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0. 1. 金
내 인생에서 출국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생각보다 빨리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24살에 하는 출국이 남들에게는 그저 별일 아닌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엄청난 '별일'이다.
언젠가는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이번에 이렇게 나가게 되는 것은 다소 갑작스런 감이 없지 않다.
하루 이틀 떠나는 여행도 아니고 비용도 기간도 모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배낭여행이라
결심하고 준비하기까지 처음부터 많은 고민을 했었다.
'한 달이라는 긴 시간동안 여행을 떠나서 내게 주어지는 것이 무엇일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 꼭 지금 가야하나?'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굳힐 때까지 이 물음을 수도 없이 되뇌었다.
그렇다고 이 물음에 대한 확실한 답을 얻었기 때문에 떠나야 겠다는 결심을 굳힌 건 또 아니다.
여행을 명분을 따져 가는건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그럴싸하게 드러낼 수 있는 거창한 명분이 나에게는 없었다.
물론 복학하기 전까지 시간적 여유가 있는 지금이 시기적으로 아주 좋은 때임에는 틀림이 없는 사실이나,
그것만으로 배낭여행의 명분을 삼기에는 설득력이 좀 떨어졌다.
다만...너무도 단순한 이유일지는 몰라도,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것을 직접 보고 느끼고 싶을 뿐이었다.
내 머리 속에 들어 있는 것들을 거기 있는 모든 것들과 한 번 맞대어 보고 싶기도 했고.
떠나는 이 순간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이유는 없다...
김해공항 출국
난생 처음 겪는 출국과정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출국신고서를 쓰는 일부터 출입국 양쪽면을 다 기재해야 하는지, 그리고 보딩패스는 어디서 받는지,
짐은 또 어디서 보내는지, 지금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어리둥절하고 얼떨떨할 따름인데 그래도 웃음이 난다.
이렇게 하나하나 두리번거리고 머리 긁적이는 나 자신이 너무 재밌어서 말이다.
아마 앞으로 한 달 동안 이렇게 두리번거리고 뒤통수 긁적일 일이 수도 없이 많지 않을까.....
"정재훈씨 군대 갔다 왔죠?"
"예? 아...네.."
'탁~!'
경직된 여권 심사 직원의 물음에 당황하며 대답하자 내 여권에 대한민국 출국 허가 도장이 하늘색으로 꾹 찍혀 있다.
'오호~이게 이렇게 생긴거구나...'
신기한 듯 여권을 계속 만지작 거리고 있자니 곧 탑승 수속이 이뤄졌다.
12:00pm 오사카 간사이행 JAL968
특유의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아리가또'를 연발하는 일본 스튜어디스들의 환대를 받으며 난생처음 국제선 비행기에 발을 디뎠다.
산뜻한 검정 옷을 입은 스튜어디스는 열심히 손님들을 자리로 안내하고 있다.
'오...일본 스튜어디스도 이쁘네..'
살짝살짝 쳐다보다가도 눈만 마주치면 어김없이 고개숙이고 인사하는 찰나에 더 이상 쳐다보지는 못하겠다.
일본사람들 인사하는거 하나는 정말 타고 났다.
비행기를 자주 탄건 아니지만 중력의 끈을 매달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순간은 정말 매번 긴장된다.
솔직히 말해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 꼭 바이킹을 타고 정점에 올랐다가 떨어지는 기분이라고 할까..
'으.....떴냐?'
저 아래 산과 집들이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구름 밑으로 사라지고,
이제 한 달 뒤에나 돌아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 갑자기 비장한 마음이 든다.
'잘 있거라 고국의 산하여.....한 달 뒤에 보자~!'
점심 JAL기내식
일본 비행기를 타니까 역시나 초밥 도시락이 나왔다. 역시나 처음 먹어보는 기내식.
유부초밥 한 개, 김밥 두 개, 겨자 초밥 두 개, 녹차도 팩에 나오고..
국내선 타봤자 음료수밖에 못 마셔 봤는데 이정도면 훌륭하다.
