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0. 4. 月
'툭...투둑...툭..'
지붕에 있는 작은 창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방안 가득 울린다.
창문을 빼꼼히 열고 밖을 보니 날씨가 어제보다 많이 안 좋은 것 같다.
바람도 세차고 빗줄기도 훨씬 굵어졌다.
'아직 새벽이니까 좀 더 기다려보자...'
2시간 뒤...
다행히 빗방울은 그쳤는데 여전히 하늘은 흐리다. 기온도 더 내려가서 꽤 쌀쌀하다.
영국으로 오면서 10월달이면 그래도 늦가을 정도의 날씨는 될 줄 알았는데,
아침, 저녁으로는 거의 우리나라 초겨울 날씨처럼 꽤나 추운 것 같다.
'흐읍~ 춥다..'
그린파크

드넓은 잔디밭과 커다란 플라타너스나무가 서 있는 멋진 공원이다.
비 그친 아침이라 그런지 풋풋한 풀냄새와 나무냄새가 더 없이 상쾌하다.
바닥에 떨어진 낙엽이 가을 냄새도 풍겨주고...
도심 한 가운데 이렇게 넓고 푸른색이 가득한 공원이 있다는게 참 놀랍다.
런던이 원래 공원이 많은 도시라는 건 알았는데 생각보다 공원의 규모도 참 큰 것 같다.
그냥 잔디밭에 줄만 긋고 골대만 세우면 축구장 몇 개는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여기도 이렇게 넓은데 제일 크다는 하이드 파크는 도대체 얼마나 클런지....

한산한 공원을 가로질러 근위병 교대식이 있을 버킹엄 궁으로 향했다.
버킹엄 궁전

"신이시여, 여왕을 지켜주소서..."를 외치며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만들었던 사람들.
의회민주주의의 발상지인 이곳에서 형식적이나마 아직도 여왕이 존재한다는 건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영국인에게 왕이란 그리고 왕실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과거 세계를 호령하던 시절에 대한 향수일 수도 있고, 근엄함과 관대함으로 국민적 통합을 이룰 수 있는 하나의 구심점이 될 수도 있다.
혹자는 21세기인 지금까지 왕정의 흔적 남아 있는건 시대착오적인 일이라 비난하기도 하고,
고인이 된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비롯해 찰스 왕자와 다른 왕실 가족들의 구설 수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존재하되 결코 군림하지 않는' 여왕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여전히 영국인들이 의지할 수 있는 정신적 지주인 것 같다.
과연 언제까지 이 왕실이 유지될 수 있을런지....
저 멀리서 음악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 앞으로 빨간 제복에 곰털가죽을 눌러쓴 근위대가 등장한다.

어린시절 그림책에 보면 늘 장난감 병정처럼 서 있던 영국 근위병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행진하는 모습이 꼭 장난감들이 걸어가는 것 같다.
잠시 뒤...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버킹엄 궁 안쪽에서 근위병 교대식이 진행된다.
흐린날은 교대식이 취소되기도 한다는데 오늘은 운이 꽤 좋은 편인 것 같다.

빽빽히 모인 사람들 틈에 찡겨 언제 끝날지 모를 교대식을 구경하다가
갑갑하기도 하고 오늘 일정도 빡빡한지라 살며시 뒤로 빠져 나왔다.
오로지 이것만을 보기위해 모인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게 놀라울 따름이다.
연신 "sorry~"를 외치며 겨우 사람들 틈에서 빠져 나왔다.
횡단보도에 서 있다가 심심해서 괜히 옆에 있던 경찰아저씨에게 아는 길을 물었다.
"실례해요.."
"응..왜그러니?"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가려면 어디로 가야되죠?"
"여기 건너서 저기 저 큰 길 보이지....그거 따라 쭉 가면된다.."
"고맙습니다"
"뭘~"
어떻하나 심심할땐 이렇게라도 놀아야지뭐...
세인트 제임스 파크

버킹엄 궁이 바라다 보이는 여기는 호수가 있어 좀 고급스러운 느낌이 드는 공원이다.
고니랑...오리는 호수 위를 유유히 떠다니고 있고...

