하기위해 잠깐 시선을 묶어뒀다고 하는게 좋겠네...

 

너무나 꿈꿔왔던 어떤 대상을 접하기 직전에 잠시 마음을 추스리는 것처럼,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피렌체의 하늘을 만날 준비를 했다.

 

그리고 호흡이 식을 때쯤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만났다.

.....

 

....

 

.....

 

.....

 

.....

..

쿠폴라 위를 한 바퀴 돌면서 바라본 피렌체의 하늘은 정말 숨막히도록 아름다웠다.

영화에서 바라보던 그 하늘 보다 더....그 지붕 보다 더....

 

햇볕이 내리쬐지 않아 눈부신 주황색은 아니지만

안개가 살짝 내려앉은 파스텔톤의 주황색도 충분히 아름답다.

 

'하....좋구나.....피식'

 

살살 부는 바람이 유난히도 달콤하다.

피렌체의 두오모를 사랑의 두오모라고 한다지....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냉정과 열정사이'의 영향 때문인지

쿠폴라 위의 하얀 대리석 기둥위엔 유난히 '사랑낙서'가 많다.

특히나 일본사람들과 우리나라 사람의 낙서가 더 많고...

 

이별을 아쉬워하는 흔적...

아픔에 눈물짓는 자국...

현재를 소중히 여기는 낙서...

서로의 미래를 다짐하는 서약...

누군가를 수줍게 그리는 흔적들....

 

이 수많은 낙서처럼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랑하고 있다.

아파하기도 하고....그리워하기도 하고...

 

사랑이란 참 복잡미묘하다...

 

사랑이란.....

 

....

 

....

 

....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을 두고 내려가기가 싫어서 한시간이 넘게 쿠폴라 위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 한 시간 동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서서 사진을 찍고 낙서를 남기고 사랑을 속삭이다 내려갔다.

다들 행복해 보이네....

 

기다릴 '아오이'가 있었다면 더 설레였을텐데.....나의 아오이는 지금....지금.....

 

...

....

이제 더 이상 쿠폴라에 올라 오는 사람도 없다.

아까부터 해지기만 기다리면서 혹시나 멋진 일몰을 구경할 수나 있을까 하고 기대했었는데

구름 낀 하늘은 옅은 노을만 살짝 보여줄 뿐이다.

 

'그래....여기까지인가보다...'

 

내려가야하는데 도무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지금 내려가면 이곳에 내가 다시 설 수 있을까?

10년 뒤....아니면 20년 뒤....아니면 다시는 못 오는 걸까..

당장 내일 다시 올라올 수도 있지만 그렇게 이 소중한 기억을 묽히고 싶진 않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멋 훗날 나의 '아오이'와 함께 이곳에 다시 서게 되길 기원하면서 아쉽게 하늘을 떠나보냈다.

 

'나중에 보자.....아주 나중에...............'

 

베키오 다리

두오모에서 내려와 숙소로 그냥 돌아가려다가 약간의 짬을 이용해

근처 베키오 다리까지 아르노 강을 따라 걸었다.

....

밤의 피렌체는 이렇게 고급스러운걸까?

베키오 다리위의 보석상들이 진열해놓은 귀금속들이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글쎄 보석에 대해서 아는게 별로 없어서...

아무튼 다이아몬드나, 루비, 금목걸이, 은 귀걸이....없는게 없다.

 

'보자 저게 0이 몇 개냐.....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그럼 우리나라 돈으로....'

 

평소 우리가 흔히 쓰는 돈의 개념을 훨씬 뛰어넘는 고가의 귀금속들이 주렁주렁 널려있는데

구경만 해도 부담스러운 가격들이다. 후후

그래도 이쁘긴 이쁘네....

개인적으로 막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보다 단순한 디자인이 좋더라...

신용카드로 하나 끊어가? 후후

반짝이는 보석들을 구경하는 사이 피렌체의 하늘엔 어둠이 내려앉았다.

유유히 흐르는 아르노강....

 

오늘 또 이렇게 하루가 간다.

 

여행 25일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