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0.13. 水
아침 두 배로 먹기
아무래도 난 유스가 체질적으로 잘 맞는가 보다.
난간도 거의 없는 2층 침대에서 편하게 너무 잘 잤다.
한 번도 안 깨고 누가 업어가도 모를만큼 편안하게 잔 것 같다.
......
여행 와서 거의 3일에 한 번 꼴로 자다가 꼭 한 번씩 잠을 깨게 된다...
이상하게도 새벽 4시쯤 되면 눈이 저절로 한 번 떠진다.
왠만해선 새벽잠을 설치는 편이 아닌데......
아무래도 머나먼 이국땅에서 잠을 자려니 무의식적으로 예민해지긴 한 모양이다.
그래도 파리를 떠나면서 컨디션이 좀 쳐졌었는데 이제는 몸이 한결 가뿐해졌다.
부시시 일어나서는 파란 잔디구장이 바라다 보이는 커다란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창문으로 확 밀려오는 차가운 아침 공기가 더 없이 상쾌하다.
배낭여행객의 아침 치고는 너무 평화로운 아침이 아닌지 모르겠다.
어제 저녁을 놓친 것도 그렇고 체크아웃 시간도 빠르고 해서 일찌감치 식당으로 내려갔다.
햄2장, 콘푸라이트 한 가득, 커다란 빵 두 덩어리, 버터랑 딸기잼, 따뜻한 홍차 한 잔.....
더 먹으려 해도 음식 종류가 별로 없어서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아무튼.....맛있다.
자다 일어나서 이렇게 빵이 잘 넘어가는걸 보면 현지적응이 아주 잘 된 듯싶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여....
먹고 빵 하나 더 먹어야겠다.
..............
어디 학교서 수련회를 왔는지 죄다 고등학생만한 애들이 지들끼리 막 뭐라고 웃고 떠들고 있다.
확실히 독일어는 불어에 비해서 다소 딱딱하게 들린다.
영어보다는 좀 경직되어있고 불어의 부드러운 발음은 생략된 듯한데 억양은 영어랑 더 흡사한 것 같다.
얼핏 들어보면 영어같아서 자세히 들어보면 독어로 말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죄다 독일 아이들밖에 안 보인다....배낭여행자같은 사람이 안 보이네...
........
서둘러 홍차를 마시고 배낭이랑 침대, 베개 시트를 가지고 내려왔다.
어제 나를 그렇게 고생시켰던 '방문의 메커니즘'은 이제는 더 이상 장애물이 되지 못한다.
알고 나면 이렇게 간단한 것을 어제 그렇게 고생한걸 생각하니까 우습다.
일단 역으로 가서 뮌헨가는 열차 시간도 알아보고 코인락커에 배낭도 넣어 둬야겠다.
체크아웃을 하고 밖으로 나서니 입김이 허옇게 흘러 나온다.
'그건 그렇고 오늘 날씨가 꽤나 춥네......'
.....
.......
도무지 여기 대중교통 체계는 알 수가 없다.
역에 가려고 버스를 타서 어제처럼 지폐 한 장을 기사 아저씨게 보이니까
또 뭐라고 한참 궁시렁거리더만 잔돈을 거슬러준다.
근데 다른 사람이 지폐로 요금을 내면 아무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잔돈을 건네주고....
사람 차별하는건지....아니면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지.....
누구는 표를 안 사고 싶어서 안 산거냐고.....
표 사는 곳이 안 보이는데 어쩌란 말이야....
........
원래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뮌헨가는 중간 기착지인 슈투트가르트에서 튀빙엔이라는 곳을 가고 싶었다.
독일에서는 대학 도시로 알아주는 튀빙엔은 고풍스런 마을의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자그만 도시다.
우리에게는 아직 널리 알려지진 않아서 사람들이 많이 찾아가지는 않지만 그래도 독일을 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그런 곳이다.
그래서 꼭 가보고 싶었는데....일정이 계획대로 꼭 들어맞지가 않아서 부득이하게 포기해야할 것 같다.
계획을 틀어서라도 꼭 가야겠다는 확신도 잘 서지 않고....
만약 그랬는데 생각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 때문에 선뜻 나서지를 못하겠다.
........
여행을 하면서 꼭 많은 곳을 둘러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저 되는대로....가다가 마음에 들면 며칠 더 머물고....시간이 없으면 그냥 지나쳐도 되고....
그저 마음이 내키는대로 따라 움직이는게 더 좋지 않을까 싶다.
