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0.15. 金
아침 8시....
캐나다 친구가 위층에서 뒤척이는 바람에 새벽에 몇 번 깨기는 했지만
역시 유스 침대가 아늑하고 뽀송뽀송하니 잠이 잘 오는 것 같다.
위층 사람이 뒤척이면 침대가 삐거덕 거린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침대가 좀 헐거운가보다.....
....
퓌센 행 RE
8시 51분 열차는 퓌센까지 바로 직행하지만 뭐 그리 급한 것도 아니고해서
역에서 'wrust 바게뜨'....일명 '소시지 바게뜨'로 아침을 때웠다.
퓌센까지는 한 시간에 한 대 꼴로 열차가 있으니까 다음 열차 타고 가면 되겠다..
유스에서 물병을 안 가져와서 또 한 병 샀다.
이거 유럽에서는 물 챙기는 것도 일이다. 유스에서는 어디 물 받아올 때도 없고....
유럽 수돗물은 식수로 마셔도 된다지만 영 찝찝해서 도저히 그러진 못하겠다.
탄산 없는 'volvic'....오렌지 향 첨가.
'에비앙'보다는 싼 물이지만 여하튼 이틀만에 탄산 없는 물을 마시니까 정말 좋다.
물 마시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원.....
....
바로가는 열차가 아니라서 중간에 한 번 갈아타야한다.
사람도 별로 없고....
한산한 객실 내부에 햇살만 한 가득이다.
......
한 시간쯤 가서 내린 작은 역...
플랫폼에 사람이 두 세 명밖에 없는 아주 조용한 역이다.
"저기....퓌센 가는 열차 곧 오죠?"
"오늘은 금요일이라 한 시간 뒤에 옵니다..."
"에?"
열차가 올 때가 지난 것 같은데 아무런 기척이 없길래 역무원 아저씨게 물어봤더니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이게 뭔 소린가....'
그제서야 플랫폼에 붙어 있는 타임테이블을 다시 보니까
열차편 뒤에 작은 글씨로 '토요일', '일요일' 이렇게 적혀 있다........실수다.
주중 스케줄과 주말 스케줄이 다른 열차가 있다는걸 깜빡해버렸다.
....
다음 열차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
역 밖으로 나가니까 조용한 마을 전경이 드러난다.
도로에는 차량도 뜸하고 거리는 누가 일부러 치워놓기라도 한 듯 정말 깨끗하다.
간간히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저씨랑 유모차를 밀고 가는 아주머니만 있을뿐 거리도 한산하다.
게다가 단풍이 노랗게 물든 멋진 가로수도 있고.....
....
첫인상에 그냥 한 번쯤 살고싶은 마음이 드는 정말 괜찮은 마을 같다.
이 동네 사람들은 이렇게 좋은 곳에 사니까 얼마나 좋을까....
이런걸 보면 역시 독일사람들 참 검소하고 단정하다.
공기 좋고...깨끗하고...조용하고...한 번쯤은 이런 마을에 살면 참 좋을 것 같네....
.....
전화도 하고 역 대합실에서 잠깐 앉아 있으니까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한 시간 쯤이야.....
다시 열차를 타고 달리니까 창 밖으로 수채화같은 독일 전원 풍경이 펼쳐진다.
맑은 코발트빛 하늘 아래로 초록의 들판이 끝없이 너울거리는 모습이 정말 시원스럽다.
정말 파랗다....
말 타고 저 끝까지 막 달려가고픈.....
.....
.....
독일의 풍경이 이렇게 목가적이고 아름다울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멋지네.....'
퓌센
푸른 들판을 한 참 달려가면 갑자기 우뚝 솟아있는 산악지형이 나타난다.
여기가 바로 '백조의 성'이라고 불리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있는 퓌센.
열차에서 내리자 눈이라도 뿌릴 듯이 하늘이 갑자기 흐려졌다.
산악지대라 그런지 저만치 보이는 산자락에 구름이 낮게 걸려있는게 제법 스산하다.