팩에 든 녹차를 마시며 한 40분 남짓 지나니까 아래로 일본 땅이 보이기 시작한다.
일본이라는 곳이 우리 바로 옆에 있는 섬 나라인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가까이 있는 줄 몰랐다.
게다가 산이며 강이며 논과 밭들의 모양이 우리나라와 아주 흡사하다.
'음...여기가 일본이구나..'
1:00pm
한 시간 남짓한 비행끝에 드디어 일본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 착륙.
비행기를 빠져나오자 후텁지근한 오사카의 공기가 확 밀려든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일본말과 일본어 표지판이 여기가 진짜 일본임을 말해줬다.
'왔긴 왔나봐....'
JAL창구에서 호텔 확인을 받은 후에 사람들이 줄줄이 늘어선 입국 심사대 앞으로 갔다.
난생 처음 외국에 와서 '저 좀 들여보내 주세요~'하고 서 있자니 조금 긴장이 되긴 했지만
씩씩하게 가서 먼저 인사를 건냈다. "하이~"
"티껫또- 플리즈~"
입국 심사 아저씨의 전형적인 일본식 영어발음에 잠시 '이 아저씨가 뭐라는 거지?'하고 당황은 했지만
별 어려움 없이 일본 임시비자를 받았다.
72시간 임시비자. '찰칵~'
'YOKOSO JAPAN!!'
HOTEL KANSAI
"check in, please~"
"하이, 도죠~"
역시나 처음 해보는 호텔 체크인에 잔뜩 긴장해 있는 찰나,
열심히 이름이며 여권번호를 적고 있자니 호텔직원이 손을 내민다.
'오...끝난건가? 악수하자고? 악수해야되는거야? 아....영화 보면 이럴때 악수하더라'
나도 씨익 웃으며 살며시 손을 내밀자 호텔직원이 당황해하며 말한다.
"아노...펜, 플리즈~"
'이런 낭패가 있나....펜 달라고?'
호텔직원은 재밌어 죽겠다는듯이 씨익 웃고, 나도 어찌나 어이없든지 씨익 웃었다.
'그런거였어?...하하....말을 해야지 이사람아..'
'오오...좋은데'
호텔 싱글룸이라는 곳을 처음 들어와본 나로서는 그저 좋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깨끗한 침대에 옷장, TV, 전화, 냉장고, 커다란 욕실....
'이런데서 하룻밤 자면 얼마나 나올까?'
나중에 복학해서 이런 원룸에 살면 참 좋겠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도 해 보며 잠시 휴식...
싱글룸의 단점은 너무 심심하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혼자 이것 저것 뒤적거리고 나니까 별로 할 일이 없다.
'TV나 볼까?'
NHK뉴스, 아사히뉴스, 드라마, 드라마, 광고, 다큐멘터리, 광고, 광고, 광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방송을 보고 있자니 또 심심하다.
그때...
TV 편성표를 살피다가 눈에 확 띄는 걸 발견했다.
'오오~옷'
다름이 아니라 한 페이지 가득 적혀있는 성인방송 채널 안내표.
3류 여관방도 아니고 특급 호텔에서 이런 걸 보여줄 줄은 몰랐다.
우리나라 같으면 공항 옆에 있는 특급호텔에서 이런 방송 보여주면 당장 국가 이미지가 어쩌고 하면서
여기저기서 말들이 많을 텐데...여기는 괜찮은가 보다.
잔뜩 기대를 하고 이리저리 살피는데 한 쪽 구석에 나와 있는 안내 글귀..
'유료채널! 하루 1,000엔! 카드는 각층 자판기에서 구입하세요~!'
'=_=;'
4시쯤 저녁도 먹고 오사카 시내 구경도 할 겸 오사카 중심가 '남바'로 나갔다.
공항에서 지하철로 5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곳인데 간사이 공항에서 남바까지 지하철 요금 890엔.
비슷한 거리의 우리나라 지하철 구간과 비교하면 정말 비싼 요금이 아닐 수 없다.
