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가는 배 이야기
배는 참 근사한 탈 것이다.
유닛 당 그 어느 탈 것도 선박처럼 사람과 화물을 한꺼번에 실어 나르진 못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됐고, 효율적이고, 경이로운 장거리 교통수단이 바로 배가 아닐까 싶다.
인류의 조상이 망망대해를 건너 태평양에 산재한 작은 섬 곳곳에 정착할때도 배를 이용했고
대항해시대에 전세계를 누비던 상인과 탐험가들도 작은 범선에 의지한채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넜다.
생각해보면 정말 기가 막히다.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널때 탄 배는 요즘의 선박과 비교하면 말그대로 돛단배에 불과한데 말이다.
대서양을 넘나들며 식민지를 일군 정복자들의 용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바다라는 동경과 두려움의 세상 속으로 둥실 떠가는 배이기에
망망대해 수평선에 걸쳐있는 배 또한 동경과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
석양이 물드는 부산항은 영도대교도 보이고
하나 둘 밝혀지는 가로등과
수많은 별처럼 점점이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이 어우러져 꽤나 근사한 야경을 만든다.
도심의 야경과는 또 다르게 항구만의 묘한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하얀 포말을 만들며 항구에서 멀어지니 괜시리 비장해진다.
배의 느린 속도감이 먼 여행길을 암시하는 듯해
기나긴 여정에 대한 기대감이 한 껏 부풀어진 것 같다.
제법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 배.
이제 바다로 나간다.
몇 시간쯤 흘렀을까.
GPS를 찍어보니 내 위치가 거제도 남쪽 바다 한 가운데 둥실 떠있다.
밤이 깊어 이제 바깥을 내다봐도 바다인지 하늘인지 온통 깜깜할 뿐.
뱃등에 부서지는 하얀 포말과 간간이 보이는 등대와 어선들의 불빛만 조용히 따라오고 있다.
다행히 가끔 좌우로 약간 흔들리는 것 외에는 지금 배가 운항을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잠잠하다.
하지만 배는 배인지라
침대에 누웠는데도 잠이 쉽사리 들지 않는다.
자다가 깨다가.... 배가 한 번 흔들하면 또 살짝 잠에서 깨다가....
캔 맥주를 두 개나 마셨는데도 아마 알게 모르게 바다 위에 떠있다는 육상동물의 본능적인 초조함때문인지
쉽사리 잠이 들지 못한다.
잠잠하던 배가 갑자기 흔들리는 통에 흠짓 놀라 잠을 깼다.
얼마 동안 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태풍이 온다더니 파도가 높아졌나 싶어 부시시 일어나 복도로 나와보니
어라.....배가 막 제주항에 들어서는 중이다.
정박하느라 배를 돌리는 통에 선체가 흔들린 모양이다.
아~ 이것은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양상이다.
먼 바다를 건너 마주한 새로운 곳.
몇 시간이면 전국 어느 곳이든 차로 달려갈 수 있는 우리나라 스케일에서
좀 처럼 느껴볼 수 없는 장거리 국내 이동이 꽤나 색다르다.
마치 해외에 나온 느낌인걸 :)
제주 해안 도로
제주시에서 한림까지 가는 길에 무작정 차를 몰고 해안도로를 달리다보면
말 그대로 달력사진같은 근사한 해변이 쉼 없이 나온다.
안개가 적당히 낀 제주의 푸른 바다.
까만 화산석이깔린 해안과 파란 바다의 색 대비가 모래해변과 달리 산뜻한 느낌을 준다.
시리도록 푸르고 거친 바다가 아니라
온화하고 깨끗한 남국의 바다 정취를 담고 있는 듯 하다.
차를 몰고 가다가도 코너를 돌 때마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그냥 지나치기 힘들어 차를 세우고 연신 카메라를 들이댄다. 들이댈 수 밖에 없다.
이런 풍경을 그냥 지나치는 것은 왠지 관광객의 예의가 아니지.
비단 우리 뿐 아니라
경치 좋은 곳에 가면 도로 한 켠에 그대로 차를 세우고
바다 풍경에 취해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혼자 스쿠터 여행 하는 사람, 어린 애기가 있는 가족도 보이고.....친구끼리 놀러온 팀도 많다.