여기서는 성 아래 매표소까지 다시 버스를 타고 가야된다.
유명한 관광지답게 사람들이 제법 북적거린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이랑 '호엔슈방가우 성' 둘 다 둘러 볼 생각이었는데
의외로 폐장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노이슈반슈타인 성' 하나만 봐야겠다.
입장료도 8유로씩이나 하고...
산기슭이라 더 쌀쌀하다.
성까지 걸어서 40분이라니까 핫초코나 하나 사들고 천천히 올라가야겠다.
쭉쭉 뻗은 나무들 사이로 구불구불 잘 포장된 산길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수종이 우리나라의 그것과는 좀 다르지만 분위기는 우리나라 숲과 꽤 비슷한 것 같다.
이렇게 숲길을 걷는 것도 참 오랜만이네.....
터벅터벅 걷다보면 유유히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다.
경사가 그렇게 급한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차타고 올라가는 기분도 꽤 괜찮을 것 같다.
.....
숨이 조금 가파질무렵이면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음....저기만 돌아가면 되겠네.....'
노이슈반슈타인 성
드디어 나무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노이슈반슈타인 성'.
가까이서 보니까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웅장하다.
19세기에 지어진 성이라 고풍스러운 멋은 없지만 일단 세련되고 깔끔한 외양이 눈에 확 띈다.
120여년 전에 지어졌다지만 얼핏보기에는 50년도 채 안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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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가 성 입구에서 바라보는 전경이 정말 멋있다.
성벽 밑은 깎아지를 듯한 절벽이고 저 멀리 푸른 들판이 뾰족한 나무를 몰고서 산기슭까지 뻗어있다.
바이에른 알프스 기슭이라 산세가 제법 가파르다.
바람이 제법 쌀쌀하다.....춥네!!
계곡에서 휘몰아치는 찬바람을 피해 성문 안으로 들어서니까
눈길 닿는 곳은 전부 마치 잘 만들어진 하나의 영화 세트장처럼 생겼다.
높은 첨탑이랑 자로 잰 듯 반듯반듯한 성채의 모양이 아주 두드러진다.
그리고 성 안으로 들어서서 왼쪽편에는 아주 눈에 익은 돌계단이 있다.
왠지 모르게 어디서 많이 본 것처럼 낯이 익다.
무슨 영화에 이런 계단이 등장했었나? 아니면 책에서 이런 모양의 돌계단을 묘사한 적이 있었던가...?
신데렐라가 무도회장에서 빠져나와 뛰어내려가던 계단 같기도 하고....
미녀와 야수에서 미녀가 거닐던 그 계단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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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빨간 담쟁이가 붙어 있어 아주 그럴 듯한 계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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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랜드의 'Fantasy Land' 성이 이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모델로 만들어 졌다지 아마...
정말이지 뾰족한 삼각형의 정면이 판에 밖은 듯 꼭 닮았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이 성의 유래를 알고 나면 성을 대하는 느낌이 사뭇 달라진다.
이 성은 19세기 말, 바이에른 왕국의 루드비히 2세가 17년이라는 세월을 쏟아부어 만들어낸 성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루드비히 2세는 이 성이 완성되고 3개월 만에 호수에 빠져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니까 17년간 막대한 부를 쏟아부어 만들어 냈지만 고작 성에서는 3개월을 살다가 저 세상 사람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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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비히 2세 자신은 바그너의 오페라에 무척 심취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 성도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중 '백조의 전설'에서 영감을 얻어 지어진 것이고
성 안 곳곳에 백조의 모습과 오페라의 한 장면이 벽화로 남아있다.
그래서 이 성이 '백조의 성'이라는 '예명'을 가지게 된 것이다.
공사과정에서 지형적인 문제점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사고가 있었고,
엄청난 공사비로 인한 재정적 곤란도 무릅쓰고 무려 17년간이나 공사를 강행한 루드비히 2세에게
약간 정신분열적인 면이 있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정신분열적인 증세가 있었든 없었든......
