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0. 2. 土
아침 식사는 호텔 뷔페..
물론 이것도 항공권 구입할 때 호텔 무료숙박과 함께 제공되는 서비스다.
이렇게 재워주고 먹여줘도 항공사는 남는게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Check out 영수증에 멋지게 싸인을 해주고 바로 공항 JAL창구로 향했다.
Baggage Tag
"저기...부산에서 받은 Baggage Tag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어?...이게 그거 아닌가요?"
"음...아닙니다...이건 저 분이 부산에서 오사카까지 보내신 짐 태그고 런던까지 보낸 본인 짐 태그는 아마 따로 받으셨을겁니다."
"어...태그는 그거밖에 없는데요..."
"아~재훈아...아침에 호텔방 쓰레기통에 버리고 온 게 니꺼였나보다...."
"엇...!"
부산에서 같이 출발한 형이 태그에 적힌 자기 이름만 보고 자기 태그인 줄 알고 버린 것이다.
부산서 출발할 때 대표자 이름으로 그 형 이름을 썼기 때문에 모든 태그에는 그 형 이름이 적혀있었다.
형은 오사카에서 짐을 다시 받았기 때문에 아무 상관이 없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태그가 없으니 만약에 착오가 생기면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어쩌나....할 수 없이 다시 호텔로 뛰었다.
호텔이 공항과 붙어 있기 마련이지, 수속까지 30분밖에 안 남았다.
프런트에 가서 우리 사정을 말하고 다시 열쇠카드를 받아서 방으로 올라가니 아줌마들이 막 방 청소를 시작하려 한다.
"앗, 잠시만요~ 스미마셍~"
어리둥절해 하는 아줌마들 사이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니 그 안에 우리의 짐 태그가 고이고이 누워있다.
'빙고~ 찾았다.'
다시 뛴다...20분 남았다.
11:50am JAL 421 55K No Smoking Seat
창가 좌석이다. 한 줄에 11개 좌석씩 A, B, C.....H, I, J, K 이런 식으로 배치가 되는 것 같다.
원래 장거리 노선일 때는 화장실 가기도 편하고 짬짬이 일어나서 돌아다니기도 좋은 통로쪽 좌석이 좋다고 하는데...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린다 싶더니 금새 지면과의 맞닿는 느낌이 사라진다.
또 난다....이번에는 장장 12시간을 날아가야 한다.
'그게 가능해?'
네비게이션의 고도계 숫자가 성큼성큼 커지는가 싶더니 어느덧 8000m를 넘어 섰다.
라이트 형제 이후로 인류가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닌지 이제 거의 1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지면에서 발이 떨어지는 그 순간은 어쩔 수 없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고,
더불어 비행기 창밖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언제나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솜털같이 새하얀 구름의 바다 위를 유유히 날아갈 때면 마치 현세가 아닌 또 다른 세상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다.
'햐..........'
구름층을 뚫고 올라가 새하얀 구름의 뒤통수를 마주하는 그 순간은 늘 환상적이다.
고도가 안정되자마자 점심이 나온다. 메뉴는 스파게티.
"음료수는 뭐 드시겠어요?"
"토마토 쥬스있어요?"
"에?"
"토마토요.."
"아아...비루? 아사히? 기린?"
"노,노...토메이토~"
"노?...죄송해요 다시 좀 말씀해 주시겠어요?"
"으.....그냥 오렌지 쥬스 주세요...."
"아, 오렌지 주-스"
"........."
난 그저 토마토 쥬스를 마시고 싶었다. 어찌 '토마토'와 '비루' 발음을 헷갈려 할 수가 있나.
'어휴...땀나...'
비행 3시간째.
일본열도를 따라 북상하던 비행기가 드디어 러시아 영공으로 접어들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차가운 시베리아의 동토가 눈 밑으로 스쳐간다.
고도는 어느덧 10000m를 넘어섰고, 비행속력은 931km/h에 이르렀다.
DVT : Deep Vein Thrombosis
흔히 말하는 '이코노미 증후군'
장시간 좁은 비행기 좌석에 웅크리고 앉아있을 경우 혈관내에 혈전이 발생하여
그 조각이 허파와 같은 특정 신체 부위에 쌓여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는 증상.
'으....다리야...'
좁은 좌석에 앉아 있자니 슬슬 좀이 쑤시다.
잠도 잘 안 오고...
'스파이더맨2'도 보고 '로드88'이라는 일본 영화도 봤는데 이제 절반쯤 날아 온 것 같다.