여행자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한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 :)
바다도 바다지만
도로 옆 까만 제주도 돌담 밑에 화사하게 피어있는 코스모스도 정말 그림이다.
바다가 옆에 있고 또 그 맞은편에 밭을 가로지르는 돌담과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길.
이맘 때...
그냥 제주도 해안 도로를 따라 드라이브 하다 보면 볼 수 있는 정말 수채화 같은 풍경이다.
가을 제주도.
한라산 중턱의 풍경
해안 일주 도로에서 벗어나 좀 더 섬 안으로 들어가면 넓게 펼쳐진 완만한 구릉지대가 나온다.
넓디 넓은 초록으로 뒤덮인 한라산 중턱은 바닷가 풍경과는 또 달리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데
그 모습이 묘하게 이국적이고 운치있다.
오고가는 차도 별로 없는 이차선 도로를 따라
제주의 초원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달리는 기분이 꽤 괜찮다.
도로 옆에서 무심히 풀을 뜯고 있는 말이 너무나 반가운 곳.
수평선이 저 멀리로 너머 보이는 드넓은 녹차밭.
듬성듬성 멀찍하게 오름도 보인다.
오름이라는게 참 기묘하고 외계스러운 지형같다.
이름 모를 녹색 행성에 당도해서 주변을 둘러보면 보일 것 같은 신비스런 풍경이다.
녹차로 만든 ㅇㅇㅇㅇ.
이런, 맛있다 !!!
녹차밭을 뒤로하고 차를 달리다보니 표시판에 '이시돌 목장'이 나온다.
왠지 귀에 익은 이름이라 곰곰이 생각해보니
풍경 사진 찍는 사람들 사이에서 꽤 알려진 목장이다.
언젠가 누가 찍어 놓은 그림같은 초원의 풍경 사진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오오~ 여기가 거기야?
때마침 도로 바로 옆 울타리 근처에서 풀을 뜯고 있는 말들.
차를 세우고 다가 가도 놀라지도 않는 이 녀석들 가까이서 보니까 정말 크고 근사하다.
앞발로 땅을 툭툭 차는데 그 소리 하며 우람한 근육하며
정말 '나는 말이다'라고 힘주어 말하는 것 같다.
이런 녀석 위에 올라타서 달리는 기분이 어떨까?
땅을 울리는 진동과 근육의 움직임이 다 느껴질텐데....생각만해도 정말 근사하다.
사람이 말을 길들이고 타고 다닌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말을 탄다는 것은 여전히 경외의 대상이다.
지금 우리도 이러한데,
말이 없던 신대륙 아메리카에 살던 잉카 사람들이
네 발 달린 동물 위에 올라탄 스페인 정복자를 보고 얼마나 기겁을 했을까.
어쨌거나, 방목이라는 게 진정 이런 것 같다.
드넓은 초원 위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는 근사한 말떼는 정말 목가적인 풍경이다.
몽고 초원도 이렇겠지.
드넓은 초원 위에서 말을 몰아 달리면 얼마나 좋을까.
제주의 해안 풍경
야자수 가로수 덕분에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제주도.
방학이 끝난 비수기라 그런지 도로도 한산하고 관광객도 상대적으로 적어 지금이 여행하기엔 딱 좋은 시기인 것 같다.
내가 보기에 도로 위에 있는 차 중에 절반은 관광객이 모는 렌터카다 :)
괌에 가본 적은 없지만
왠지 이런 분위기가 아닐까?
도로 옆에 야자수가 늘어서 있고 햇살은 따갑지만 바람은 상쾌한 날씨.
그런데 제주도는 9월인데 아직도 덥다.
많이 더워...
수영도 못하고 낚시도 안 하지만
요런 바닷가 작은 마을에 오면 튜브라도 안고서 둥둥 떠다니고 싶다.
방파제에 걸터 앉아 낚시도 해보고
그러다가 해가 뉘엿뉘엿지면 슬리퍼를 끌면서 한가로이 집으로 가는 것이지.
....
말은 이렇게 해도 아마 일주일만 그렇게 지내면 심심할 거다.
주말에 이틀만 실험실에 안 나가도 뭔가 어색한 지금 나 인데.