이 성을 만들어낸 주재료는 일종의 '광기'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 성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름답다기 보다는 어둡고 슬픈 그늘이 느껴진다.
한 인간의 광기가 말이다......
.......
성채 내부는 가이드 투어만 가능하다.
입장권에 있는 번호 순서대로 한 번에 제한된 인원만이 성채 내부를 관람할 수 있다.
내부 사진 촬영은 절대불가.....
이 성은 아직 완공된 성이 아니란다.
그래서 아직 빈 방이 대부분이다.
루드비히 2세가 머물렀던 방은 정말 화려하다.
놀라운 점은 당시 이미 수세식 화장실과 정교한 창문 섀시도 사용했다는 것이다.
산 속에서 파이프로 물을 끌어들여 성 안에 깨끗한 물을 공급했단다.
그리고 작은 엘리베이터로 주방에서 만든 음식을 방까지 올리고 내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종의 룸서비스처럼 말이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왕이라는 사람들은 이렇게 화려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불과 100여년 전일 뿐인데...
......
성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정말 한 폭의 초록 수채화같다.
독일은 정말 들판이 아름다운 나라다....
창밖 저 멀리 계곡을 가로지르는 아찔한 다리가 보인다.
저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이 성의 풍경이 그렇게 아름답다지 아마....
나중에 저기도 가야겠네...
성의 맨 꼭대기에는 제법 넓은 연주회장이 있다.
당시 여기서 음악가들을 불러놓고 연주회도 열고 할 생각이었으나
정작 루드비히 2세 생전에는 이곳에서 연주회를 연 적이 없다고 한다.
어찌보면 루드비히 2세는 많은 것을 가졌지만 너무도 불행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무엇이 그 사람을 이런 집착 속으로 밀어 넣었는지 참 모를 일이다.
마지막으로 들른 주방은 19세기 주방이지만 있을건 다 갖추고 있다.
밸브만 틀면 물이 흘러나왔고...오븐도 있고...각종 팬이며 식기류가 지금거랑 거의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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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광기는 때로는 사람을 오싹하게 만든다.
가파른 절벽위에 마치 동화속 성의 모습을 만들어낸 루드비히 2세....
자기만의 동화 속 궁전을 갖고 싶었던 한 인간의 광기는
아름답지만 슬픈 피조물을 만들어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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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서 나와 아까 그 계곡에 있던 다리까지는 걸어서 조금 더 가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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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로 가는 길에 저 아래 '호엔슈방가우 성'과 호수가 어우러진 멋진 풍경이 있다.
호수며 산세가 뭐랄까.....원시적이고 깨끗해 보인다고 해야할까...
영국이나 프랑스, 벨기에와 달리 독일은 푸른 들판 뿐만 아니라 숲과 산이 많은편인데
숲도 짙을뿐더러 오염된 곳 없이 청정하게 잘 가꿔져있어 참 근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
계곡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가로질러 있는 이 다리 이름은 '마리엔 다리'다.
'이거 생각보다 훨씬 높은데......튼튼하지?'
다리 위에서 바라본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정말 동화속에서나 나올만큼 환상적인 모습이다.
정말 가까이서 봤을 때보다 이렇게 멀리두고 바라보니까 더 신비로운 것 같다.
저 절벽 위에 어떻게 저런 성을 지을 수 있었을까...
.......
그런데 여기 너무 아찔하다....
말은 안 해서 그렇지 지금 계속 심장이 콩닥거리고 있다.
난간을 집고 고개만 살짝 내밀어 밑을 쳐다보는데 어휴....
'이 다리 정말 튼튼한거지...?'
....
다리 가운데 서 있기는 조금 무서워 다리 반대 끝 난간에 서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왠 학생이 옆에서 카메라를 들고 우물우물 하는 폼이 사진 좀 찍어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모양이다.
"사진 찍어 줄까?"
