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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旅行/유럽배낭여행 | 2004

유럽배낭여행 [파리]

제이우드 || 2023. 6. 14. 17:54

2004.10. 9. 土  

 

어째 날씨가 수상하다.

새벽에 비가 왔었는지 거리가 온통 젖어있다.

아무래도 우산을 챙겨야 할 것 같은데.....

 

일단 그냥 가자.

 

Le Louvre

아침 먹고 곧장 왔는데도 사람들이 꽤 많다.

왠 사람들이 이리 많은지.....다들 어디서 왔을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에 와서 돈을 쓰고 가니,

프랑스 사람들은 '문화가 곧 돈이요, 그 돈이 다시 문화를 만드는' 탁월한 순환고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거야 말로 끊임없이 쏟아지는 돈다발이고, 굴뚝 없어도 잘 돌아가는 공장이 아닌가?

참.....부럽다.

 

프랑스에 8.50유로의 관광수입을 더 보태주고 '드농'관으로 들어간다.

오늘도 내 두 다리가 꽤나 고생할 듯하다.

 

'드농', '리셜리에', '슐리' 이렇게 세 구획 4층으로 구성된 루브르...

'모든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한 달도 더 걸린다'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뽐내는 곳이요

프랑스 문화의 자존심이라고 일컬어지는 대단한 미술관이다.

팜플렛을 집어 들었지만 막상 어디서부터 봐야 할지 정말 난감할 정도로 넓다.

머릿속에서 동선을 그어봐도 이내 복잡하게 엉켜버린다.

................

서양 문명의 근간은 누가 뭐래도 '그리스 신화'라고 할 수 있다.

로마 신화야 그리스 신화가 거의 그대로 옮겨간 것이니 근본적으로 다 같은 맥락이다.

배낭여행을 앞두고 다급하게 그리스 신화를 훑었지만 워낙에 방대한 소재라 모두 기억하기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원래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은가....

명색이 서양 문명의 실체를 확인하러 오면서 '신화'를 너무 등한시한게 아닌가 싶다.

'아테나'의 위엄있는 자태와 '풍요의 뿔'을 비롯해서 그나마 책에서 보고 들은 것들은 그 의미를 알 수 있겠는데

나머지는 아쉽게도 그저 '잘 다듬어진 조각상'에 불과했다.

책 좀 더 보고 올걸 그랬다.

여기저기 쌓아두다시피 진열된 조각상들이 마치 데생 할 때 쓰는 '아그리파'석고상 같다.

인간의 희로애락을 가진 다양한 신들의 이야기는 유럽의 미술가들에게 마르지 않는 소재의 공급원이었을 거다.

그리고 신을 인간처럼 그리고 인간을 신처럼 표현한 조각상에서 인간과 신의 구분은 사실 큰 의미가 없는 듯 하다.

수 세기에 걸쳐 이런식으로 반복되어온 신화의 재현은 유럽 문화의 커다란 사조이지 않았을까....

 

그러고보면 누구보다도 미적인 민족임을 자부하는 우리에게 현재 남겨진 미술품들은 실상 양적으로 다양해 보이진 않는다.

유럽의 큰 미술관 하나에 보관 중인 유화와 우리나라 박물관에 소장된 민화나 수묵화를 비교해도 그렇고,

이곳에 널려있는 대리석 조각상과 우리의 불상들을 비교해도 우리가 수적으로 조금 부족해보인다.

수량이 곧 모든 가치의 척도는 아니지만, 예술가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의 차이가 오늘날의 차이점을 낳은게 아닐까싶다.

톱으로 썰어도 잘리는 부드러운 대리석은 신이 서양사람들에게 주신 커다란 선물이었다.

그러면 정으로 열심히 쪼아야만 겨우 다듬을 수 있는 단단한 화강암은 신이 우리에게 주신 좌절이었나?

....예술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회가 가진 경제력과 인식의 차이라고 본다.

꼭 그런건 아니지만 대체로 경제적으로 풍족한 시대에 좋은 작품이 많이 나왔었다.

그리스가 그랬고, 로마 제국이 그랬고 르네상스가 그랬다.