펠리컨은 물가에 앉아 깃털을 손질하고 있는데, 머리만 안 만지면 쓰다듬어도 가만히 있다.

거위도 있네...
이녀석들은 물에 들어가지도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다.
벤치에 앉아 핫도그를 먹고 있는데 한 녀석이 코 앞에까지 뒤뚱뒤뚱 다가오더니 날 빤히 쳐다보고 있다.
만화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그 '뚱~'한 표정이 어찌나 웃기던지 거위가 이렇게 귀여운 놈인지 처음 알았다.
'나 한 입....너 이만큼....나 한 입....그래 너도 이만큼....'
비둘기 먹이 주는 할아버지도 있고....

공원을 거닐고 있자니 다행히 흐렸던 하늘이 맑게 개기 시작했다.
'아~ 햇빛....'
이틀만에 맨 얼굴을 내민 해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왜 영국사람들은 햇빛만 나면 훌떡 벗고 일광욕을 하는지 이해가 간다.
안 그랬다간 정말 몸에서 곰팡이 생기겠다.

한적하고 예쁜 공원 따뜻한 햇살 밑에서 잔디밭에 드러누워 낮잠이라도 자고 싶지만
오늘은 정말이지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그러니 이쯤에서 또 움직여야지...

웨스트민스터 사원
공원에서 빠져나와 뾰족한 빅벤의 끝을 따라 조금만 걸어가니 웅장한 사원이 등장한다.
하늘이 맑게 개어서 하늘로 솟구친 사원이 더 높아보이는 것도 있겠지만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히게 만드는 사원의 웅장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국 역대 왕들의 대관식, 왕실과 국가의 중대사가 열렸던 곳이기도 하며
영국을 대표하는 왕과 위인들의 무덤과 기념비가 있는 곳이다.
영국의 영광, 슬픔, 역사와 함께한 성스러운 이 사원은
최근 내 기억 속에선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장례 장소로 기억되는 곳이기도 하다.
97년...슬픔에 잠겼던 그때의 영국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음...학생 5유로라...학생증 처음 개시하겠네...'
높은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사원 내부를 은은하게 비춰준다.
경건한 공기가 감도는 사원 내부에는 영국의 왕들이 오랜 잠을 자고 있다.
비록 눈은 감았지만 석관 위에 반듯이 누워있는 그들의 위엄은 석관의 무게 만큼이나 육중하게 느껴진다.
'왕이라......'
팜플렛과 석관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여러 왕들을 알현하자니 황공하기 그지없다.
한 바퀴 쭉 돌아 본 후 사원 중앙에 앉아 잠시 다리를 풀면서 사원의 거대한 규모에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했다.
'이 거대한 돌덩어리 건물을 그 옛날 무슨 수로 지었을까?...희한하네...음...놀라워..'
사원 출구 옆에 작은 초를 밝히고 기도 하는 곳이 있길래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때마침 기도문이 울려 퍼지면서 사원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 자리에 멈춰서 기도를 한다.
나도 촛대 앞에 가만히 서서 촛불을 응시했다.
작은 촛불들이 점점이 모여 이렇게 몽환적으로 타오르는 광경은 생전 처음본다.
그것은 마치...하나의 영혼을 가진 생명체처럼 흔들거리고 있다.
촛불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하고 그 사람을 착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기도가 끝날 때 까지 촛불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착해질 수 있었다.
촛불을 밝히는 기도문구
.....
For someone known to you who needs your prayers
For the many unknown who also need your prayers
For your home, city, town, parish or church
For Westminster Abbey and the ministry here
GO IN THE PEACE OF CHRIST
Big Ben
도로를 사이에 두고 웨스트민스터 사원 바로 뒷편에 거대한 빅벤이 우뚝 서 있다.
영국을 상징하는 많은 건물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영국다운 것을 뽑으라면
나는 의회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빅벤과 국회의사당을 선택하고 싶다.
우리나라는 언제쯤 이렇게 멋진 국회를 가질 수 있을까...사람이나 건물이나...

