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0.14. 木
Musa영감님과 작별..
아침 9시....
간밤에 방이 조금 싸늘했지만 그럭저럭 잘 잤다.
평생 이불 생활을 해 온 나에게 침대 메트리스 안은 좀 싸늘한 느낌이 없지 않지만
침대 속은 희한하게도 춥지도 않고 그렇다고 따뜻하지도 않은 묘한 온도다.
영감님은 아침부터 빵사러 가셨나보다.
'음....이거 유스로 간다고 어떻게 말을 꺼낸다....화내시지 않을까?'
.....
아침은 빵이랑...버터...쥬스.....홍차...
홍차를 홀짝홀짝 마시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시내 쪽 유스로 방을 옮겼으면 하는데요..."
"아니...왜?...여기 있으면 내가 이것저것 설명도 해 줄 수 있는데..."
"음....친절하게 대접해 주신건 감사한데요....좀 더 사람이 많은....유스에서 지내는게 좋겠어요..."
"퓌센 갈 때도 여기 근처에서 가면 빠른데....."
"........"
"........"
한동안 말이 없으신걸 보니 조금 섭섭하신 것 같다.
"죄송해요...."
"아니야....괜찮아...."
.....
배낭을 메고 아파트 문을 나서는데 조금 서운하다.
"뮌헨에서 좋은 시간 보내고 가요....멀리 안 나가네....."
"감사했습니다....안녕히 계세요"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는건 어디나 다 마찬가진 것 같다.
혼자 저렇게 사시니 가끔 이렇게 찾아오는 나같은 배낭객들이 무척이나 반가우실텐데
이제 또 뮌헨 역에서 어제처럼 그렇게 여행객들을 기다리며 서 계시겠지..
'무사 영감님....건강하세요...'
뮌헨에서 유스찾기
"에?...방이 없다고요?"
"죄송합니다....혹시 오늘 예약하신 분들이 4시까지 안 오시면 방을 드릴순 있습니다..."
........
배낭을 메고 뮌헨 역 주변을 헤맨지도 이제 거의 한 시간이 다 돼 간다.
주말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찾아가는 유스마다 방이 없단다.
'으으.....뭐 이래? 늘 방은 있었는데.....'
배낭 메고 숙소구하러 이 골목 저 골목 돌아다니는게 이렇게 힘든줄 몰랐다.
생각해보니까 배낭을 메고서 이렇게 한 시간이 넘게 돌아다닌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어깨는 아파오고.....짜증은 나고.....
.........
혹시나 해서 작은 호텔에 들어갔더니만 역시나 만만한 가격이 아니다.
..
12시..
거의 한 시간 반을 돌아다닌 끝에 뮌헨 역에서 5분 거리의 유스에서 겨우 도미토리 12인실 방을 구했다.
휴....대도시에서 숙소 구하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요즘이 그나마 비수기라 천만 다행이지 예약도 안 하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숙소를 찾아다닌다고
늘 방이 나를 기다려 주는건 아닌 것 같다.
미리 미리 전화를 해보고 움직이는 편이 훨씬 현명하다.
12인실.....점심 때라 그런지 아무도 없다.
햐....근데 시트 어질러져 있는게 장난이 아니다. 옷가지들은 아무렇게나 널려있고...
배낭이랑 슬리퍼도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브뤼셀이랑 하이델베르크 유스에서는 사람 없는 빈 방에만 있었기 때문에
눈 앞에 이런 돼지우리 같은 광경이 펼쳐지니 다소 당황스럽다.
쿠.....대단하다.
뭐 12인실이라 굉장히 크고 갑갑할줄 알았는데 다행이 생각보다 널찍널찍하고
아직까지 이상한 몸냄새같은 것도 안 나는 것 같다.
근데....내 침대를 쓰는 사람이 아직 있는 것 같네...
침대에서 금방 일어나 나간 것처럼 시트가 널부러져 있고 .....침대 밑에 가방도 그대로고...
