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旅行/유럽배낭여행 | 2004

유럽배낭여행 [런던]

제이우드 || 2023. 6. 14. 17:37

2004.10. 3. 日  

 

새벽 6시

시차 때문인지 아니면 바뀐 잠자리가 낯설어서인지 정말 새벽에 눈이 번쩍 떠진다.

일단 화장실로...

 

영국와서 새로 알게된 사실인데, 유럽의 주택 욕실은 바닥에 방수처리를 하지 않는단다.

배수구도 없이 그냥 나무 위에 타일만 바른게 끝이라..

물이 계속 닿으면 아래로 새기도 하고 썩어서 내려 앉기도 한단다.

그래서 늘 바닥에 튄 물기는 걸레나 수건으로 닦아줘야하는 번거로움이 있다고 한다.

이런 생활습관이 몸에 벤 유럽사람들이야 하등 불편할 게 없을지 몰라도,

물 팍팍 튀겨가며 욕실 쓰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간 신경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제도 습관적으로 욕실 바닥에 물뿌렸다가 황급히 걸레로 닦았었다.

샤워할 때도 커튼을 밑단이 욕조 안으로 들어오게 해서 샤워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빨리 씻고 일찍 나가 볼까...'

 

Jubilee line

"one day, 1-2 zone please~"

아침 공기가 제법 스산하다.

지하철 일일권을 손에 쥐고 플랫폼에 앉아 있으니 몸이 으스스 떨린다.

하늘도 구름이 꼈는지 뿌옇게 흐려져 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개통된 런던 지하철은 그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냄새가 여기저기서 풍긴다.

오래된 철재 벤치, 낡은 스피커, 닳아 있는 선로, 벽에 있는 알지 못할 낙서들..

그런데 이런 것이 지저분하다거나 흉물스럽지 않고 왠지 다 고전적이고 운치있는 느낌이다.

흔히 말하는 그 '영국식'의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것에 대한 호감 같다고나 할까..

지하 깊숙히 뚫려 있어 2차대전때 독일군의 런던 폭격을 견디게 해준 방공호 역할도 했다는 런던 지하철.

깊고 긴 그 지하 통로 속에서 한 악사의 일렉 기타 선율을 타고 비틀즈의 'Yesterday'가 멋스럽게 울려 퍼진다.

 

레스터 스퀘어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린 곳은 바로 거리 한 복판. 나오긴 했는데 이거 좀 당황스럽다.

에스컬레이터가 바로 외부와 연결될 줄이야...

거리 가득 사람들은 지나다니지..빨간색 이층버스도 휙 지나가고..낯선 건물에 낯선 거리에...

갑자기 거리로 내던져 지니까 방향감각을 상실했다.

이런 기분 대학교 1학년때 처음 서울살이 할 적에 지하철타고 실수로 을지로에서 내렸다가

사방을 둘러싼 빌딩 사이에서 느낀 당혹감 이후로 처음이다.

'어디로 가야되나?'

지도를 이리저리 돌려보는 사이, 뒤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틈에 끼어 광장으로 내몰렸다.

 

런던에 가면 뮤지컬을 보라는 말을 들었다.

미국 브로드웨이와 함께 뮤지컬의 본고장으로 널리 알려진 런던에 왔으니 뮤지컬 하나 쯤은 봐주라는 얘기겠지.

그만큼 런던에는 뮤지컬 공연이 많고 대중적이란 얘기도 되고.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첫눈에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건 길거리 양 옆으로 온통 뮤지컬 티켓 판매 부스다.

'오페라의 유령, 라이언 킹, 맘마미아, We'll rock you, 레 미제라블....'

다들 워낙 널리 알려진 작품들이라 눈에 익은 것이 많다.

평소 뮤지컬에 썩 관심이 있는 편이 아닌터라 '런던 가면 꼭 뮤지컬 봐야지' 하는 생각은 없었는데

막상 이 수 많은 티켓 부스를 보니 꼭 봐야만 할 것 같은, 안 보면 괜히 나만 이상한 사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마치 영화관에서 다 팝콘 먹는데 나만 안 먹고 멀뚱멀뚱 앉아 있는 것 처럼 말이다.