거짓말처럼 맑게 개어 버린 런던의 하늘은 정말 투명함과 눈부심 그 자체였다.
런던에서 이렇게 맑은 하늘을 볼 줄은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정말 의외다.
누가 런던이 칙칙하다 그랬나.....이렇게 파란 곳을.....

Horse Guards
국회의사당에서 트라팔가 광장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면
'다우닝 스트리트 10번지' 수상관저와 유명한 호스가즈 기마병을 볼 수 있다.
수상관저는 예전의 테러 사건 이후로 경비가 강화되어 내부를 구경할 수는 없다고 한다.
다른 곳과 달리 완전무장한 경찰들이 바리케이트를 앞에두고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는 곳이라
몇 번 기웃거리다가 가던 길을 걸었다.

어디선가 거름냄새가 난다 싶으면 호스가즈 기마병이 있는 곳이다.
호스가즈 정문 양 옆에는 각각 말위에서 꼼짝하지 않고 보초를 서는 병사들이 있다.
꼼짝 않고 정면을 주시하는 기마병과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말이 꽤나 멋있다.
언젠가 기마병의 지원율이 상당히 높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아직도 기마병에 뽑힌다는 것은 영국인에게는 크나큰 영광이요 자부심이라고 한다.
이렇게 전통을 지킨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닐테지만,
비록 관광객의 사진 세례를 받을 지언정 현실적으로 큰 효용은 없을지라도
전통을 지키기 위해 그만큼의 비용과 불편을 감수한다는 것은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게 확실하다.

햇빛이 쏟아지는 트라팔가 광장을 지나 대영박물관으로 향했다.
'오늘 좀 많이 걷는데....어우 다리야....'
지도를 보며 그래도 신나게 걷는다.
아직은 견딜만 하다.
대영박물관

트라팔가 광장에서 출발할 때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대영박물관 입구에 도착하니까 온 몸에 힘이 쫙 빠진다.
'어흑....버스 탈 걸...'
생각보다 거리가 좀 먼 것 같다.
박물관 입구는 그 명성에 비해 좀 건조하고 허전해 보인다.
별다른 조경도 해 놓지 않은 박물관 앞 뜰에는 사람들이 해바라기를 하고 있고 비둘기때가 어수선하게 돌아다니고 있다.
그래도 어떤가...공짠데...
외관과 달리 박물관 내부는 유리 천장이 덮여 있는 깔끔한 현대식의 거대한 공간이다.
혹시나 해서 한국어 안내 팜플렛이 있는지 안내 데스크를 기웃거려보지만 아쉽게도 없는 것 같다.
일어나 중국어는 있는데 왜 우리건 없는지..
'쩝...'
대영박물관의 핵심은 아무래도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의 유물들이 아니겠는가.
선택의 여지 없이 영어로된 팜플렛을 한 손에 들고 고대 유물 순례를 나선다.
1층 고대 이집트관에서 로제타 비문이 제일 처음 관람객들을 맞이해 준다.


워낙에 방대하기로 소문이 난 박물관 답게 전시실에 거의 쌓아 둔 듯한 수 많은 유물들이
마치 시간을 고대로 되돌릴 듯한 신비한 주문을 외워오는 것 같다.
보기만 해도 신비스런 이집트의 석상들과 살아 꿈틀거리는 그리스, 로마의 조각상들이
수백, 수천년의 시간을 거슬러 지금 눈 앞에 있다.
그 장구한 시간의 흐름과 대면한다는 것은 가슴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라메세스 2세상,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와 벽화들, 날개 달린 인두우상,
네레이드의 제전, 앗시리아의 부조, 그리스 신화를 품고 있는 도자기와 조각상....
이 모든 것을 어찌 단 하루 만에 보고 느끼려 했을까....바보같이....
.........