네비게이션 비행기 표시가 아직 시베리아 중간쯤에서 깜빡거리고 있다.
괜히 일어나서 어슬렁 어슬렁 걸어다녔다.
잠자는 사람, 음악 듣는 사람, 책보는 사람, 영화 보는 사람, 노트북에 뭔가 열심히 두드리는 사람...
얌전히 눈감고 자리에만 앉아 있는 일본인들, 통로에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하는 서양인들...
영하 몇십도의 차가운 대기 속을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는 이 밀폐된 공간 속에 들어있는 다양한 사람들이다.
스튜어디스란 직업은 내가 보기에는 상당한 중노동을 요하는 직업인 것 같다.
식사준비하랴, 사람들 안내하랴, 이것저것 잔 시중까지 다 들어줘야하고...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서 안쓰러울 정도다.
특히나 이쁜 사람들이 이렇게 고생하는걸 보니까 괜히 마음이 더 그렇고....^^
영화배우 '진혜림'을 진짜 꼭 닮은 스튜어디스 아가씨가 있는데 사진을 못찍어서 아쉽다.
우리 구역 담당이 아니라 마주칠 기회가 별로 없네....
..........
정말 비행기 안에서 12시간 보내기란 일종의 고행인 것 같다.
비행기가 공기를 가르는 '윙~'하는 소리만 들리는 좁은 공간에 몇 시간째 앉아 있자니
구름 위를 솟구쳐 오를 때의 그 환상적인 설레임은 어디로 갔는지 없어져버렸다.
'자야지 뭐...'
........
........
자는 사이 비행기는 모스크바를 지났다.
일본에서부터 따라온 해는 여전히 비행기를 따라 오고 있다.
........
비행기에서 두 끼 먹기
자는척 하고 뒤척이고 있자니 또 저녁을 준다.
치킨과 버터를 발라 살짝 볶은 밥, 햄, 빵....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먹고 자고 마시고 또 먹고 하면 살찌겠다.
이거 먹고 또 자야지.
....
....
저녁 먹고 잠깐 눈좀 붙이다가 부시시 일어나 보니 네비게이션에 유럽 지도가 표시 된다.
덴마크 상공쯤을 지나고 있는듯 하다.
'어어...그럼 저 아래 보이는 땅이 유럽땅인가? 으음....다 왔네...'
어느새 비행기 고도가 조금씩 낮아진다.
이제 슬슬 내릴 준비를 해야겠다.
시계바늘을 8시간 뒤로 돌린다.
London
'으....귀야....'
비행 고도가 낮아지자 슬슬 고막이 짖눌리는 듯한 기압차이를 느낀다.
이륙 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오른쪽 귀만 유달리 아파서 나도 모르게 이마를 찡그린다.
그래도 시선은 창밖을 고정한채...
비행기가 천천히 곡선을 그리며 선회하기 시작한다.
믿기 힘들겠지만 지금 창밖으로 런던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고 있다.
사진으로만 보던 타워브리지, 런던아이, 국회의사당이 바로 눈 밑으로 손에 잡힐 듯이 지나가고 있다.
항공로가 런던 시가지 바로 위로 지나갈 줄은 몰랐다.
'어떻게 이렇게 날아갈 수가 있냐?'
너무나 천천히 그리고 가까이 보이는 런던의 첫인상에 한동안 넋을 잃고 말았다.
비행기는 이국적인 지붕과 굴뚝이 있는 영국식 주택가 위를 지나 천천히 활주로에 내려 앉았다.
12시간만에 느껴보는 지면의 마찰력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영국의 입국심사
늦은 오후의 햇살 속에 간간이 빗방울이 흩날렸다가 다시 햇살이 비추고, 또 구름이 끼는 변덕스런 영국의 날씨가 나를 맞이해 준다.
비행기에서 입국심사대까지 가는 그 순간에도 빗방울과 햇살이 교차하는 묘한 날씨가 날 들뜨게 한다.
과거 인도를 식민지로 삼았던 터라 공항에는 인도계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띈다.
영국의 입국심사는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꼬치꼬치 말꼬리 물고 늘어져서 애먹을 수도 있고, 진짜 운이 없는 경우는 입국거부를 당할 수도 있다고 들었다.
특히 불법취업을 위한 아시아계 남자들의 위장 입국 때문에 아시아계 남자들에게는 특히나 까다롭단다.
심호흡 한 번 크게 하고 인도계로 보이는 여자 심사관 앞으로 걸어갔다.