아직 체크아웃을 안 했나?
'일단 배낭은 여기 두고.....이제 뭘 하나....
점심 먹고.....
아....그전에 토요일 저녁에 프라하 넘어가는 쿠셋 예약부터 해야겠다...
예약하고 점심 먹고...그 다음에 한 바퀴 돌아야지...'
.....
프라하 쿠셋 예약
뮌헨 다음의 목적지 프라하까지는 토요일 야간 쿠셋을 타고 이동할 예정이다.
아무래도 주말에 이동하기 때문에 빨리 예약하는게 좋다.
특히나 사람들이 야간 이동을 선호하는 구간이기 때문에 더더욱 서두르는게 좋을 것 같다.
체코가 유레일이 통용되지 않기 때문에 이 구간은 추가 요금이 필요하다.
쿠셋 예약이랑 독일 국경역 Cheb에서 프라하까지 별도의 티켓도 끊어야 하는 구간이다.
음.....타임테이블을 보니까 23시 8분에 야간 열차가 있다.
'16th/10. 23h 8m. Munchen - Cheb (with Eurail Pass) - Praha. Couchette, please.'
경험상 이런 예약을 할 때는 글로 써서 보여주는게 제일 간편하고 정확한 것 같아서
타임테이블 밑에다가 쭉 적어서 내밀었더니 역시나 금방 알아보고 예약을 해 준다.
혹시나 해서 다시 몇 마디 확인을 한 다음에 결제는 신용카드로......
이런 때를 대비해서 가족 신용카드도 하나 만들어 왔지....
무사히 예약 끝.
"당케~"
예약 티켓을 작은 가방 깊숙히 쑤셔넣고 아까 방 구하러 돌아다니다가 눈여겨 본 터키식당에 들렀다.
아까 지나가는데 고소한 냄새가 풍기더라고.....가격도 싸고....
"케밥 샌드위치 하나요~"
말이 샌드위치지 커다란 빵 안에 양고기 듬뿍, 양파, 양배추, 고추가 한 가득이다.
게르만 계통인 독일 남부에서 오스트리아 쪽에는 터키계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영국에 가면 인도 사람이 많고 프랑스에 가면 흑인들이 많은 것 처럼.....
그래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 가면 어렵잖게 터키 음식점을 볼 수 있는데
이 터키 음식이 의외로 우리나라 사람의 입맛에 잘 맛는다고 한다.
아무래도 아시아 계통에 가깝고 음식에 사용하는 양념이나 소스도 매콤한게 많기 때문이라는데
한 두 번 먹어보니까 정말 가격도 저렴하고 입맛에도 잘 맞는 것 같다.
여행가면 음식이 입에 안 맞아서 고생이 많다고 하던데...
다행히 아직까지 '못먹겠다' 싶은 음식은 없었다.
뭐 매일 이것 저것 처음 보는 음식만 먹고 다니니까 다 맛있고 특이해서 좋기만 한데...
아직 고생을 덜 해서 그런가?
이 케밥 샌드위치도 너무 맛있다.....후후
뮌헨 역 주변은 호텔이랑 작은 레스토랑이 밀집된 곳이라 거리를 걷다보면
구경거리가 참 많다.....후후
마리엔 광장
벤츠의 나라답게 택시도 모두 중형 벤츠다.
우리나라 중형 모범택시처럼 하나같이 고급스러운 광채가 난다. 아마 기본요금도 비싸겠지?....
그러고보니 파리에서 독일로 이렇게 넘어 오니까 차들이 많이 커진 것 같다.
파리에서는 대부분이 프랑스의 국민 브랜드 '푸조'의 중소형 차들을 타고다니던데
자동차 왕국 독일에 오니까 BMW, 벤츠, 아우디.....온통 중대형 차들이 굴러다닌다.
아무래도 게르만 계통이 체격이 좋기도 하지만 차를 선택하는 기준에 있어서도 나라별로 조금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반짝이는 물줄기를 뿜어내는 칼스 광장의 분수대....