2층에서는 미라특별전이 열리고 있고,
계단으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동아시아관에서 우리나라, 중국, 일본의 전시실을 볼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외국 박물관은 우리나라의 어떤 유물들을 소개하고 있는지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 수 없다.
동아시아관 한쪽에 따로 자그맣게 마련된 한국관에는 주로 도자기와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거...다 우리나라에서 뺏어 온건가?'
모형으로 만들어진 기와집 앞에서 잠시나마 한국의 향수를 달랬다.
바로 위에 있는 일본 전시실에는 한 층이 모두 번뜩이는 일본도로 채워져 있어 나름대로 무척 강한 인상을 줬다.

외국 박물관에 있는 우리나라 유물은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할까? 그리고 대영박물관의 의미는 뭘까?
한국관에서 본 우리나라 유물은 시대나 종류가 너무 편협한 것이었다.
이웃한 일본에 비해서는 전시 규모도 많이 비교되어 약간 자존심이 상하기도했는데,
그렇다고 우리나라 유물이 별로 없는 걸 그렇게 슬퍼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대영박물관에는 영국의 유물이 극히 소수밖에....아니 내 생각에는 없다고 봐도 될 것 같다.
과거 엄청났던 식민지에서 탈취한, 어찌보면 '대도' 영국의 '장물'을 전시해 둔 곳이 바로 여기인 셈이다.
내 생각에는 이집트나 그리스 사람들이 여길 오면 아마 통한의 눈물을 흘릴 것 같다.
우리나라는 '뺏긴게' 별로 없으니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른다.
혹 이렇게 엄청난 양의 유물을 보기좋게 전시해주고 보존해 온 것으로 도둑질의 대가를 충분히 갚았다는 의견도 있으나,
현재의 결과가 어찌 되었건 난 이것을 영국이 탈취 당사국에게 정말 크나큰 범죄를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국도 분명히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뭐 다소 극단적인 나의 생각이지만....
어찌됐건...이미 돌이키기는 힘든 이 시점이라면
오히려 대영박물관이라는 특수한 공간 속에서 우리 문화를 세상사람들에게 잘 보여줄 수 있도록
우리가 좀 더 관심을 갖는게 근본적으로는 우리에게 득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래도 한 곳에서 여러 문명을 접할 수 있는 이 곳은 어쩔 수 없이 대단한 박물관임은 틀림으니까...
유로스타 예약하기
프랑스로 넘어갈 유로스타 학생할인 티켓을 구하려고 대영박물관 뒤쪽에 있다는 STA TRAVEL을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겨우 찾아갔다. 러셀 스퀘어에 있는 이곳은 런던 대학 지점인듯 했다.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음...파리로 가는 유로스타 티켓 예약하고 싶은데요.."
"네...몇 일 걸로 알아봐 드릴까요? 왕복인가요?"
"아니요, 편도에요. 수요일 아침이나 저녁걸로 알아봐 주세요..."
'탁탁......틱틱...띡..'
"어쩌죠....수요일에는 남은 티켓이 하나도 없는데요..."
"어...그럼 그 다음날은 어떤가요?"
"주말까지 남은 좌석이 없네요...."
'이런......'
"어머...잠시만요....수요일 새벽 5시 34분 차는 어때요?"
"엇...새벽이요? 음...그건 좀 힘든데..."
계획대로 움직이려면 6일 오후에 파리로 넘어가야 하는데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참 고민 끝에...
"그냥....수요일 새벽걸로 예약해 주세요..."
"예, 좋습니다."
곧이어 A4용지에 출력된 예약확인증을 놓고 아가씨의 이런저런 설명이 이어진다.
가격은 29파운드고 적어도 출발 2시간 전에 가서 예약표를 받으라는 둥, 버스를 타고 가면 2번 갈아타야 된다는 둥...
아무튼 그 아가씨가 굉장히 열심히 설명해주고 있는 찰나, 내 눈에 들어온 예약일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
'To Date: 06/11/2004'
"저기....요거 날짜가 틀린거 아니에요? 10월달이 아니라 11월로 된 것 같은데.."
"예? 잠시만요......어멋...제가 실수했네요 죄송해요 바로 다시 해 드릴게요..."
"......."
신참인 듯한 그 아가씨는 어지간히 긴장했는지 손가락까지 떨어가며 황급히 다시 날짜를 고쳐줬다.
날짜 확인 안 했으면 큰일 날 뻔 했다. 예약할 때는 역시 날짜 확인을 철저히 해야된다.
아무튼 그 아가씨 실수 덕에 티켓 예약하는데 한 시간이나 걸렸고 다른 손님들이 다 나갈 때까지 앉아 있어야 했다.
나갈 때 문까지 배웅해주며 잘 가라고 인사 안해줬으면 난 아마 삐졌을지도 모른다.

