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0. 5. 火
런던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어느덧 2층 버스에 익숙해진 덕분에 이제는 느긋하게 런던을 바라보고 있다.
한가한 오전의 런던 거리...
어제도 뮤지컬 티켓을 사러 레스터 스퀘어에 잠시 들렀었는데 또 늦게 가는 바람에 티켓을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처음부터 바로 극장에서 티켓을 살 생각을 하고 오페라의 유령이 공연되는 'HER MAJESTY'S'로 가는 길이다.
런던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인데 멋지게 마무리 짓고 가야지...
HER MAJESTY'S
내가 생각했던 극장과는 전혀 다르게 생긴 이 멋진 건물이 바로 '오페라의 유령'이 공연되는 곳이다.
'her majesty's...?'
나중에 알게된 사실인데 'her majesty'란 말은 '여왕폐하'를 지칭해 부르는 말이라고 하니까
'HER MAJESTY'S THEATER'이라 함은 '여왕폐하의 극장'이라는 뜻인 것 같다.
저녁 7시 30분, 2층 B4 15파운드짜리 제일 싼 좌석.
오늘 저녁에 유령을 만나는 거다.
런던 거리의 풍경
다시 구부정한 길이 인상적인 옥스포드 거리에서 잡아탄 2층 버스는
피카딜리 서커스를 지나, 넬슨 제독이 지키고 있는 트라팔가 광장을 거쳐
녹황색의 템즈강을 건너 워털루 역까지 나를 데려다 줬다.
며칠 사이에 이곳에 꽤나 익숙해져 버린 나를 느낀다.
거리 거리가 새삼스레 정겹다.
'이제 2층 버스 노선도 많이 아는데....정들자 떠나네..'
워털루 역에서 파리행 유로스타 티켓을 받아들고 버거킹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역시 감자튀김 하나는 정말 푸짐하게 나온다.
템즈강변
가랑잎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이 런던도 여지없이 가을이다.
국회의사당 뒤로 템즈강을 따라 난 한적한 길을 걷는 동안 낙엽이 사각거리며 부서지는 소리를 듣는다.
파란 잔디위에 떨어진 연갈색의 낙엽들도 바라보면서....
단 며칠동안 바라본 런던이지만 이런 고풍스러움과 호젓함이 난 참 맘에 든다.
마치 평생 사용해서 손에 익은 낡은 가구를 대하는 것처럼...
하늘이 또 흐릿해진다.
아무튼 런던 날씨 변덕스러운건 알아줘야겠다.
TATE BRITAIN
근대 영국 미술을 모아 놓은 테이트 브리튼은 템즈강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 있는 단아한 미술관이다.
내셔날 갤러리가 영국을 대표하는 갤러리임은 틀림없지만,
근대 영국 미술의 흐름을 확연히 보여주는 곳은 바로 테이트 미술관이라고 한다.
일단 공짜라서 좋고, 내셔날 갤러리보다 사람들이 적어 좀 차분하게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아래 그림들은 테이트 브리튼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이다.)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 The Decline of the Carthaginian Empire ... exhibited 1817
테이트에는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미술가 중의 한 사람인 터너의 작품이 다수 전시되고 있다.
옛부터 영국에서는 풍경화의 인기가 아주 좋았다고 하는데 터너가 바로 그런 아름다운 풍경화를 많이 그린 화가였다.
그리고 영국 왕립아카데미 출신의 사실적인 그림과 라파엘로 전으로 돌아가자는 뜻의 '라파엘 전파'의 그림도 상당수 전시되고 있다.
라파엘 전파의 그림은 그간의 감상적이고 고전 모방에 그친 영국 미술계에 반기를 든 19세기 중반의 영국 화풍으로
내적 의미를 가지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고 한다.
그런면에서 '레이디 샤롯'과 '베아타 베아트릭스'는 다른 미술작품과는 다소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John William Waterhouse 1849-1917, The Lady of Shalott 1888
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 Beata Beatrix circa 1864-70
George Romney 1734-1802, Mrs Johnstone and her Son (?) circa 1775-80
George Frederic Watts 1817-1904, Love and Life circa 1884-5
'....Love is shown guiding a naked, frail young woman up the rocky path of existence.