오늘은 어제보다 날씨가 많이 풀려서 그런지 분수대의 물줄기가 제법 시원해 보인다.
칼스문을 들어서면 여기서부터 마리엔 광장까지 보행자 전용 도로인 노이하우저 거리가 펼쳐진다.
뮌헨 최고의 번화가답게 넓은 거리가 사람들로 한 가득 넘쳐난다.
5층 정도 높이의 건물들이 길을 따라 쭉 서있는 여기도 주로 의류매장....레스토랑....등등이 대부분이다.
노이하우저 거리에는 런던이나 파리같으면 있음직한 거리의 악사나 거리의 예술가는 보이지 않는다.
한 두 명 정도는 있음직도 한데 없는걸 보면.....역시나 독일 사람들 좀 딱딱하긴 하다.
....
쇼핑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그렇게 볼거리가 많은 곳 같지는 않다.
이제는 슬슬 소위 유럽의 '거리'라고 하는 곳에 눈이 너무 익숙해졌는지
수많은 독일인들 틈을 걷고 있어도 서울 명동 거리를 걷는 것 마냥 그저 담담하다.
이러면 재미 없는데....
프라우엔 교회를 지나면 너무나도 뾰족하게 솟아있는 뮌헨 신시청사를 만날 수 있다.
여기가 바로 마리엔 광장...
19세기 네오고딕양식으로 지어진 이 시청사의 첫인상은 약간 괴기스러웠다.
마치 쾰른 대성당의 그런 괴기스러움과 유사한.....
짙은 암회색이 뿜어내는 왠지 무겁고 음침한 기운이 물씬 배어있는 건물이다.
여기도 마침 보수공사 때문에 한쪽을 큰 차일로 덮어 놨는데...
건물이 어찌나 높고 큰지 카메라 각도 잡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유럽의 몇몇 고건물들은 어떻게 이렇게 하나같이 크고 웅장한지 모르겠다.
'음....이제 어디로 간다...'
표지판 앞에 서서 잠시 고민했다.
솔직히 말해서 뮌헨은 그렇게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도시는 아니다.
그저 퓌센이랑 프라하를 가는 기착지로서의 역할이 더 큰 도시이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진 않았다.
그나마 뮌헨에서 꼭 가보고 싶은 곳으로 '독일박물관'이 있긴 한데 거기는 토요일에 갈거고....
독일에 온 만큼 '다카우 수용소'도 가보고 싶은데 지금가면 개장시간 안에 다 보고 나올지도 모르겠다.
'어디로 가나.....'
Englischer Garten
결국 발길이 향한 곳은 영국 정원...
마리엔 광장에서 U-bahn을 타고 가야한다.
독일은 참 양심적인 사회인가 보다. 아니면 나라가 정말 부자이거나....
U-bahn을 타는데 변변한 개찰구 하나도 없다.
그저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 앞에 딸랑 펀칭기 하나 갖다 놓은게 전부다.
런던이나 파리에서는 그나마 티켓이 있어야 개찰구를 통과할 수 있었지만,
여기는 그런 단순한 물리적 제재장치마저도 없으니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막말로 눈 딱 감고 무임승차해 버리면 그걸로 끝이다.
물론 검표원에게 걸리면 아까운 벌금을 내야겠지만 그건 정말 '재수 옴 붙은' 경우일 뿐이다.
아무튼 참.....특이하고, 놀랍고, 부럽고, 이상하기도 하다.
......
차마 무임승차는 할 수 없어 펀칭기에 티켓을 집어 넣었다.
'찍~ 팅'
U-bahn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와 또 잠시 방향감각을 상실해 얼마간 반대편으로 헤맸다.
'어.....여기가 아니네....'
큰 대로를 따라 5분정도 걷다가 다시 골목을 가로질러 겨우 공원에 들어섰다.
이거 왜 이리 꼭꼭 숨어있는건지...