거기다가 예술의 가치를 높이 사는 사회일수록 창작활동이 활발했음은 당연한 이치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는 예술가를 탄생시키기에는 너무나 급박하고 닫힌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장인이라하여 활동하던 사람이 있었지만 '예술가'라기 보다는 '기능장'이라는 인식이 더 강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조금만 더 여유롭고 조금만 더 열렸더라면....

우리도 지금보다 더 많은 예술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Venus de Milo"  Melos (the Cyclades islands)  Circa 100 BC  Marble

밀로의 비너스.....나도 한때는 '밀로'라는 조작가가 만든 비너스상인줄 알았었다.

밀로라는 섬에서 발견된 이 비너스상은 여성의 가장 아름다운 비례를 갖춘 조각상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약간은 풍만한 스타일인 이 비너스상에 원래 팔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없는 편이 훨씬 아름답다고 한다.

가상으로 팔을 만들어 붙인 사진을 본적이 있는데, 역시나 없는게 더 보기 좋다.

 

팔등신의 완벽한 비례를 현실에서 찾는건 다소 무리겠지?

 

어디 시장에라도 가는지 줄줄이 걸어가는 이집트 아낙네도 있네...

 

"Victory of Samothrace"  Samothrace (island in the North Aegean Sea)  Circa 190 BC  Paros marble for the statue

승리의 여신 Nike로도 알려진 이 조각상은 그 이름처럼 영적인 숭고함이 느껴지는 조각상이다.

온갖 시련에도 꺾이지 않고 마침내 활짝 펼쳐진 날개에서, 말 그대로 승리를 이뤄낸 듯한 감격을 찾아볼 수 있다.

미술작품을 보고 '멋지다'라고 표현할 기회가 별로 없는데 이 Nike앞에서는 '멋지다'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Law-Codex of Hammurabi  Susa  First half of the 18th century BC  Basalt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도 루브르에 있다.

그러고 보면 프랑스도 참 많이 가져왔다.

현실의 아이러니.....

 

이리저리 발 닿는대로 걸어다니다 보니 동선이 너무 많이 엉켜 버렸다.

갑자기 들어선 나폴레옹 3세의 거처....

세계에서 가장 화려함을 자랑한 프랑스 귀족문화를 잘 보여주는 호화찬란한 거처다.

이런데서 살면 좋았을까?......

 

잠시 팜플렛을 펼쳐들고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확인을 했다.

'리셜리에 2층 구석이네....'

틈틈이 계속 팜플렛을 보고 확인하지만 걷다보면 깜박깜박 방향을 잃어버린다.

 

이쯤에서 슬슬 회화쪽으로 발을 돌려야겠다.

 

모나리자의 미소

드농 1st Floor....우리식으로 2층 복도에는 그야말로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룬다.

내셔날 갤러리나 오르세도 이렇게 복잡하진 않았는데 여긴 정말 사람들이 너무 많다.

 

유명한 그림 앞에는 어김없이 단체 관광객들이 몰려있고 가이드들은 열심히 뭐라뭐라 그림 설명을 내뱉는다.

확실히 그림도 그 내막을 알고 보면 훨씬 재밌다.

화가가 뭘 말하려고 했는지 이 그림은 무슨 뜻을 담고 있는지를 알게되면 그림의 세세한 터치 하나하나가 눈에 다 들어오게 된다.

나는 시간적 촉박함과 금전적인 핑계로 '오디오 가이드'를 한 번도 사용해 본적이 없는데,

정말 시간적 여유도 있고 그림에 대한 욕심이 있다면 오디오 가이드를 사용하는것도 좋은 방법인 듯 하다.

짧은 미술지식을 잣대로 이 많은 그림을 본다는건 수박 겉핥기보다도 못한 일 같다.

 

모나리자....

유리 보호막으로 덮여진 모나리자 앞에는 사람들이 한 가득 몰려 장사진을 이룬다.

연신 카메라 셔터를 번쩍이는 통에 조용히 그 미소를 감상한다는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실제로 보니 생각보다 색감도 조금 옅은 것 같고 크기도 훨씬 작다.