As they ascend, violets blossom on jagged stores and clouds disperse to reveal a clear blue sky.
Love is here understood as altruism and compassion, rather than physical passion....'
그림을 본다는 것, 감상 한다는 건....고상한 브루주아적 취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미술사를 꿰뚫고 있다거나 화가나 작품명을 줄줄 외우기 때문에 미술관에 들른 것은 결코 아니다.
그저 조금의 '관심'과 '이해'가 있다면 부담없이 와서 느끼면 그게 그만인 것 같다.
야구의 모든 룰을 모르더라도 야구의 재미를 느끼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처럼
자기가 봐서 눈이 즐겁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본다.
자꾸 보다 보면 이제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자신만의 '그림 보는 잣대'가 생기기 시작할테니까.
야구처럼말이다...
그저께 내셔날 갤러리에서는 갤러리 안에서 태연하게 한 쪽 가슴을 드러내고 애기에게 모유를 먹이는 아주머니를 본적이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광경이 아니지만 이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 같았다.
유추가 좀 억지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이들에게 미술감상은 실생활의 일부분이라고 봐야 하는게 아닌지.
.......
그건 그렇고...
미술작품을 감상하는데도 생각보다 많은 체력이 필요한 것 같다.
미술관 앞 벤치에서 아픈 발바닥을 주무르며 아이스크림 하나로 잠시 휴식.
이제 하이드 파크로 간다.
하이드 파크
2층 버스를 타고 도착한 하이드 파크는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더 없이 푸른 빛을 띄고 있었다.
공원의 도시 런던 답게 도심속에 있는 거대한 녹색공간이 더 없이 상쾌해 보인다.
아마 내가 본 잔디밭 중에 가장 넓은 잔디밭이 있는 곳이 바로 여기 하이드 파크인 것 같다.
그린파크가 소박한 뒷뜰이고 세인트 제임스 파크가 화려한 정원이라면
하이드 파크는 커다란 숲인 듯.....
하늘을 봐도 파랗고....나무를 봐도 파랗고....
이렇게 푸른색에 마음껏 취해 보기도 참 오랜만인 것 같다.
..................
..................
우리나라 밤송이보다 훨씬 작은 영국 밤들이 나무 아래 한 가득 떨어져 있는데,
어디선가 청설모들이 쪼르르 달려와 부지런히 밤을 까먹는다.
작은 밤 알을 빼서는 오물오물....왠만큼 가까이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고 빤히 쳐다보 모습이 앙증맞다.
잠시 여행의 피곤함을 잊고
말없이 천천히....공원을 거닐었다.
.............
공원 한 가운데 있는 커다란 호수는 발밑까지 물결을 찰랑거리고 있다.
호수 저 끝에서 한참을 더 가야 공원이 끝날 것 같은데....
이렇게 멋진 공원을 가지고 있는 런던시민들은 참 좋겠지....
이것저것 머리가 복잡할 때 그냥 여기와서 한 바퀴 슥 거닐다 가면 머릿속이 맑아질 것 같다.
커다란 호수에....끝도 없는 잔디밭....아름드리 나무들.....
벤치에 앉아 책을 읽어도 좋고, 좋아하는 사람이랑 그냥 걸어도 좋고, 인라인을 타도 좋고...
한 아주머니가 작은 조랑말에 어린 딸을 태우고 승마를 가르쳐주고 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보기좋고 부럽던지....
이네들은 이렇게 여유있고 재밌게 살아가는데 우리는 너무 아웅다웅 정신없이 살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우리는 이런 여유를 누리기엔 부족한게 많은 걸까?.....
해가 많이 내려갔다. 시간이 많이 지났네...
헤롯 백화점
하이드 파크 근처에는 영국 왕실 백화점으로 알려진 헤롯 백화점이 있다.
쇼핑에는 별 관심 없지만, 왕가 사람들이 즐겨찾는 백화점에는 뭘 파는지 평민으로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이애나 황태자비가 생전에 자주 들르곤 했다는 이곳은, 과거에는 복장 제한도 있었다고 한다.