공식 명칭은 '영국식 정원'인데 진짜 정원은 아니고....큰 공원이다.
공원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빽빽한 건물들 사이를 걷다가 갑자기 초록의 숲을 마주하게 되는 곳이다.
'어...개울이네...'
입구에 들어서면 작은 나무다리가 있는 맑은 개울이 공원을 가로지르고 있다.
유럽에서 이렇게 맑은 개울을 보기는 처음인 것 같다.
여느 시골 개울가에 가면 맡을 수 있는 물기 뭍은 촉촉한 풀냄새가 아주 향그럽다.
'영국식'이라는 이름답게 공원이 대체로 런던 하이드 파크와 많이 닮았다.
푸른 잔디에 아름드리 나무들이 서 있는 모습이 꽤 비슷한데,
여기는 하이드 파크보다 '숲'의 냄새가 좀 더 많이 나는 공원인 것 같다.
아무튼 여기도 정말 넓다.
잠시 벤치에 앉아서 휴식....
역시나 공원에 오면 느긋하게 쉴 수 있어서 좋다.
드넓은 잔디에 무성한 나무들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 진다.
.....
여기는 유난히 개를 데리고 노는 사람이 많다.
저기....어떤 아저씨...
공을 던지면 개가 냉큼 달려가서 물어 온다.
또 던지면 또 물어오고.....또 던지면 또 냅다 달려가서 물어오고....
다른 방향도 아니고 계속 같은 방향으로만 던진다..
개가 불쌍하다....
지루하지 않게 다른 방향으로라도 던져 주든가....후후
.....
바람 한 점 없이 날씨가 너무 깨끗하다.
또 슬슬 공원 거닐기.....
.....
.....
공원 한 쪽 언덕 위에 하얀 기둥으로 된 정각같은 곳이 있길래 올라가봤더니 여기저기 낙서가 가득하다.
햇빛 따뜻한 기둥 밑에선 한 커플이 주위사람 아랑곳 하지 않고 여기 '쪽~' 저기 '쪽~' 열심히 키스 중이고...
'짜식....그렇게 좋아? 후후'
그대 '니르바나'를 꿈꾸는가?....
......
뭐가 이 사람을 이토록 자학하게 만들었을까?
돈?....실패한 사랑?.....그저 심각한 자기 비판?.....아니면 다른 무언가였을까..
.........
세계 어딜가나 이렇게 죽고싶다는 낙서가 많은걸 보면
누구나 살다보면 정말 죽고싶을 만큼 괴로운 일들이 참 많은가 보다.....
가끔.....주위를 둘러봐도 내 편은 아무도 없는 것 같고...
그동안 살아온 지난날이 마냥 후회스러울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메마른 사막 한 가운데 홀로 남겨진 것처럼 괴로운게 사실이지만
인생을 괴롭다, 행복하다 하고 구분짓는 것은 메마른 사막 한 가운데에서 오아시스를 꿈꾸는....
우리 자신들의 희망과 참을성의 '정도'인 것 같다.
......
.......
.......
다시 숲길을 걷다보니 '중국 탑'이 나온다.
이름은 '중국 탑'이나 '동양인'의 관점에서 볼 때 너무도 어설픈 모양새를 하고 있다.
하다 못해 기와라도 얹었으면 좀 나으련만...국적불명의 어색한 처마가 실소를 자아낸다.
어설프게 흉내는 냈지만 서로 다른 문화를 표현한다는건 역시나 어려운 일인가보다.
...
우리에겐 너무나 당연한 것도 이방인들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을 수 있고,
어쩌면 그들에게는 아주 평범한 것들이 우리 눈에는 아주 거창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
개울을 따라 공원을 가로질러 가니까 마치 산 속의 계곡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곳이 있다.
물소리도 시원하고 물위에 둥둥 떠다니는 낙엽들이 정말 산 속에 온 것 같은 모습이다.