그래도 제주의 바닷길은 참 근사하다.
누구나 걷고 싶은 길.
소중한 가족과
오래된 친구와
혹은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과 함께 거닐고 싶은 소담한 바닷길.
....
서귀포시 이중섭 미술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기있는 화가인 이중섭이 제주도에 살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 싶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귀포로 피난을 와 살면서
제주의 풍경, 바닷가의 게, 소, 가족애에 관한 그의 작품 세계를 형성했다고 한다.
서귀포 시내에는 '이중섭 거리'까지 조성되어 있고
이중섭 미술관에서 그의 생애 전반을 조명할 수 있다.
사실 '소'를 그린 화가라는 것 밖에,
그리고 굉장히 기구한 삶은 살았던 화가라는 것 밖에 몰랐는데
미술관에 전시된 그의 작품과 편지, 그에 대한 설명을 보니
새삼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화가이다.
유달리 소에 관심이 많았던 이중섭은
소 도둑으로 오해를 받을 만큼 소를 관찰했다고 하는데
제주도에 살면서 소에 대한 그의 습작이 쌓여 그 유명한 작품 '소', '황소' 등이 탄생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중섭이 제주도에 살 때 먹을게 별로 없어서 바닷가에서 '게'를 많이 잡아 먹었는데
하도 '게'를 많이 잡아 먹다 보니까 미안한 마음에 '게'를 많이 그리게 됐다고 한다.
재밌는 이야기다.
전시작품 중에는 이중섭과 그의 일본인 아내가 주고 받은 편지가 있는데
빽빽하게 글을 쓴 것도 모자라 좁은 편지지 귀퉁이에 아내와 두 아들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넣은 것이
떨어져 살던 가족에 대한 이중섭의 그리움과 애뜻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하다.
그가 살던 초가 바로 뒤에 세워진 '이중섭 미술관'에서 내려다 본 서귀포 앞바다는 참 평화스럽다.
이중섭도 이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겠지.
말년이 비극적으로 끝난 비운의 화가이기도 하지만
정말 한 평생을 열정적으로 살다간 예술인이 아닌가 싶다.
돌아가서 이중섭 평전이라도 구해서 한 번 읽어 봐야 겠다.
한라산 1100고지
중산간도로를 타고 가면 해발 1100m까지 차를 타고 한라산을 오를 수 있다.
흔히 '1100도로'라고 하는데, 겨울이면 폭설에 자주 통제되는 유명한 도로이다.
서귀포시에서 제주시로 넘어갈 때 해안도로나 내부순환도로를 타고 갈 수도 있지만
이 산간도로를 타고 제주도를 가로지를 수도 있다.
한라산이 완만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도로 경사가 가파르지 않다.
서서히 위로 올라갈 수록 신기하게도 바람이 점점 선선해지고 식생이 바뀌는게 눈에 보인다.
학교 다닐때 지리시간이나 사회시간에 배웠던 '한라산 표고차에 의한 식생 분포' 그림이 생각난다. 흐흐.
산을 오르다 아래를 내려다 보면
완만한 한라산 아래로 펼쳐진 제주 해안과 넓은 초원, 숲, 하늘, 작은 오름들이 한 눈에 다 보인다.
시야를 가리는 게 하나도 없는 드넓은 한라산.
구름이 앉은 한라산 정상도 여기서 올려다 보면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언젠간 걸어서 한라산을 정복하리라!
크하핫!!
에필로그
오래된 친구랑 떠나는 여행은 부담이 없어서 좋다.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어도 불편하지 않고,
샤워기 물의 온도가 제멋대로여도 마음껏 투덜거릴 수 있어 좋다.
숙소에서 밤 늦도록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벌써 10년이 지난 이야기를 하면서 같이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다.
갓 스무살을 넘겼을 때
함께 밤기차를 타고 동해 바다로 떠났던 친구와
또 이렇게 10년이 지나서 함께 떠나온 여행길은 정말 소중한 하루다.
10년동안 친구도 변했고 나도 많이 변했다.
사람이 변했다기 보다 아마 우리의 주변이 많이 변했기 때문이겠지.
한 10년 있다가 또 함께 어디든 가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