2층 버스
런던에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했다.
박물관에서 너무 많이 걸어다녀서 그런지 다리도 아프고....오늘 생각해보니 꽤 많이 걸어다닌 것 같다.
걷기도 싫고 해서 차이나타운 방향으로 가는 2층 버스를 잡아 타서는 '당연히' 2층 맨 앞좌석으로 성큼성큼 올라가 앉았다.

'햐....이렇게 좋은걸 왜 이제 탔을까...'
앞 난간에 다리 하나 올려 놓고 유유히 런던 거리를 누비는 기분이란 가히 최고인 것 같다.
좁은 런던의 도로를 천천히 곡예하듯 배회하는데...시선을 창밖에서 땔 수가 없었다.
시선의 높낮이만 달라졌을 뿐인데도 2층 좌석에서 내려다 보는 세상은
신호등과 광고판이 바로 눈앞으로 지나가고, 사람과 차들이 모두 발 밑으로 지나다니는 그 이상의 색다른 모습이었다.
China Town

중국인은 전 세계 어딜 가나 다 있다는 명성 그대로
여기는 마치 중국 어느 동네를 뚝 떼어 런던에 옮겨놓은 것 같다.
붉은 등, 황금색 한자 현판, 가게에 걸어 놓은 오리고기, 까만 머리의 중국인들...
저 사람들이 다 중국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같은 동양계 사람들을 많이 보니까 되게 반갑다.
코리아 타운도 세계 곳곳에 많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한때 세계에서 가장 불친절한 가게로 기네스북에 올랐다는 '왕케이'.
사람들이 런던에 오면 꼭 한 번은 들리게 된다는 이 중국식당에서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같이 들어간 일행과 7파운드짜리 세트 메뉴를 시켰는데,
탕수육같은 음식과 닭요리, 콩나물과 야채를 삶은 요리가 나왔다. 물론 한 가득 밥도 나오고.
닭으로 만든 것 말고는 썩...
탕수육 비슷한 요리는 특유의 향신료 냄새 때문에 거의 손도 못 대고 말았다.
아쉬움을 따뜻한 차로 대신 달랠 뿐...

런던의 밤
2층 버스는 어둠이 깔린 런던 시내를 천천히 달려 타워 브릿지로 향하고 있다.
우리나라였다면 아직 사람들로 북적거릴 시간인데 거리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
차분한 런던의 저녁...
고풍스런 런던의 건물들이 은은한 가로등 불빛을 받아 더 없이 멋있어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왠지 밤에 보는 런던 거리는 낯보다 더 매력적인 것 같다.
어둠은 적당히 우리 눈을 멀 게 해서 사물을 적당히 더 미화시키는 능력이 있는건지...
2층 버스 맨 앞좌석에 앉아 런던 거리를 바라보고 있자니,
또 다시 새삼 내가 여행 중이라는 사실이 떠올라 그냥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