"하이..."
"........"
"........"
"영국에는 무슨 목적으로 왔지요?"
"여행차 왔습니다."
"런던에는 며칠이나 있을겁니까?"
"한 4일정도 있을겁니다."
"머물 곳은 있나요?"
"예...유스 갈겁니다."
"런던만 여행할 겁니까?"
"영국에서는 런던만 구경하고 파리로 넘어갈 겁니다."
"파리로 갈 때는 뭘 타고 갈겁니까?"
"유로스타 타고 넘어갈 겁니다."
"파리에서 돌아갑니까?"
"아니요...프랑스,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이렇게 여행하고 로마에서 돌아갈겁니다."
"돌아갈 항공권은 있나요?"
"예...여기..."
"각 나라 이동은 어떻게 할 겁니까?"
"유레일패스가 있어요."
"네...좋아요...very good.."
'쿵~'하는 스탬프 찍는 소리와 동시에 '휴~'하는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심사관 말투가 좀 건조할 따름이지 뭐 걱정했던 것만큼 그렇게 까다롭지는 않은 듯 하다.
'역시....사람은 착하게 생겨야돼...음헤헤'
짐을 찾고 공항을 빠져나오니 햇살이 사선에서 비쳐 눈이 부시다.
일본은 그래도 같은 동양권이고, 사람들 생김새며 이것 저것이 많이 친숙했지만
영국에 오니까 비로소 우리와는 아주 다른 문화권에 와 있음이 느껴졌다.
"안뇽하세요~"하는 지하철 매표소 아저씨의 제법 익숙한 우리말 인사로 다소 긴장감이 풀린다.
앞서 다녀간 수 많은 우리나라 배낭여행객들의 노고가 히드로공항 지하철 매표창구의 이 아저씨가 한국말을 하게끔 만들었나 보다.
Underground
'Tube'라고도 불리는 영국 지하철은 진짜 보기에도 튜브처럼 생긴 곡선 모양의 자그마한 차체를 하고 있다.
일단 처음 보기에 좀 오래된 듯하고 생각보다 훨씬 크기가 작았다. 아마 우리나라 지하철 크기의 60%정도는 되는 것 같다.
사람이 의자에 마주보고 앉아 있으면 무릎과 무릎 사이로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이다.
사람들의 낯선 영국식 영어의 억양에 파뭍혀 있는 동안 지하철은 지상으로 빠져나왔다.
거의 비슷한 모양의 벽돌집이 참 보기 좋게 늘어선 주택가를 지나간다.
반듯한 'ㅅ'모양의 지붕에는 작은 굴뚝도 있고, 층층이 사각 창문과, 현관 앞에는 작은 정원도 있다.
하나같이 비슷한 양식의 집들이 시원스럽게 자리하고 있는 풍경은 그것만으로도 무척 고풍스럽고 이뻤다.
'어쩜 집들이 이렇게 다 장난감같이 이쁘게 생겼을까?'
차창으로 스쳐가는 영국식 집들이 벌써부터 시선을 사로잡는다.
Willesden Green
전형적인 영국 주택가에 우리가 영국에서 머물 숙소가 있다.
'미스터 빈'이 타고 다녔던 것 같은 자그만 차들이 곳곳에 늘어서 있는 한적한 거리를 걸었다.
지붕이며, 창문, 울타리 안의 정원이며 길거리에 주차된 다국적 메이커의 자동차들, 전화 부스, 우체통, 상점...
그저 모든게 새롭고 신기해서 걷는 내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호오...'
짐을 풀고 나니까 아까부터 감기던 눈꺼풀이 갑자기 천근만근이 되어 계속 감긴다.
시계는 이제 저녁 8시 반을 가리킨다.
12시간을 날아왔으니까 시차를 생각하면 지금이 내게는 새벽 4시쯤은 되는 것 같다.
"우리 펍에 맥주나 한 잔 하러 갈건데 같이 가실래요? 지금 자면 분명히 내일 새벽에 혼자 깰걸요..."
꾸물꾸물 매트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나를 보고, 이미 숙소에 머물던 사람들이 충고아닌 충고를 해준다.
"아예...괜찮아요...도저히....전 그냥 잘랍니다...재밌게 놀다오세요..."
그래..내일 새벽에 혼자 깨는 한이 있어도 오늘은 그냥 자야겠다.
도저히 눈이 감겨서 못 배기겠다.
열심히 자고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런던시내를 누벼봐야지.
런던에서의 첫날밤이다.
'Good N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