일본 물가가 살인적이라고들 하던데 직접 이렇게 느끼게 되니까 절실히 실감할 수 있었다.
지하철표 사는 것부터 두리번 거리다가 개찰구를 잘 못 들어가서 다시 반대편으로 넘어가고...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어쨌든 오사카 남바 역까지 가는 지하철을 잡아 타서는
일단 자리에 앉아 열심히 차창 안팎 이곳 저곳을 둘러 봤다.
사람들의 생김새, 옷 입은 모양, 건물과 집의 모양, 거리의 풍경....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나라 사람과 비슷하게 생겼으면서도 어딘가 다르고
여학생들은 진짜 세일러문 같은 교복에 헐렁한 양말, 남학생들은 까까머리에 만화책에서 봤음직한 그런 교복..
차들은 천천히 좌측통행, 일본식 2층 목조 기와집 사이로 난 깨끗한 거리를 달리는 자전거들...
'흠...'
평소 생각하던 일본의 모습과 TV로 봐 오던 일본의 모습을 실제로 확인하게 되니까 기분이 묘했다.
'정말...일본이구나....'
Namba City
오사카 중심가인 이곳은 고층빌딩이 눈에 띄는 깔끔한 현대식 거리이다.
서울 어느 곳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낯익은 거리의 모습이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좀 더 깨끗하다라는 것이다.
물론 차들은 좌측통행이고....
일본에 가 본 사람은 알겠지만 길거리에 늘어선 엄청난 자전거 줄을 보면 입을 다물 수가 없다.
가로수 밑을 따라 거리 끝까지 세워진 자전거가 아주 장관을 이룬다.
쭉 늘어선 자전거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근데 일본 사람들은 왜 이렇게 자전거를 많이 탈까?'
내가 보기에는 일본 도로가 자전거 타기에 썩 좋은 환경 같지만은 않아 보였다.
물론 우리나라 보다야 좋지만...
자전거 전용 도로도 별로 눈에 안 띄거니와 인도는 사람들로 붐벼서 자전거랑 사람이랑 여러번 멈칫거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이렇게 자전거를 애용하는 이유는 뭘까?
모두가 다 환경애호가라서? 아니면 다들 투철한 절약정신에 사로잡혔나? 그것도 아니면 다들 운동하려고?
그런건 아니겠지...
자전거가 아무리 편리하다지만 이렇게 '집단적'으로 자전거를 이용하는 근본적 이유는
...아마도 비싼 물가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어찌보면 구조적으로 고물가 체계인 일본 사회에 적응해 살아가는 일본인들의 '단순한 습관적 삶의 방식'이 아닐까..
자전거를 탈 수밖에 없는 일본인들의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잠시 해 본다.
돌아다니니까 슬슬 배도 고프고 식당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뭘 먹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본에 처음 왔으니까 일본식으로 먹어줘야겠지?'
회전초밥, 덥밥, 우동, 생라면, 도시락....생각나는 일본 음식을 죄다 떠올리며 메뉴를 생각했다.
결론은...'四天王'이라는 곳에서 먹은 690엔짜리 일본식 생라면.
숙주 나물도 있고, 국물이 아마 돼지고기 육수인것 같다. 거기에 참기름 같은 소스도 뿌려준다.
처음에는 색다르고 맛있는데 반쯤 먹으면 점점 느끼해진다.
그래도 그렇게 입에 안 맞지는 않았다.
難波本通
천장이 지붕으로 덮힌 거리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일본답게 거리 곳곳에 늘어선 오락실에 슬롯머신기계가 불을 뿜고, 호빵맨이 날아가는 인형뽑기 기계,
넥타이를 맨 샐러리맨 아저씨, 일본 특유의 부시시 왁스 머리를 한 사람들
교복입고 가방 삐딱하게 들고 돌아다니는 남학생, 짧은 세라복 치마를 휘날리는 여학생..
이런저런 전단지를 나눠주며 소리치는 사람들....
생김새가 비슷해서 일까? 아니면 우리가 이런 일본의 분위기를 익히 많이 접해온 탓일까?