힘겹게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한참 동안 모나리자를 바라보았지만

눈썹도 없이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나리자의 매력은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다빈치는 자신의 그림이 먼 훗날 이처럼 많은 주목을 받을 줄 상상이나 했을까?

사람들이 이처럼 열광하는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글쎄.....내 머릿속의 모나리자에 대한 환상은 조금 깨져 버린 것 같다.

 

'나폴레옹의 대관식'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 있는 전시실이 작품 설치 때문에 잠시 폐쇄중이다.

'이런.....안돼.....하필이면...'

 

아쉽지만 문틈으로 살짝 들여다보고 갈 수 밖에....

 

2nd Floor

2nd floor....우리 식으로 3층에 올라왔더니 사람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사람들 대부분이 모나리자가 있는 2층까지 올라오는 사이에 지쳐 버렸을거다.

나도 두 다리가 천근만근이 된지 오래다.

 

조용한 3층에는 작품 앞에 이젤을 펼쳐놓고 그림을 모사하는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띈다.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뒤에 서서 구경하면 이것도 꽤나 재밌다.

 

한때는 나도 이런 미술계통을 마음에 담아 둔 적이 있었다.

화가가 되고 싶었다는건 아니고.....설계나 디자인 쪽으로 말이다.

이젤을 펼쳐놓고 하얀 캔버스 위를 물들여가는 과정은 참 오묘하다.

손끝에서 파란 하늘도 나오고, 아름다운 여인도 나오고, 정열적인 꽃도 나온다...

분노도 나오고 애정도 나오고 동경도 나오고 아픔도 나온다.....

다 지난 일이지만 '아, 그때 내가 이길로 들어섰으면 어떻게 됐을까?'하는 생각은 여전하다.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한 청년의 뒷모습은 그래서 더욱 멋있고 부러워보인다.

 

Marie-Guillemine BENOIST  Paris, 1768 - Paris, 1826  Portrait d'une femme noire

독특하게 흑인 여성을 모델로 삼은 그림이다.

루브르 전체를 훑어봐도 아니 내셔날 갤러리나, 오르세를 다 둘러봐도

흑인 여성을 이렇듯 단독 모델로 그린 그림은 없었는데....

 

* 참고 : 유난히 이 그림과 화가에 대한 정보는 찾기가 힘들어 겨우 찾아낸 자료를 한 번 올려봤다.

Marie-Guillemine BENOIST(1768-1826)는 우리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은 여류화가이다.
당시 아버지는 공직에 있었으며, 1791년 Vigee-Lebrun로부터 처음 그림을 배웠으며,
후에 대가 다비드의 제자가 되면서 신고전주의의 화풍을 따르게 된다.
Portrait of a Negress 는 1800년 당시 노예제 폐지 선언에 고무되어 그린 그림이다.

Ce portrait représenterait une domestique ramenée des îles par le beau-frère de l'artiste.
L'attitude du modèle, le fond discret, la sobriété efficace du graphisme et du coloris renvoient à la leçon de David,
qui fut le maître de Madame Benoist. - Le Louvre

Marie-Guillemine Benoist was the daughter of a government official.
She studied with Vigee-Lebrun and her earlier works show a distinct influence of her famous teacher.
Benoist later studied with the celebrated Jacques-Louis David and her later works reflect the Neo-Classical style.
During her lifetime, Benoist painted in several genres ranging from historical themes to family portraiture.
Her works also included subjects that touched upon the contemporary issues of her day :
her Portrait of a Negress, painted in 1800, for instance, was inspired by the decree to abolish slavery.
Benoist was commissioned by Napolean to paint his portrait as well as portraits of his family members.
- Women Artists: An Illustrated History by Nancy G. Heller, pp.63-64. **

 

Hyacinthe Rigaud  1659-1743  Portrait of Louis XIV (1638-1715)  1701  Canvas

'짐이 곧 국가다'를 외치던 태양왕 루이14세.

아줌마 파마에 예사롭지 않은 각선미를 뽐내는 이 그림은 너무나 유명하다.

하지만 그림의 크기는 거대하나 솔직히 왕으로서의 위엄을 잘 드러낸 작품은 아닌 것 같다.