대신 지금 있는 여기에서 더 많은 무언가를 보고 느끼면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
2시 16분에 슈투트가르트행 IC가 있고 슈투트가르트에서 2시 46분에 뮌헨으로 가는 ICE가 있다.
유럽 역에서는 목적지와 날짜, 시간대만 말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열차를 조회해서
A4용지에 타임테이블로 출력해 주는데 이거 하나는 정말 기가막히게 편리하다.
따로 타임테이블만 뽑아 주는 창구가 설치되어 있을 정도로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신경을 쓰고 있는걸 보면
정말이지 철도 시스템 하나는 유럽이 세계에서 제일 잘 구축되어 있는 것 같다.
그나저나 2시 16분이면.....좀 서둘러야 겠는데....
커다란 코인 락커에 배낭을 밀어 넣고 하우프트 거리로 가는 트램을 잡아 탔다.
이번에는 트램 티켓을 사서 당당하게 스탬프도 찍었다.
아무래도 또 지폐 한 장만 내밀기가 무안해서 말이다....
드르릉 거리며 레일 위를 투박하게 달리는 트램의 차창 밖으로 하이델베르크의 조용한 풍경이 지나간다.
독일 답게 거리가 아주 깨끗하고 반듯반듯한게 정리정돈이 아주 잘 돼 있다.
우리나라도 과거 한 때 서울에 전차를 운행한적이 있었는데 도시가 팽창하고 차량이 많아져 버스나 지하철로 다 대체된 상태다.
배기가스도 없고 배차시간 정확한 트램도 상당히 매력있는 교통수단 같은데
타당성을 고려해서 다시 한 번 도입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내가 보기에는 앞뒤 좌우로 심하게 흔들거리는 우리나라 버스들 보다야 훨씬 더 좋은 것 같다....
..........
하우프트 거리에 내릴 때까지 나 말고 스탬프 찍는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다들 그냥 탄다....
이사람들은 도대체 티켓을 가지고 있긴 한건지 모르겠다.
다들 일년 정액권이라도 끊어서 다니는지...
아무리 양심에 맡긴다지만 정말 이렇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안 생기는걸까?
한 두 명의 무임승차자를 무시하고 나머지 대다수의 양심적인 사람들을 믿고서 이런 시스템을 운영한다는게
어찌보면 독일 사회의 무서운 자신감의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이 사회가 양심적이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나라에 이런 제도를 도입하면 어떻게 될런지...
어찌됐건 무임승차의 유혹이 너무도 강한 대중교통 체계를 가지고 있는게 독일인 것 같다.
검표원도 눈 씻고 찾아봐도 안 보이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무임승차해 버릴 걸 그랬네....
Haupt str.
하이델베르크 고성까지 쭉 이어진 하우프트 거리는 하이델베르크 구시가지의 대표적인 거리이다.
네카강을 경계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나눠져 있는데
트램을 타고 구시가지로 넘어오면 주변 풍경이 확연하게 고풍스러운 모습으로 바뀌는걸 느낄 수 있다.
비스마르크 광장에서 내리자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스친다.
차가운 바람에 섬찟 놀라 몸을 한 번 움찔 거리고 목도리를 더 단단히 둘러맸다.
파리, 브뤼셀 보다 남쪽으로 좀 더 내려왔는데도 어찌된게 온도가 더 내려간 것 같다.
독일 가면 춥다던 사람들의 엄살이 거짓말이 아니었나보다.
건물들 그림자에 가려 하우프트 거리는 썰렁한 기운이 더 하다.
하우프트 거리의 여러 상점들을 구경하며 코른마크트 광장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대부분이 의류 상점이고 간간히 레스토랑, 편의점도 보인다.
'1Euro shop!'
우리나라에 '천원 상점'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 1유로 상점이 있다.
호기심에 들어가보니까 양말, 컵, 사무용품......심지어 목도리까지 다 1유로다.
이런 횡재가 있나....
1유로치고는 물건들도 아주 괜찮아 보여서 까만 털장갑 하나를 낼름 집어들었다.
카메라 들고 돌아다니자니 손이 너무 시려워 장갑 하나 있었으면 했는데 마침 잘 됐다.
.......
조금 더 걸어가면 독일의 유명한 백화점 'Kaufhof'가 있고 그 앞으로 커다란 의류 매장이 여러군데 있다.
독일이 유럽에서 물가 대비 옷값이 비교적 저렴한 나라라고 한다.