'뭐 하나 보는 것도 나쁘진 않지...'하고 큰 맘 먹고 티켓 부스에 들어 섰는데,

일요일이라 다 팔렸단다. 예매도 안 되니 내일 아침 10쯤에 다시 오란다.

'호오...정말 많이 보긴 보는가 보네...'

여행 안내책자에서 사진으로만 보던 거리에 내가 서 있다.

'p.137에서 본 버거킹도 있고, 극장도 있다. 그럼 저 길로 가면 피카딜리 서커스도 있겠네..'

제자리에서 한 바퀴 스윽 돌아보며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에 흐뭇해 한다.

'좋았어~ 가자!'

 

'저기 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은 뭘 마시지?'

'이 가게에서는 뭘 파나..저 광고 뭐라는 거야?'

'이 건물은 언제 지었을까? 꽤 오래되 보이는데...'

'오....저 노란 머리 아가씨 이쁜데~'

.......

내 시신경이 뇌를 자극 하는 동시에 내 머릿속은 온갖 의문문과 감탄사로 가득 채워진다.

주절주절주절...

 

오른쪽을 조심하세요

일본에서는 주로 지하철 타고, 서 있는 차만 봐서 그런지 좌측통행이 어떻다라는 걸 느낄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런데 런던에서 이제 길을 건너려고 습관적으로 왼쪽을 쳐다 보면,

어김없이 머리 뒤에서 달려오는 차 때문에 '아~ 참! 왼쪽으로 가지..'하고 다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게 된다.

'왜 영국에선 차가 왼쪽으로 달릴까? 콧대 높은 섬나라의 자존심인가?'

횡단보도에서 고개를 좌우로 돌리는 사람들은 거의가 나처럼 영국에 여행온 사람들인 것 같다.

 

그리고 또 특이한 도로 문화...

영국사람들은 횡단보도에 빨간불이 들어와도 차가 없으면 그냥 지나 간다.

아...생각해 보니까 일본에서도 그랬던 것 같다.

자동차도 천천히 달리고 도로의 폭도 우리보다 좁기는 하지만 이런 사소한 융통성이 통용된다는게 다소 의외다.

유럽에선 인적 없는 새벽에도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오면 차가 멈춰설 정도로 질서의식이 투철하다고 들었는데...

안전에 별 문제가 없다면 이런 사소한 예외는 일반적인 일인 것 같다.

 

물론 이러한 예외가 통용되기에는 우리나라 운전자들의 운전습관이 그리 미덥지 못한게 아쉽지만.

 

피카딜리 서커스

지도상에 표시된 거리는 생각보다 더 짧은 것 같다.

사람들과 같이 가볍게 걷다보니 느닺없이 피카딜리 서커스가 나타난다.

 

'에로스'가 하염없이 사랑의 손짓을 보내고 있는 이 곳이 그 유명한 피카딜리 서커스.

처음에 여행 준비할 때 '서커스'라길래 여기에 무슨 유명한 서커스 극단이 있는 줄 알았던 이곳은,

우리에게는 'S그룹 광고판이 있는 외국의 유명한 거리'로 더 알려진 곳이다.

여기저기 에로스 동상과 같이 기념사진 찍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아니면 계단에 두세명씩 앉아서 얘기하거나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고.

 

표지판 밑에서 지도를 펼쳐들고 또 이리저리 돌려가며 방향을 찾았다.

'음...저기가 옥스포드 거리고 저 위가 차이나 타운이고...다시 저기 밑이 내셔널 겔러리고.....음음'

이제야 방향감각을 조금 찾은 것 같다. 머리 속에 동선이 그려진다.

생각보다 옹기종기 모여있어서 걸어다녀도 별로 힘들 것 같지는 않다.

 

잠시 지나가던 빨간 이층버스를 배경으로 사진 한컷.

영국오면 꼭 해보고 싶었던게 이층버스를 배경으로 사진 찍는 거였다.