위엄있고 당당해 보이나?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솔직히 내가 보기에는 고탄력 스타킹에 아줌마 가발을 뒤집어 쓴 독특한 모습이 다소 우스꽝스러울 정도다.

 

왕을 앞에 두고 우스꽝스럽다니.....조금 심했나...

 

Jan Vermeer  1632-1675  The Lacemaker  Canvas on wood

레이스 뜨는 여자....

가로 세로 길이가 30cm도 채 안되는 이 그림은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아주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는 그림이다.

그림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림속의 저 여인은 분명히 햇볕이 따스한 창가에 앉아있었을 것 같다.

평화롭고 한가한 일상의 한 컷을 그대로 옮겨놓은 아주 편안한 그림....

 

REMBRANDT Harmensz. van Rijn  Leyde, 1606 - Amsterdam, 1669  Portrait de l'artiste au chevalet

빛의 마법사 렘브란트의 자화상....

빛의 마법사답게 부드러운 명암을 이용해 햇빛이 부서지는 듯한 느낌을 던져준다.

내셔날 갤러리에서도 그랬고 여기 루브르에 와서도 느낀점인데,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동시대의 다른 화가들보다 훨씬 현대적인 감각의 그림을 남긴 것 같다.

뭐 현대적이라는 말에 여러 가지 정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내가 말하는 현대적이라는 것은 현실주의적이며 작가 개성이 강하다는 뜻이다.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새로운 화법도 개발하고, 틀에 얽매이지 않은 네덜란드 그림들은

그런면에서 현대미술과 가장 닮아있는 것 같다.

과거서부터 유럽 내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네덜란드 사람들이라

예술에 있어서도 이렇게 이성적이고 개성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Frans Hals  1581/1585-1666  The Gypsy Girl  c. 1628-1630  Wood

 

리셜리에 3층....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그림들 뿐이다.

내셔날 갤러리에서도 그랬고 오르세에서도 그랬고.....역시나 오늘도 무리였던 것 같다.

느긋하게 보려고 했으나 내 욕심에 점점 빨라지는 발걸음을 늦출 수가 없었다.

아무리 예쁘고 향기로운 꽃도 자꾸보면 그저그런 풀 한 포기로 보이듯이,

이제는 훌륭한 명화들도 며칠사이 내 눈에서 많이 무뎌져 버렸다.

솔직히 이제는 그 그림이 다 그 그림같아 보이니.....

 

살면서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그림을 본 적은 처음이다.

소원대로 질릴만큼 그림들 속에 파뭍혀 보니, 이제는 어디선가 화실의 독한 시너냄새가 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정말......양이나 질적인 면에서 놀라울 뿐이다.

사람들이 왜 루브르를 '프랑스 문화의 자존심'이라고 하는지,

왜 프랑스 사람들이 루브르를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오르세에다가 루브르까지.....

프랑스의 힘은.........어디서 온 것일까.......

 

어느덧 3시....

더 이상의 관람은 무의미한 것 같다.

 

날씨가 흐리다 싶더니 창 밖으로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진다.

 

퐁피두 센터

비 때문에 퐁피두 센터까지 지하철을 타고 와 'Flunch'라는 셀프 레스토랑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했다.

마치 뷔페처럼 자기가 먹고 싶은 것만 골라서 계산할 수 있어서 여행자들에게 사랑받는 곳이다.

이것저것 메뉴도 꽤 많이 있다......후식 종류도 많고....

내 앞에 있던 프랑스 아저씨를 따라서 닭 가슴살 스테이크에 충동적으로 과일 샐러드 한 컵,

거기다 떠먹는 요구르트까지 계산대에 올렸더니 처음 생각했던 것 보다 가격이 좀 많이 나와 버렸다.

아무튼......떠먹는 요구르트는.....보기와는 달리 맛이 참 부담스러웠다.

파리의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독특한 현대적 외관을 갖고 있는 퐁피두 센터.

뭐 그리 대단한 곳인지 퐁피두 센터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부슬부슬 내리는 빗방울 속에서 사람들이 길 게 줄을 서 있다.