실제로 보니까 오리털 파카나 점퍼같은 것도 우리나라보다 가격이 더 저렴하다.
'후아....저거 하나 걸치면 정말 따뜻하겠는데....'
매장을 한 번 쓱 훑어보니까 보기만 해도 따뜻한 오리털 파카가 한 가득이다.
가격도 별로 안 비싸서 하나 살까 했는데.....
안 그래도 좁은 배낭에 저것까지 샀다가는 나중에 너무 버거울 것 같아서 관뒀다.
'그래....체코까지만 버티자....오스트리아만 넘어가면 따뜻할거야...'
선제후 박물관과 학생감옥은 그냥 지나치고 성령교회를 지나 코른마크트 광장에 이르자
드디어 저 위로 하이델베르크 성의 아련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침 안개를 살짝 머금은 성의 골격이 인상적이다.
코른마크트 광장 한 켠에 세워둔 자전거....
하이델베르크 성까지는 등산열차도 있지만
낙엽이 떨어진 가파른 경사로를 따라 천천히 올라가는게 더 좋을 것 같다.
노랗게 물들어 있는 낙엽....
가을은 가을인가보다.
근데 왜 이리 춥냐......
하이델베르크 성
부서진 성벽에 붙어 있는 담쟁이가 세월의 유구함을 말해주고 있다.
약간 붉은 빛을 띄는 돌을 반듯반듯 깎아 쌓아 올린 하이델베르크 성 입구에 이르자
저 밑으로 하이델베르크를 가로지르는 네카강과 칼 테오도르 다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밝은 벽돌색의 지붕과 어우러져 아주 근사하다.
똑같은 모양의 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는 직육면체의 집들이 보여주는 단순하면서도 정돈된 모습.....
네카강의 풍경을 실컷 감상하고 나서 어두운 성 통로를 타라 올라가다 꺾어 들어가면 매표소가 나온다.
좀 있으니 단체로 관광을 온 우리나라 어른들과 왁자지껄한 중국 사람들 한 무리가 지나간다.
유럽에 와 보니까 의외로 중국 단체 관광객들이 우리나라나 일본 단체 관광객들보다 훨씬 많다.
마치 90년대 우리나라처럼 여기저기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사진찍느라고 아주 난리도 아니다.
.........
......
무너진 성채에는 파란 잔디가 깔려있다.
......
붉은 빛이 감도는 성내부는 호젓한 정원처럼 아늑하다.
외벽이 많이 파괴되어 온전한 부분은 성내부의 몇몇 건물들밖에 없는데
성 안에 지어진 건물치고는 상당히 얌전한 건물들이다.
프랑스군의 포탄에 맞아 한 쪽면이 떨어져나간 망루의 모습에서야 비로소
이곳이 옛날 성으로서의 역할을 했던 곳이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중세 유럽의 탄탄한 성벽과 음침한 느낌을 어느 정도 기대했었는데
하이델베르크 성은 마치 백발의 노인을 대하듯 차분하고 편안한 느낌이다.
고달픈 세월이 만들어낸 노인의 깊은 주름처럼....
허물어진 성벽은 치열했던 역사가 만들어낸 또 다른 주름살인 것 같다.
잔디가 깔리고 아름드리 나무가 서 있고.....새들이 지저귀는 아주 오래된 공원같은 곳이다.
......
무너진 망루의 반대편으로 가면 하이델베르크의 전경이 드러난다.
유럽을 소개하는 사진 같은데 의례 등장하는.....지붕이 무척 이쁜 풍경이다.
전쟁으로 많은 부분이 파괴되고 지금은 뼈대만 남아 있지만
높다란 외벽의 흔적을 보아하니 그리 크기도 작지도 않은 크기에 한때는 아주 야무진 성이었을 것 같다.
성 아래에 있는 멋진 오두막집....
저런 곳에 집이 있네....누가 살까..?
...
'훌쩍..'
여전히 날씨가 싸늘하다. 오늘이 유럽에 온 이후로 가장 추운날 같다.
얼굴을 스치는 찬 바람 때문에 이마가 다 얼얼할 정도니....
으슬으슬 떨리는 찬 바람을 피해 총총걸음으로 성 지하로 내려간다.
여기에 세계에서 가장 큰 술통이 있다던데....
그거나 보고 이제 내려가야겠다......
성 안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을 따라 어느 문 안으로 들어가니 정말 술통이 있다.
말이 술통이지 높이가 거의 아파트 2층 높이와 맞먹는데
계단을 타고 올라가서 그 위를 한참 둘러야 할 정도니 그 크기가 정말 엄청나다.