참 꿈 한 번 소박하지...

 

코벤트 가든

주말이라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 같아서 사람 구경이나 할 겸,

레스터 스퀘어를 다시 가로질러 표시판을 따라 코벤트 가든 쪽으로 걸어갔다.

여기도 처음엔 '가든'이라길래 무슨 예쁜 정원인 줄 알았는데, 일종의 오래된 시장 같은 곳이다.

 

길을 걷다보니까 한 쪽에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가 나온다.

'여기가 입구인가?'

 

한 커플로 보이는 두 남녀가 비틀즈 음악을 틀어 놓고 작은 비틀즈 인형을 움직이며 공연을 하고 있다.

드럼을 치는 손이며, 기타를 치는 손이 아기자기한게 단순하지만 꽤 재밌다.

특히 다소 느끼한 감이 없지 않은 남자의 표정도 재밌고...

코벤트 가든으로 가는 길가에는 이 두 커플 말고도 많은 길거리 예술가들이 눈을 즐겁게 해준다.

가로등에 꼼짝않고 그냥 매달려 있는 사람, 마술 하는 사람,

동상처럼 가만히 있다가 동전 던져 주면 판토마임을 하는 사람....

나름대로 준비한 쇼를 보여주는 사람...

 

글쎄,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앞에다가 동전 바구니 하나 던져놓고

자기들의 인생을 즐겁게 재밌게 사는 사람들인 것 같다.

인생을 즐기며 사는거....그거 좋은 일 아닌가....

 

일요일이라 그런지 정말 사람들로 가득하다.

맛있는 과자 냄새 같기도 하고, 과일 향기 같기도 한 그윽한 냄새가 가득한 건물 안쪽에는

온갖 잡동사니들을 파는 가게들과 구경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향기나는 초도 있고, 런던의 배경이 찍힌 예쁜 사진 엽서도 있고, 반짝거리는 악세사리도 있고

작은 그림을 팔기도 하고, 옛날 활자처럼 책에다가 서명을 찍어 주는 것도 있고...

특이한 디자인의 옷이며 가방도 팔고, 오래된 책을 파는 곳도 있다.

 

어딘가에서 고소한 커피향에 아름다운 선율이 뭍어 흘러들었다.

가든 내부의 카페....

4명의 연주자들이 카페 손님들과 사람들을 위해 멋진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아름다운 미소를 띄며 연주하는 아가씨 옆에서 어깨 춤을 추는 할아버지

느긋히 차를 마시며 한가롭게 그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

'아....어쩜 이렇게 편안하고 여유로울까.....'

정말 대단한 것도 아니고 거리에서 연주되는 클래식 음악과 구경하는 사람들 뿐이지만,

이런 일상의 작은 부분에서 드러나는 영국인들의 여유와 멋은 정말 부러울 따름이다.

 

정말 오랫동안 몸에 익은 듯한 이들의 이런 여유와 멋이 너무나 부러워 두 곡이 연주될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아침부터 흐리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잠시 비를 피해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가 우연히 '세인트 폴'이란 오래된 작은 성당 앞 마당에 들어섰다.

좁은 골목길 뒤로 이렇게 넓은 정원이 있을 줄 몰랐는데 아담한 정원에 나무 벤치가 보기좋게 늘어서 있었다.

 

'잠시 큰 길을 벗어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라'....어느 여행가의 말이 생각난다.

 

Fish & Chips

점심때가 되니까 슬슬 또 배가 고파진다.

영국음식 맛 없는건 영국인들도 인정하는 정도로 영국에는 유명한 먹거리가 없다.

그래도 그나마 유명한 'fish & chips'를 찾아서 다시 레스터 광장 쪽으로 걸어갔다.

 

빗방울이 거세져 빨리 걷다가..바람도 거세지니 조금 뛰다가.. 그냥 깔끔해 보이는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영국 아가씨들은 대체로 못생겼다던데 일단 서빙하는 아가씨가 정말 이뻐서 일단은 만족.

'영국인이 아닌가? 훗'

커다란 대구 튀김에 한 가득 따라 나온 감자 튀김.