요즘은 뭐 어떤지 모르겠지만, 입구에서부터 경비원과 직원들이 들어오는 사람들을 아래위로 훑어보고 있다.
백화점 안은 과연 1층부터 보기만 해도 비싸보이는 온갖 종류의 상품들이 가득 진열되 있다.
번쩍거리는 시계와 귀금속, 프랑스제 향수와 화장품, 이탈리아 가죽제품, 향긋한 초콜렛....
보고만 있어도 입이 떡 벌어지는 고가의 물건들 뿐이다.
고가 상품의 위세에 눌려 위층으로 올라가니 전자제품 코너가 있는데,
거기에는 우리나라 가전회사가 만든 냉장고가 몇 천 파운드의 가격표를 붙이고 당당히 전시되고 있었다.
'헉....비싸네...비싸...'
크리스마스 장식 코너에는 정말 특이하고 이쁜 인형들과 장식품이 또 한가득이다.
그나마 헤롯 백화점에서 내 수준에 맞는 곳은 여기밖에 없는 것 같다.
이제 슬슬 저녁 먹고 뮤지컬 보러 가야겠다.
오페라의 유령
차이나 타운에 있는 일식집에서 덥밥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극장에 도착해 보니까
뮤지컬을 보러 온 사람들이 벌써 삼삼오오 극장앞에 모여있다.
우아하게 티켓을 내보이며 계단을 따라 극장으로 들어간다.
'어라...'
영국답게 고급스럽고 고풍스런 극장 내부는 생각보다 훨씬 작고, 좌석 배열도 많이 휘어져 있었다.
오른쪽 끝에서 보면 무대를 거의 옆으로 본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돈 좀 더 주고 가운데 자리에 앉는 건데...'
콜롬비아에서 왔다는 한 청년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가운데
드디어....
조명이 흐려지며 공연이 시작되고...
슬픈 사연을 간직한 듯한 원숭이 인형의 경매가 시작된다.
.........
Think of me - Phantom of the Opera [O.S.T] 중에서 -
[Christine]
Think of me, think of me fondly when we've said goodbye
Remember me once in a while
Please promise me you'll try
When you find that, once again, you long To take your heart back and be free
If you ever find a moment, spare a thought for me
We never said our love was evergreen or as unchanging as the sea
But if you can still remember stop and think of me
Think of all the things we've shared and seen
Don't think about the things which might have been
Think of me, think of me waking, silent and resigned
Imagine me trying too hard to put you from my mind
Recall those days, look back on all those times
Think of the things we'll never do
There will never be a day, when I won't think of you
[Raoul]
Can it be?
Can it be Christine?
Bravo!
What a change
You're really not a bit the gawkish girl that once you were
She may not remember me, but I remember her
[Christine]
We never said our love was evergreen, or as unchanging as the sea
But please promise me that sometimes you will think of me
.........
2시간이 넘도록 계속된 공연 내내 아름다운 여주인공 크리스틴의 목소리에 취해 무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음악에 귀를 맡긴채 배우들의 동작하나하나 무대 구석구석을 따라 내 시선이 움직였다.
가슴이 막 저려오는 이 느낌을 뭐라고 해야할지....
마지막에 유령이 의자에 가면을 남기고 사라질 때의 그 아쉬움이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아...뮤지컬이라는게 진짜 이런거였구나...'
극장을 울리는 아름다운 노래와 꿈속을 표현한 듯한 환상적인 무대장치가
왜 사람들이 런던에 가거든 뮤지컬을 보라고 하는지...그 이유를 알 수 있게 해 줬다.
정말 멋진 공연이었다.
열연한 배우들에게 힘찬 박수를......'짝,짝,짝'
런던의 밤
조명도 꺼진 빅벤 밑에서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워털루 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부터 이제 역으로 가서 새벽까지 기다릴 셈이다.
이렇게 런던과도 작별이다....
이제 겨우 여행 초반일 뿐인데도 요 며칠 동안 런던에서 내가 보고 느끼고 겪은 일들은 날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매일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눈 감을 때까지, 내 눈 속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다 새롭고 인상적이었다.
지금 이 모든 것들을 내 머릿속 '영국'이라는 기억의 공간 속에 저장시키려고 부단히 노력중이다.