비만 안 왔으면 퐁피두의 이런 특이한 외관을 좀 더 여유있게 감상할 수 있었을테지만,

우산도 없이 추적추적 비 맞는 꼴이 그리 썩 좋아보일 것 같지 않아서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문화센터'라는 표현이 가장 적당한 이곳에는 모든 종류의 대중문화를 한 곳에서 즐길 수 있다.

도서관, 서점, 극장, 미술관, 전시실, 음악실 등등....

퐁피두 센터의 팜플렛에는 이렇게 대중문화를 접할 수 있는 다양한 공간들이 한 가득이다.

그래도 분위기가 마치 우리나라 COEX와 같아서 그렇게 신선한 느낌은 못 주는 것 같다.

여기 3,4층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도 피카소, 샤갈, 칸딘스키, 백남준 등의 좋은 작품이있지만,

현대미술은 개인적으로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할뿐더러 공부도 안 했고,

루브르를 채 소화하기도 전에 또 퐁피두를 삼킨다는건 너무 무모한짓 같아서 욕심을 버리기로 했다.

............

 

대신 왠지 모르게 그냥 책 한 권이 사고 싶어져 서점으로 향했다.

심심할때 침대에 누워 볼 책도 없고, 매일 여행 안내서만 뒤적거리기도 지겹고,

외국에서 책 하나 사면 왠지 근사할 것 같기도 해서 말이다.

 

무슨 책을 팔고 있는지 이리저리 구경도하고, 한 권씩 뽑아서 눈으로 스윽 훑어봤다.

소설이나 시집같은 문학책도 많고 멋의 도시답게 의상 디자인과 패션에 대한 책도 눈에 많이 띈다.

우리나라처럼 실용서나 처세술을 다룬 책들은 별로 없고 대신 역사서나 교양서적이 제법 있는 것 같다.

작가의 개성이 잔뜩 뭍어있어 도무지 겉만 봐서는 그 의도를 알 수 없는 예술서들도 있고,

거의 포르노그라피 수준의 사진집들도 특별히 코너로 만들어져 한가득 쌓여있다.

원래 표현이 과감하고 외설적이기로 소문난 프랑스의 영상 예술들......

우리나라같으면 거의 심의에서 삭제됐을 정도로 표현이 과감하고 소재도 특이해서 구경하면 꽤 재밌다.

 

........

차마 불어로 된 책을 살 수는 없고, 영어로 된 책을 한참 찾았다.

'WILL HAPPINESS FIND ME?'

까만 표지의 자그마한 책.

살면서 가끔 우리의 머릿속을 스치는 짧막하고 엉뚱하고 때로는 철학적인 의문문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What does my dog think?

'내 개는 무슨 생각을 하냐고?....훔....글쎄...'

기차타고 가다가 심심하거나 밤에 잠 안 올 때 꺼내 읽으면 딱 좋을 것 같아 큰 맘 먹고 샀다.

생각보다 책값은 꽤 비싸네.....

 

비도 오고 다리도 아프고...

숙소에 가서 쉬다가 저녁에 다시 나와야겠다.

........

 

몽마르뜨 언덕

침대에 잠깐 드러누워있다가 저녁을 먹고 숙소 사람들이랑 다 같이 몽마르뜨 언덕으로 향했다.

저녁이면 몽마르뜨 주변이 우범지대로 변한다는 누군가의 엄포 때문에 여럿이서 함께 가고 있다.

아무래도 조심하는게 좋겠지.....

유럽사람들은 우리에 비해서 하루 일과를 무척 빨리 끝내는 것 같다.

해가 지고 한 시간만 지나면 거리가 눈에 띄게 한산해진다.

가게나 여러 시설물들도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문을 일찍 닫아 버리고,

거리 조명이나 가로등 불빛도 약해서 밤거리를 걷기에 그리 썩 좋은 환경은 아닌 듯 하다.

 

지하철에서 내려 어둑어둑한 거리로 내던져진 우리에게 몽마르뜨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왠 중년 아저씨의 유난히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가던 우리는

어딘가 미심쩍은 기분이 들어 다시 지나가던 아주머니에게 도움을 청해 겨우 방향을 고쳐 잡았다.