이곳에 들어서니까 특별히 여기가 낯선 이국땅이라는 걸 느끼지는 못하겠다.
더군다나 곳곳에 붙어있는 '욘사마' 배용준 사진을 보고 있자니 더욱 그렇고...
일본에 왔으니 오락실에서 오락 한 번 해줘야지 하는 생각에 오락실로 들어갔다.
일본하면 또 이런 오락실 게임의 왕국아닌가?
100엔짜리 슈팅게임을 신나게 두드리고 일어서는 찰나 저 멀리 나의 시선을 붙잡는 오락기 한 대..
'아니 저건.....(ㅡoㅡ)'
화면 한 가득 요염한 자태의 추운 복장을 한 아가씨들이 비춰진다.
우리나라에도 저런게 있긴 한데, 일본에 오니까 그 수위가 훨씬 적나라하다.
'앗...설마 거기까지는....'이라고 조마조마해 할 정도의 수위니까...
일본이 우리보다 훨씬 '드러나'있는 성문화를 가지고 있다고는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가관이다.
드러나다...
내가 말하는 드러나 있다는 말은 서양처럼 개방되었다는 말과는 또 조금 다른 뉘앙스를 가진 거라고 말하고 싶다.
글쎄...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일본만의 독특한 스타일이라고 말하면 될런지...
아무튼 우리와 다른 이러한 정서적인 차이점이 구경하는 나로서는 재미있을 따름이다.
오사카의 밤은 화려하다.
번쩍이는 네온싸인에 스쳐가는 많은 사람들, 마치 주말 저녁 종로 거리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흔히들 일본과 우리의 '그림'이 비슷하다는 소리를 많이 한다.
건물 모양도 비슷하고, 사람들 모습도 비슷하고, 산도 들도 다 비슷하다.
누가 누구를 닮은 것일까? 아니면 각자 그러한 것이 우연히 비슷해진 것 뿐일까? 그것도 아니면 처음부터 닮았었나?
분명 일본과 우리는 다르다. 예의도 다르고, 사고방식도 다르고, 정서도 다르다.
그러나 많은 면에서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는 사실을 느낄 때마다
반대로 지금 우리와 이들의 분명한 차이점들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늦은 저녁 지하철...귀가하는 사람들의 축 쳐진 모습이 친근하다.
아마 다들 퇴근하고 가는 길이겠지.
창밖 까만 풍경 속에 드문 드문 하얀색 형광 가로등 불빛이 박혀있다.
그래도 가로등 빛은 노란 나트륨 등이 이쁘지......
여행 첫날 밤
호텔로 돌아와 물을 마시려니 물이 없다. 아까 오후에 다 마셔 버렸다.
'물은.....그냥 주나? 어디에 말해야 되지?'
맥주도 하나 살겸 프런트로 내려가다가 직원 아가씨한테 물었다.
"저기...실례합니다."
"하이"
"방에 마실 물이 다 떨어졌는데요.."
"아...각층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자판기에서 뽑아 드실 수 있어요.."
"어...자판기요?...그냥 식수는 공짜로 안 주나요?"
"머 괜찮으시면 화장실 수돗물 그냥 드셔도 됩니다...다 식수로 가능 하거든요"
"에? 화장실 수돗물이요?...에에...그걸....예 알았어요. 고맙습니다"
'아리가또'를 내뱉더니 웃으며 총총히 사라지는 직원 아가씨.
'수돗물이라...그래도 그렇지 화장실 수돗물이라니....'
물대신 500엔짜리 기린 캔맥주를 뽑아다 마시며 외국에서의 첫날 밤을 맞이했다.
기분이 묘하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우리집 이불에서 부시시 일어났었는데, 지금 여기는 오사카 호텔 어느 객실이다.
이럴 때면 잠깐씩 내가 여행 중이란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또 다시 우리집 이불 속일 것만 같다.
'후후....한 달 동안 잘 해보자......'
알람 시계를 7시 반으로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