유럽에 와서 '이건 참 부럽다'하고 느낄 때가 종종 있었는데
유럽에 널려 있는 이런 널찍한 공원은 정말 부럽고 탐난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온통 파랗기만한 공원이 많이 있었으면 좋을텐데.....
물 위를 떠다니는 오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다시 U-bahn을 타러 갔다.
아침에 숙소 구한다고 배낭메고 한 참 헤맸더니 피곤하네....
'그런데 이놈의 U-bahn은 어디 있는거야......'
유스 객실에서...
유스로 돌아오니 5시.
객실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니까 딱 한 사람 있다.
"하이~"
"하이~"
이 사람 내일 일정을 짜는지 지도를 펼쳐놓고 열심히 책을 뒤적거리고 있다.
음....여행 14일째만에 처음 외국인과 한 방을 쓰려니 좀 어색하다.
원래 유스라는 곳이 세계 곳곳의 또래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게 제일 큰 매력이지만
역시나 처음 만난 사람과 친해진다는 건 쉬운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외국인과 말이다....
......
내 침대에는 여전히 시트가 그대로 깔려 있다.
'여기 누가 계속 쓰는거 아닌가?.....저 친구 한테 한 번 물어볼까?'
"저기...."
"예, 왜요?"
"이 침대 누가 아직 쓰고 있나요? 제껀데 누가 계속 쓰는 것 같아서요...."
"아~ 거기 어떤 여자분이 쓰시던데....."
"응 그래요? 그럼 이것도 그 여자분 가방인가요?"
"글쎄요....제가 오늘 아침에 일찍 나가는 바람에 그 여자분이 체크아웃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침대 시트가 그대로 있는걸로 봐서는 아직 체크아웃 안 한 것 같기도 한데...."
"하하....꽤 괜찮은 아가씨에요....나중에 들어오면 한 번 물어보세요..."
"그러죠 고마워요..."
이제 어쩐다...
'심심한데 샤워나 좀 할까? 몸이 영 찌뿌둥해서....'
여기는 화장실과 세면장이 있는 공동 샤워장이 따로 있는데
샤워칸마다 커튼이 있긴 하지만 이거 좀 휑하다.
......
수건을 뒤집어 쓰고 객실로 돌아가니까 또 한 명이 왔다.
"하이~!"
"어...예, 하이~"
이 친구는 꽤나 성격이 쾌활해 보인다. 내 침대 위층을 쓰는가보다.
어....그런데 이 친구가 내 침대 밑에 있던 가방을 꺼내든다.
"그 가방 그쪽건가요?"
"예, 왜그러세요?"
"아....난 내 침대 밑에 있길래 누가 내 침대를 계속 쓰는줄 알았죠...시트도 이렇게 그대로고..."
"아~ 미안해요. 이거 제 껍니다. 그리고 여기 있던 여자분 아침에 체크아웃 했어요...하하"
"네....그래요... 그럼 이 시트 걷어도 되겠군요....난 또 누가 계속 쓰는줄 알았죠..."
"내가 괜히 헷갈리게 했군요...미안합니다...하하"
"아유....아니에요~"
"이제 그 침대 쓰면 되겠네요...."
옆에서 열심히 지도보던 그 친구가 한마디 거든다.
덕분에 셋이서 서로 통성명 하고 너는 어디서 왔냐는 둥 이런저런 잡담을 나눴다.
외국인들....특히 서양쪽 사람들이 보통 아시아 사람들보다 말 수도 많고
적극적인 성격인 줄 아는데 이 두 친구를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닌 듯 하다.
지도 보는 친구는 말 수가 별로 없고 조금 조용조용한데
내 위층 침대를 쓰는 이 캐나다 친구는 말하는걸 무척 즐기는 부류인 것 같다.
연신 싱글벙글....재밌는 친구다.
뽀송뽀송한 시트를 깔고 잠시 침대 위에서 뒹굴며 휴식...
일기도 쓰고....
좀 놀다가 나중에 저녁때나 나가서 브로이 하우스에 들러 맥주나 한 잔 하고 들어와야겠다.