여기에 술을 담아 놓고 마셨으면 도대체 몇 명이 얼마나 오래 마실 수 있었을까...
이정도면 아마 옛날 하이델베르크 성 안 사람들이 일년 내도록 마셔도 충분한 양이었을 것 같은데
왜 굳이 이렇게 크게 만들었는지 참 희한하기만 하다.
술통이 크면 술 맛이 더 좋아졌었나?...
안개도 완전히 걷히고 햇살도 조금 따스해졌는데 여전히 싸늘하다.
슬슬 내려가서 점심 사 먹고 역으로 가야겠다.
하이델베르크의 오후
성령교회 앞 작은 광장에 꽃가게가 섰다.
무슨 꽃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노랗고 빨간 꽃들을 수레에 한 가득 실어 놓고 팔고 있다.
한쪽에서는 과일도 팔고....
이런 벼룩시장을 봐도 독일사람들의 기질은 정말 차분하고 검소하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사람들에게 어딘가 진중한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좀 무뚝뚝해 보이기도 하고...
표면적으로 잠깐 지나치면서 그 나라 사람들의 기질을 꼭 이렇고 저렇더라 하는 식으로
구분짓는 것은 좋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쭉 다녀보니까
대체로 나라마다 사람들의 기질이라는건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체코나 오스트리아...이탈리아가면 또 사람들이 달라지겠지..
뜻밖에도 하우프트거리에 한국식당이 있다.
유럽에 와서 한국식당은 처음 보는 것 같네...
보아하니 종업원은 조선족이고 주인 내외는 한국에서 오신 것 같다.
한국말로 반갑게 맞아주니 얼어있던 몸이 확 풀리는 것 같다.
빵도 맛있고 스테이크도 맛있지만 역시 오늘처럼 추운날엔 따끈한 국물에 밥이 최고다.
육개장 한 그릇에 역시 한국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정으로 공기밥 한 그릇 더.....
처음에는 유럽의 다른 레스토랑처럼 추가로 더 먹으면 돈을 더 내는줄 알고 사양했는데
한국사람에게는 그냥 돈 안 받고 더 준단다.
크.......역시 한국사람의 힘의 원천은 밥인가보다.
.......
주인 아주머니의 환대로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불편할 정도로 많이 먹은 후에
근처 슈퍼마켓에서 껌이랑 물...간식거리 몇 개를 사들었다.
입안 한 가득 진득한 육개장의 뒷맛이 오늘따라 그렇게 싫진 않지만 역시 껌은 씹어야겠다.
물은.....탄산이 없는 걸로.....
유럽사람들은 어떻게 탄산이 든 물을 아무렇지 않게 마시는지 통 알 수가 없다.
특이하게도 탄산수가 오히려 더 비싼 경우도 있다.
몸에 좋다고도 하지만 마치 사이다에서 단맛만 뽑아낸 듯한 이상한 그 맛에는 아직 적응 할 수가 없다.
.........
하이델베르크 역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의도적으로 무임승차를 했다.
장난 반 객기 반으로 뻣뻣하게 트램을 타긴 탔는데....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괜히 뒤통수가 가렵고 누군가 내 어깨를 툭 하고 잡을 것만 같다.
태연한척 시선을 창 밖으로 고정한채 앉아있다가 역에 도착하자마자 부리나케 튀어 내렸다.
'헤헤.....이거 뻔히 알고는 못할 짓이네.....'
락커에서 배낭을 꺼내고 플랫폼에서 슈투트가르트행 열차를 기다렸다.
......어째 좀 많이 빠진 듯한 기분이다.
어제는 브뤼셀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하는 바람에 하이델베르크에 저녁에 도착했으니
밤새 별로 한 것도 없이 오늘 오전에 너무 급하게 하이델베르크의 일정을 접어 버린 것 같다.
열차 이동 시간대를 잘 조절해야 쓸데없이 버리는 시간을 줄일 수 있는데....
일정이 공중에 붕 떠 버린 것 같다.
오늘도 이제 오후에 뮌헨까지 가버리면 하루가 그냥 지나가 버릴텐데.....
천천히 여유있게 둘러보는 것도 좋지만 이런 식이면 하루에 구경할 시간이 반나절밖에 되지 않는다.
내가 너무 설렁설렁 이동하는건가....
이제는 야간열차나 새벽열차 타는 것도 생각좀 해 봐야겠다.
.........