튀긴 음식을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어서 감동할 정도의 맛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게 나쁘진 않다.

 

같이 나온 감자튀김는 도저히 배가 불러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오늘부터 이제 한 달간 기름기 음식만 먹겠네...'

따뜻한 핫초코 한 잔으로 마무리 한 다음 내셔날 갤러리로 향했다.

 

내셔날 갤러리

빗방울이 좀처럼 가시지 않은채 미술관 안으로 들어섰다.

관람료도 없고 비가 와서 그런지 미술관 안은 사람들로 더 붐볐다.

인포 데스크 앞에서 우산을 접으며 잠시 여행 오기 전에 읽었던 책 내용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렘브란트, 보티첼리, 고흐, 루벤스.......'

 

심호흡 한 번 크게 하고..미술관 팜플렛을 하나 뽑아들고..중앙 홀쪽으로 걸어갔다.

 

고급스러운 갤러리 가득히 걸려있는 수 많은 그림들이 마치 마법처럼 겔러리 문을 열 때마다 눈앞에 펼쳐진다.

보기만 해도 방대한 양의 이 그림들이 전부 각 시대와 화풍을 대표하는 명작들이라는게 놀라울 따름이다.

'room30, room32, room37, 36, 40....'

그저 멋 모르고 그림만 쳐다보며 걷다보면 지금 위치가 헷갈리기 십상이다.

갤러리 입구에 적힌 번호를 유념하지 않고서는 미술관 안에서 방향잡는 것도 상당히 힘든 일이다.

 

본다...

..........

걷는다.

멈춘다.

또 본다.

...........

 

(아래 그림들은 내셔날 갤러리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이다.)

The Avenue at Middelharnis, 1689. HOBBEMA, Meindert

 

An Experiment on a Bird in the Air Pump, 1768. Wright of Derby, Joseph

 

A Grotesque Old Woman, about 1525-30. MASSYS, Quinten 

 

Sunflowers, 1888. VAN GOGH, Vincent

 

내 취향은 아무래도 네덜란드 화가들의 그림과 일상 풍경화쪽인 것 같다.

고흐와 렘브란트야 말할 것도 없고, 호베마와 터너의 풍경화가 맘에 들었다.

아무래도 기독교와 신화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다소 획일적인 중세와 르네상스의 그림들보다는

일상의 모습과 아름다운 풍경을 그린 그림과 화가의 개성이 강한 그림들이 보기 쉬웠는지 모른다.

 

책에서만 본 작품들을 눈앞에 직접 대한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와 마르스'에서부터 홀바인의 '대사들', 렘브란트의 '자화상'

벨라스케즈의 '비너스의 화장'와 마네, 모네의 작품들

.....그리고 불같은 삶을 살다간 고흐의 '해바라기'까지..

너무나 멋진 그림들이 이렇게 한 곳에 다 모여있다는건 그림을 감상하는 이에겐 큰 행운인 것 같다.

 

빗방울이 흩날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많이 잦아 들었다.

내셔날 겔러리 앞으로 탁 트인 트라팔가 광장이 더 없이 시원스럽다.

 

영국의 또 다른 자존심의 상징인 넬슨 제독이 저 높은 곳에서 런던 시내를 내려다 보고 있다.

 

비오는 런던...

사람들은 변덕스럽고 칙칙한 날씨의 런던을 두고 불평을 하기도 한다.

햇빛도 잘 안나고 습기에 차 눅룩한 공기 하며....

오늘만 해도 흐릿한 하늘에 오후 내도록 비가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했다.

그래도...

일년 내도록 햇볕이 쨍쨍하고 일년에 한 두 번 집중호우가 쏟아지는 런던이 과연 지금보다 더 매력이 있을까?

비가 오면 약간 우수에 잠기고 다소 가라 앉은 듯한 이 분위기...

코끝을 적시는 습한 공기와 바지 끝단에 튀는 빗방울이 런던의 묘한 매력이 아닐까 싶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저녁 먹으러 가야겠네....오늘은 여기서 끝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