뮌헨의 밤
갑자기 면이 먹고싶어서 일행이랑 브로이 하우스 앞에 있는 일식집으로 향했다.
빵이나 다른 것도 맛있긴 한데 오늘은 왠지 면이 먹고 싶다.
그러고 보니 라면 먹은지도 아주 오래됐다. 라면에 김치면 최곤데.....
한식집이 있으면 더 좋겠지만 아쉽게도 한식집은 몇 군데 없을뿐더러 찾아가기도 힘들어
대신 눈에 띄는 일식집 중에 여행책자에서 추천한 곳을 찾아 나서는 거다.
어딜가나 일식집이랑 중식집은 많은데 한식집은 좀처럼 찾아보기가 힘들어 속상할 때가 많다.
중식이야 세계 곳곳에 퍼져있는 화교들 덕분에 널리 알려졌다고 하지만
일식이 이렇게 고상한 음식으로 널리 퍼져있는걸 보면 참 부럽고 배아프다.
한식도 맛있는거 참 많은데 왜 중식이나 일식에 밀려 얼굴도 못 내미는지 안타깝다.
음식도 문화의 힘인데....
일본 미인도 밑에서 밥그릇을 받쳐들고 능숙하게 나무젓가락을 움직이는 독일인들을 보니까
여러모로 느껴지는 바가 많다.
...
어.....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이 일식집에서 일하는 사람들 죄다 중국인이다.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 죄다 중국어로 떠들어 대는걸 보면 중국인인 것 같고
일본어, 영어, 독일어로 주문을 받고서 자기들 끼리 중국어를 쓰는걸 보면 서빙하는 사람 역시 중국인이다.
'뭐야 이거....여기 일식집 맞어?'
주인 할머니는 일본사람 같은데....종업원만 중국사람을 쓰고 있는건지....
겉으로 봐서는 통 알 수가 없다.
중국사람이 이렇게 일복색이 짙은 일식집을 운영하지는 않을텐데...
그런데 어찌보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원래 중국사람이 상술하나는 세계 최고라고 하지 않는가....
런던에 있늘 때 숙소 아저씨께서 말씀하시길 '중국인들은 언제나 놀랍다..'라고 하셨는데
장사를 위해서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들이다.
내 생각이 맞다면 일본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면서 웃어야할까? 울어야할까?
뭐....아무 상관없는 한국사람은 그저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된다.....후후
'기무치 라멘'이 꽤 맛있는 집이다.
이제 맞은편 호프브로이 하우스로~
문을 열고 들어서니까 넓은 홀 안이 사람들로 가득차 있다.
쭉 늘어선 테이블에는 사람들이 저마다 맥주잔을 부여잡고 웃고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고
웨이터들은 쉴 새없이 커다란 맥주잔을 나르고 있다.
어디선가 음악소리도 들리고 말그대로 난리법석통에 어안이 벙벙하다.
'햐....정말 크긴 크구나....'
일행이랑 홀 안을 한 바퀴 스윽 돌다가 독일 어르신네들과 합석했다.
원래 여기는 빈 자리에 아무 하고나 합석하고 그런단다....
독일 어르신네들도 왠 동양인 애들이 무척 반가우신가보다.
'코리아' 한 마디에 다들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니 독일말로 막 뭐라뭐라 말씀을 하시는데
일행 중에 그 말을 알아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후후
내 앞에 앉아 있던 안경 쓴 할머니는 뭐가 그리 좋으신지 날 빤히 쳐다보면서 계속 웃으신다.
'할머니 그만 쳐다보세요....무안해요....헤헤...'
나도 그저 씨익 같이 웃어줄 수 밖에...
...
여기 웨이터는 영어 주문은 안 받는단다.
다 알아 들었으면서도 괜히 장난스런 제스쳐로 우리 일행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아저씨 500cc요..500cc....cc몰라요?"
"뭐라고?"
"500.....에이 참....호프브로이 오리지널....작은거...작은거 주세요..."