"예, 부탁드려요..."
이놈 어지간히 부끄럼도 많네...
"음...어디서 왔니?"
"러시아에서 왔습니다..."
"오...러시아? 그래 멀리서 왔네...."
"재패니즈 굳~ 땡큐~"
으이구...또 재패니즈란다.
"노 재패니즈....나 한국사람이야!!"
...........
놀라운 역사는 때로는 인간의 광기로 인해 이뤄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언가에 미쳐 버리는 그 열정만큼은 대단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과정이야 어찌됐든 결과론적으로 한 사람의 광기가 만들어낸 피조물치고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매력적인 성임에 틀림없다.
멋있어.....
날씨가 흐릿해져 내려올 때는 마리엔 다리 근처에서 매표소까지 미니버스를 타고 내려왔다.
'호엔슈방가우 성'은 아쉽지만 남겨두고 떠나야겠다.
남겨둔게 있어야 아쉬움이 남지....다 보고 가면 재미없다.
'노이슈반슈타인 성'.....'백조의 성'.....
고풍스러운 멋이라든지 역사적인 고뇌가 뭍어 있는 성은 아니지만
한 사람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피조물로서 감상하기에는 충분히 매력있는 곳이다.
.........
퓌센 역까지 다시 버스를 타고 나가야 한다.
버스에 사람이 한 가득이다.
.........
뮌헨으로 돌아가기
열차가 들어오려면 시간이 조금 남았다.
성에서는 날씨가 흐렸는데 여기는 햇살도 따스한게 환하기만 하네....
잠깐 선로 위에 내려가서 사진도 찍으면서 열차를 기다렸다.
시골역 냄새가 물씬 풍기는 역사가 아주 마음에 든다.
언젠가 선로가 쭉 뻗어있는 사진을 하나 찍고 싶었는데
카메라가 좀 더 좋았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기분 좋게 한 컷 찍었다.
유럽은 참 사진 찍을 거리가 많단 말이야....
.....
뮌헨까지는 직행이다.
새벽잠을 설쳤더니 피곤하다.
갈 때는 한 숨 자야겠다.
....
유스의 한국인들
뮌헨에 도착해 역 근처 터키 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다.
이름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밥이 있길래 먹어봤는데
양고기 다진 거랑 감자, 당근, 콩, 피망이 들어있어서 먹을만 하다.
마침 근처에 아랍계 슈퍼마켓이 있어 사과랑 오렌지도 샀다.
그러고 보니 과일 먹은지도 꽤 오래됐다. 파리에서 포도 먹은 이후로 처음이네....
......
유스로 돌아가니까 파리에서 같은 숙소에 있던 누나가 같은 방에 들어와있다.
방에 혼자 있는데 외국 남자들만 우글우글해서 무서웠다나....후후
뭐 이국땅에서는 처음 보는 한국사람이라도 서로가 다 그리운 '동포'가 되는 마당에
안면이 있는 사람을 다시 만나니까 되게 반갑데....
오렌지를 나눠먹으며 각자 뮌헨까지 오게된 여정을 되밟아가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자기를 '안드레'라며 소개하는 눈이 크고 발랄한 친구가 새로 들어왔는데
사람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청하면서 이런저런 농담을 던지는 재밌는 친구다.
'안드레' 말고도 덩치 좋은 노르웨이 아저씨 한 명이랑
영어로 쉴 새없이 사람들에게 연설을 해대는 중국 아저씨 한 명이 새로 들어와 있다.
유스에 왠 아저씨들이 이리 많아...
그리고 중국 아저씨는 사람 인사하는데 퉁명스럽게 튕기네....기분나쁘게...
.....
술마시러 가자는 아저씨들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자기 전에 잠시 프런트에 내려가 자판기에서 사과쥬스 한 병 뽑아먹었다.
사과주스가 맥주병만하다....크네....
이제 내일 밤이면 독일도 안녕이다.
여행 15일째.....절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