내 머리를 믿지 못할 경우에는 수첩에 끄적거리기도 하고....
글쎄....
런던에서 보낸 지난 3일 동안의 기억만해도 내 머릿속 한가득인데
앞으로 남은 일정동안 보고 느낀 것도 계속해서 내 머릿속에 담아둘 수 있을지 의문이다.
20분을 기다린 끝에 저 멀리서 천천히 버스가 다가 온다.
워털루 역
자정이 얼마 남지 않은 워털루 역은 적막하기만 하다.
2층 플랫폼에서 작업하는 인부들의 기계소리만 들릴 뿐,
유로스타가 출발하는 아래층에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있을 따름이다.
'흠....5시까지 어떻게 기다리나.....'
그렇게 자정이 넘었다.
같이 떠나는 일행과 함께 에스컬레이터 뒤편에 자리를 잡고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일기도 쓰고, 빵도 먹고, 다른 사람 구경도 하다가
슬슬 잠이 오는지 다들 의자를 나란히 놓고 잠을 청한다.
고등학교 때 점심시간에 가끔 취했던 포즈였는데 여기는 의자가 좀 불편한 것 같다.
...........
잠들다 깨다를 반복하기 여러번.
시계는 이제 겨우 3시 반을 넘었다.
'으......젠장.....추워......'
이제는 쏟아지는 잠보다 주위를 엄습해오는 추위가 더 문제다.
밀폐된 곳이 아니라 그런지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코끝을 스치면 몸이 으스스 떨린다.
이렇게 유명한 역이면 기다리는 사람을 위해서 히터라도 털어줘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강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주위를 둘러 봐도 히터는커녕 따로 들어가 바람피할 장소도 없는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숙소에서 자다가 새벽에 나올 걸'하는 후회는 당연지사겠지만 이제와서 후회한들 어떻하나.
잠도 깨고 몸도 녹일 겸 역안을 괜히 어슬렁 거린다.
아까 우리가 의자 위에 누워서 자는 모습을 보고 상당히 놀라워 하던 외국 청년은 바닥에 담요깔고 자고 있다.
저기 구석에도 한 아가씨가 바닥에서 자고 있고...
'이사람들은 의자 위에서 자는 걸 모르나?...왜 저렇게 땅바닥에서 자냐....'
역시 새벽에 아무도 없는 역 안을 돌아다니는 건 재미없다.
조금만 더 자면 곧 들어가겠지....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으.....화장실.....'
이번엔 생리적 현상 때문에 잠이 깨 버렸다.
부시시 눈을 비비며 화장실로 올라가보니 이게 왠 말....4시 20분에 연단다.
시계를 보니 아직 새벽 3시 50분. 잠이 확 깬다.
'이런...안돼...'
다른 화장실을 찾아 역 여기저기를 두리번 거린다.
그런데 이렇게 넓은 역에 화장실이 딸랑 저기 하나 밖에 안 보인다.
'이런 말도 안돼는.....말도 안돼는....으.....말도 안돼.....'
결국 30분 뒤 눈썹이 휘날리도록 찾아간 그 화장실은 20펜스의 유료화장실이었다.
'젠장....작은건데...20펜스냐....'
왠지 화장실을 돈 내고 들어간다는게 너무 아까운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지...
정말 긴 새벽이었다.
하나 깨달은게 있다면 노숙의 전제조건은 '히터'와 '화장실'이라는거....
유로스타
새벽 5시 15분.
마치 공항처럼 여권에 출국 도장을 받고 드디어 유로스타에 몸을 실었다.
떠나자니 아쉬움이 너무 많이 남는다.
런던...
빗방울이 시시각각 날리는 변덕스런 날씨지만...
고풍스런 거리와 빨간 2층 버스, 푸른 잔디밭과 커다란 나무의 아름다운 공원들이 있는,
그리고 전통을 아끼고 진정으로 삶의 여유를 아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정말 멋진 도시인 것 같다.
천천히 기차가 움직이고 어둠 속에서 런던이 저 멀리 멀어져간다.
'다시 올 날이 있겠지....'
이제는 파리다.