하이델베르크에서 슈투트가르트는 IC타고 30분만 가면 된다.
슈투트가르트
2시 46분....
하이델베르크를 출발한 열차는 순식간에 독일 남서부의 대표적 공업도시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했다.
공업도시답게 역사도 무슨 군수공장처럼 건조하게 생겼다.
플랫폼에 앉아 열차를 기다리고 있자니 꽤나 싸늘하다.
독일이 춥긴 춥네....
...........
사람도 없고 심심하니 하품만 나온다....
...
3시....
플랫폼의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ICE가 들어온다.
'역시 멋있게 생겼어....'
이렇게 좋은 열차를 예약 없이도 탈 수 있다니.....역시 열차 중에서는 ICE가 제일 좋은 것 같다.
처음 앉아보는 컴파트먼트 좌석....신기하다.
좌석 3개가 마주보고 있어서 앞사람이랑 발끝이 살짝살짝 닿기도 한다.
이 한 칸에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한꺼번에 앉아오면 참 좋을 것 같다.
아니면 '셀린느'같은 아가씨랑 단 둘이 앉아 와도 좋을 듯......훗
워낙 프라이버시가 강한 사람들이라 열차에도 이렇게 밀폐된 공간을 만들어 두나보다.
자는 사람....책보는 사람....
다들 조용하다.
내 옆에 앉아있는 팔뚝 굵은 아저씨도 뭘 하는지 서류만 뒤적거리고 있다.
컴파트먼트 안으로 불어오는 따뜻한 온풍기 바람에다가 점심을 배불리 먹었더니 식곤증이 더해져
눈꺼풀이 자꾸만 껌벅껌벅 감긴다.
'에라 모르겠다....종점까지니까 그냥 자자....'
.........
......
뮌헨..
5시가 조금 넘어서 올리버 칸이 이끄는 FC 바이에른 뮌헨의 연고지 뮌헨에 도착했다.
단정한 독일 주택들과 함께 유럽에서는 드물게 아파트랑 철골 유리 빌딩도 몇 개 보인다.
대도시답게 사람도 많고 차량도 많은게....
파리 이후로 이렇게 북적거리는 분위기는 처음이라 플랫폼에 내리니 좀 어리둥절하다.
하이델베르크보다 더 추운 것 같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이렇게 사람들 북적이는 곳에 오니까 참 좋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사람은 사람을 보면서 지내야 좋은 건가보다.
'음....뭐부터 해야되나....'
곧 저녁이라 빨리 숙소부터 잡을 생각으로 안내책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코트 차림의 점잖게 생긴 영감님이 말을 걸어온다.
"Korean?"
그러더니 무슨 종이쪽지를 불쑥 내미는게 아닌가.
'뭐야?.....'
오....그런데 놀랍게도 그 종이에는 한국말로 이렇게 써있다.
'친절한 무사씨의 집. 민박.....어쩌고 저쩌고....'
이거....말로만 듣던 현지인 민박이다.
보아하니 이 종이의 글도 여기서 머물다간 한국사람이 적어준 듯 하다.
'이야.....진짜 이런 사람들이 있구나....오호....'
영감님은 계속 'good~ good~'을 연발하면서 열심히 자기 집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는다.
보아하니 코트차림에 손에는 서류가방까지 들고 있는 아주 점잖은 분인데
어째 민박집 호객하는 차림새 치고는 너무 점잖다.
'그냥 보내 버릴까?...아니면....가격도 싼데 오늘 하루만 묵어 볼까?....혹시....인신매매범은 아니겠지?
아무래도 낯선 사람의 집에서 하루를 묵는다는게 선뜻 내키지가 않는다.
그렇다고 현지인 민박집에서 묵을 수 있는 기회가 흔한 기회는 아닌데......
어찌 해야할지...
.......
'그래...저녁이랑 아침까지 주는데 이정도 가격이면 정말 싸네.....지금 시간에 유스가도 방이 있을지도 모르겠고...'
한 10분을 고민한 끝에 결국 OK 사인을 하고 영감님을 따라나섰다.
"학생 정말 운 좋은 거야....오늘 하루 지내보고 마음에 안 들면 내일 나가도 좋아요~"
연신 'good~ good~'을 연발하는 영감님을 따라 S-bahn을 타고 다시 뮌헨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그래도 아직은 좀 불안해....
Musa씨의 집
S-bahn을 타고가 내린 곳은 한적한 아파트촌이다.
줄줄이 늘어서있는 아파트들.......