알고보니 그 아저씨는 우리를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우리 말을 잘못 알아들었는지....아니면 무슨 나쁜 의도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기분이 썩 좋지가 않다.

사람을 의심한다는건 나쁜 일이지만......길을 물을땐 사람을 잘 살펴서 물어보는게 좋을 것 같다.

세상이 세상이니 만큼......

 

어둑어둑한 거리를 걷다보면 갑자기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는 좁은 골목길이 나온다.

골목 저 위에 사크레쾨르 성당이 어둠속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는걸 보니 여기로 올라가면 될 것 같다.

 

골목 양쪽으로 그림엽서랑 기념품 파는 가게와 카페, 레스토랑, 술집이 계속 이어진다.

이렇게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으니까 훨씬 좋네....

 

골목 끝에서 언덕 위까지 이어져있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사크레쾨르 성당에 이른다.

원래 하얀 데다가 조명을 받아 더없이 깨끗한 순백색으로 빛나고 있어 아주 인상적이다.

언덕 꼭대기에 우뚝 솟아있기 때문에 평평한 파리를 전망하기에는 가장 좋은 장소 중의 하나다.

성당 앞 야외 무대에서는 작은 연주회가 열리고 있다.

사람들은 손뼉을 치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흥겨운 선율에 신이났는지 발랄한 아가씨 둘이서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춤을 춘다.

아름다운 음악과 발랄한 아가씨들의 춤과 까만 밤에 점점이 빛나는 파리의 야경......

 

더 이상 파리의 낭만에 맹목적으로 정신을 잃고 싶지 않지만

파리는 도저히 나를 그렇게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작정인가보다.

 

파리 사람들...참 좋아보인다.

...........야경도 멋지고.....

 

성당 옆으로 가면 노천카페와 여러 가게들이 계속 이어진 골목과 광장이 나온다.

사람들은 마치 무슨 축제에 온 것마냥 거리에서 트럼펫을 불고 북을 두드리고 노래하고,

손에 손에 와인잔을 들고 한쪽에 모여 신나게 웃고 떠들기도 한다.

카페마다 사람들이 넘쳐나고 물랑루즈를 홍보하는 커다란 리무진 위에서 아가씨들이 손을 흔든다.

낮에 와 보지는 않았지만 저녁의 몽마르뜨도 활기차고 나름대로 운치가 있는 것 같다.

친구 한 명이랑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씩 시켜놓고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도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도하고......그러면 참 좋겠다.

 

저녁이라 초상화 그리는 거리의 화가들을 못보고 가는게 참 아쉽다.

몽마르뜨 하면 그래도 거리의 화가들인데.....

 

잠시 들린 엽서 가게.

이쁜 엽서가 정말 많다.

사진엽서도 있고, 포스터 엽서도 있고.....

색연필 그림이 그려져있는 자그마한 엽서가 그 중에서 제일 이쁘네...

옆에서 '촌스럽게 무슨 엽서야~'라고 누가 말만 안 했어도 하나 샀을텐데....후후

 

 

긴 하루

오늘도 꽤나 빡빡한 하루였던 것 같다.

뭐니뭐니해도 루브르의 광대함에 지쳐버린 날이었다.

확실히 하루 일정 중에 대형 미술관이 있으면 그날은 피곤해지기 마련이다.

그 큰 미술관을 하루에 소화한다는게 말이 안되기도 하지만 그림들을 따라 천천히 걷다보면 몸이 많이 쳐지게 되는 것 같다.

........

숙소로 돌아가는 길...

온통 낙서와 그림들로 가득한 지하철 계단을 빙글빙글 돌아 내려가면서 지금 몽마르뜨의 기억을 열심히 각인시키고 있다.

이미 며칠전부터 한계치 용량에 다다른 내 기억을 대신해 뭐든 열심히 수첩에 끄적거려 보지만 역시나 모든걸 담아둘 수는 없다.

보는 그대로 듣는 그대로 다 담아갔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그럴 수 없다는걸 알기에 더 아쉽다.

이제 파리에서 보낼 시간도 내일 밖에 없다....모레면 또 떠나야하는데....

 

천천히 그리고 되도록 자세히......하루하루의 기억들을 곱씹어 봐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