"아~ 알았어...허허"
호프브로이 오리지널 500cc 짜리....
하얀 거품에 노란 윤기가 흐르는 시원한 생맥주다.
자 맥주도 나왔으니 다 같이 건배~~
독일 어르신네들이 자리를 뜨자 곧 다른 사람들이 우리 자리에 합석을 해 왔다.
"할로~"
"하이~"
"차이니즈? 재패니즈?"
"노노...코리언..."
"아아~ 코리아~"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남자 둘과 여자 한 명인데 스위스에서 왔다면서 자기들을 소개한다.
그 중에서 니콜라스 케이지랑 어설프게 닮은 아저씨는 꽤나 재밌는 사람이다.
우리 일행이랑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말 할 때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과장된 몸짓으로
농담까지 해가면서 우리 테이블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줬다.
스위스에서 밤새 아우토반을 달려 뮌헨까지 왔다면서 말을 꺼낸 이 아저씨는
스위스는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스위스 자랑도 하고, 자기가 일본에서 근무하면서 겪었던 이야기도 해주더니
일본사람은 얌전히 앉아 술만 마셔서 재미없던데 우리들은 무척 화통하다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운다.
동양인과 이렇게 웃고 떠들면서 맥주 마실 수 있는 기회는 자기들에게도 흔한 일이 아니라나.....
아무튼 괴짜 양반이다.
북한을 'terrible country~'라며 비하 하길래 몇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괜히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도 않고...내 짧은 영어로 우리나라의 상황을
이 아저씨에게 단번에 이해시키기란 불가능 할 것같아 아무말도 못했다.
그저 'oh....yes...'하면서 멋쩍은 웃음으로 화답할 수 밖에....
크.....유럽에 와서 내 영어실력이 이토록 실망스럽게 느껴지기는 처음인 것 같다.
뭐 원래부터 유창한 영어는 아니었지만...
하고싶은 말이 목구멍 끝에 걸려있는데도 시원스럽게 쏟아붓지를 못하니 참 속상하다.
영어를 접한지가 10년이 다 돼가는데 우리나라의 현실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외국인에게
명쾌하게 그 잘못을 꼬집어 설명할 수 조차 없다니.......
영어 공부 한참 더 해야겠다....쯧쯧
옆 테이블에는 독일 학생들이 맥주 파티를 하는지 아주 난리다.
덩치가 커서 그런지 목소리도 쩌렁쩌렁 울리는게... 한 명은 벌써 얼큰하니 취해서
우리 일행이랑 어깨동무하고 한국말로 '건배~'를 연발하면서 아주 신이 났다.
"어이~ 거기 독일 친구~ 건배~!!"
분위기가 한참 무르익어 갈 때쯤 어디선가 귀에 익은 아리랑 선율이 들려온다.
아마 홀 안에 있는 다른 한국 일행들이 신청한 모양이다.
홀 어느 구석에서 한국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아리랑을 따라 부르자
곧 홀 여기저기에 앉아 있던 다른 한국사람들도 맥주잔을 들고 아리랑을 따라 부르기 시작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너~머 간다아~....."
원래 애잔한 아리랑이지만 홀 안에 울려퍼지는 선율과 노랫소리는 오늘따라 무척 힘있고 즐겁다.
수십번을 들어오고 불렀던 아리랑이지만 머나먼 이국땅에서 듣는 아리랑은 또 그 느낌이 남다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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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가 끝나자 한국인들의 즉석 합창을 듣고 있던 홀 안의 관객들은 큰 박수로 환호해 줬다.
역시 음주가무에 있어서는 우리민족을 따라올 자가 없는 듯 하다.....하하
맥주 하나로 이렇게 국경을 초월한 커다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게 참 매력적인 것 같다.
독일인, 스위스인, 한국인, 일본인....그리고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이 손에든 맥주잔 하나로 모두 친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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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늘 밤은 정말 맥주가 맛있는 밤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