우리나라라면 어디든 볼 수 있는 참 익숙한 모습인데 유럽에서 이런 아파트촌을 보니까 기분이 색다르다.
역에서 내려 한 10분 정도 걸어가니까 영감님의 아파트가 나온다.
제법 높은데 엘리베이터는 없다.
"여기가 우리집이야.....어서 들어와요~"
방 2칸에 화장실이랑 부엌이 있는 자그마한 아파트다.
막상 들어서긴 했는데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여기가 침실이고....여기가 화장실이야....문은 너무 세게 닫으면 옆집에서 뭐라그래..."
배낭을 내려놓자 영감님은 집안 이곳저곳을 안내하면서 주의사항도 일러준다.
"방에서 쉬고 있어....저녁 준비되면 부를테니까...."
우물쭈물....
어찌해야할지 몰라 그냥 시키는데로 방안에 들어가서 옷부터 갈아입었다.
침대 메트리스가 깔려있는 방은 라디에이터가 틀어져 있는데도 좀 썰렁하다.
음.....아파트라서 좀 의외이긴 하지만 시설은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다.
방 한 켠 진열장에는 그동안 여기에 머물다간 사람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이 가득하다.
우리나라사람, 일본사람들이 남기고 간 편지하며 동전, 사진, 기념품, 엽서...
그 중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남긴 쪽지가 단연 제일 많다.
이 영감님 민박한지가 꽤 오래됐나보다.
'그런데 영감님 여기서 혼자 사시나? 할머니는 안 계신가?'
아무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집을 보증해 주니까 어느정도 위안이 되는 것 같다.
저녁은 빵이랑 영감님이 만들어 주신 특별 스파게티를 먹었다.
동방예의지국의 청년으로서 나이드신 어르신이 혼자서 손수 음식 준비하시는걸 앉아서 보자니
몸둘바를 몰라 이것저것 도와드리려해도 한국사람들 예의바른거 다 안다면서 한사코 사양하시네...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도리가 아닌거 같아서 조금 거드니까 또 연신 'good~ good~'하고 좋아하신다.
재밌는 영감님이다.......
..........
스파게티가 따끈해서 맛있게 잘 먹었다.
안그래도 따뜻한게 먹고 싶었는데.....쇠고기 찜같은게 들어 있는 특이한 스파게티였다.
접시를 치우고 후식으로 과일차를 한 잔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영감님은 원래 슬로바키아인인데 20년째 독일에 건너와 여기 뮌헨에서 살았다고 한다.
자기도 여행을 좋아해서 유럽, 아시아, 호주 등등을 다녀 왔다면서 벽 한쪽에 모아 놓은 여러나라의 배지(badge)를 자랑하신다.
20살 때 찍은 사진을 보니까 젊었을 때 아주 미남이었다. 군대있을 때 찍은 사진도 있고.....
한쪽에 아가씨 사진이 있길래 딸이냐고 물었더니 흐뭇한 표정을 지으면서 딸 자랑도 하신다.
지금은 뮌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산다고 하는데 호텔리어 연수중이라고 한다. 딸도 아주 이쁘게 생겼다.....
원래 직업은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리키던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퇴직하고 이렇게 민박도 하면서 슬로바키아의 역사에 대해서 책도 쓰고 있다고 하신다.
할머니와는 사별한 것 같은데 차마 물어보지는 못했다.
아마도....적적하시니까 이렇게 민박을 하시는 것 같다.
.........
영감님이랑 축구 중계방송도 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영감님이 피곤해 하시길래 일찌감치 방으로 들어와 매트리스에 누웠다.
아까 라디에이터를 세게 틀었더니 이제야 방안에 온기가 조금 도는 것 같다.
낯선 외국인의 집에 누워있다니.....
평범한 독일 가정집에 이렇게 지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은 것 같다.
원래 현지인 민박을 만날 기회가 그리 흔치 않기 때문에 아주 색다른 경험인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내일은 유스로 옮겨야겠다. 아무래도 막 지내기에는 유스가 더 편하다.
사람들도 많이 만날 수 있고.....
아무튼 별일이다.
'여행'이라는 단순한 '끈' 하나가 24살 한국애와 한 독일 영감님을 이렇게 마주하게 할 수 있다는게 참 신기하다.
생전 처음 보는 타인에 대한 신뢰가 '여행'이라는 매개체만으로 이렇게 쉽게 생기는걸 보면
사소한 일로 서로 편가르고 사람을 경계하는건 참 유치한 짓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